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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1963년 2월 21일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l.97m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으나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유행하던 철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탄력이 감소되고 느슨해진 신체의 윤곽선과 몸 전체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법의(法衣)의 느슨하면서 얇게 빚은 듯한 옷주름(평행밀집계단식(平行密集階段式) 의문(衣文)) 등에서 9세기 후반기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왼쪽 팔 뒤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 때 무주장사(武州長沙)(현 광주(光州)·장흥(長興))의 부관(副官)이었던 김수종(金遂宗)이 헌납하여 헌안왕 2년(858)부터 1년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시주자(施主者)인 김수종이 불상을 헌납한 장선사(莊禪寺)는 바로 선종9산문(禪宗九山門)의 하나인 보림사문파(寶林寺門派)를 연 보조선사(普照禪師)이므로 이 불상은 선사상(禪思想)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융합에 의하여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상임을 알 수 있고, 이후 크게 유행하는 비로자나불상의 시조격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헌안왕 3년(859)에 불상이 완성되었다는 불상조성 절대연대를 알 수 있어서 불상편년연구(佛像編年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9세기 후반기 철불 유형의 확실한 첫 예이자 새로운 양식의 선구적인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한 뒤에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나발(螺髮)에 육계(肉髻)는 크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볼은 살이 올라 통통하다.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다소 긴 코는 각이 져 우뚝하고, 두툼한 입과 커다란 귀 등에서 위엄이 느껴지나 전체적으로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전체 체구에 비해서 손은 지나치게 작은 반면 가부좌한 다리는 커서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통견의 법의는 V자형으로 앞가슴을 덮었으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반복적인 평행으로 비교적 유연하게 흐르고, 수인은 오른손으로 검지를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철을 이용해 불상을 만든 까닭은 9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불상의 제작 또한 각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방의 호족들은 귀한 금을 이용하기보다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철을 불상 제작에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철제 불상이 등장하여 이전보다 양감이 떨어지는 불상이 제작되었다.
비로자나불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다.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大光明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한다. 좌우 협시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지만, 노사나불과 석가여래가 협시하는 삼신불이 모셔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766년 석남사 비로자나불을 시작으로 9세기 중엽부터 반세기 동안 많이 조성됐다.
불국사 보림사 동화사 도피안사 등의 비로자나불이 특히 유명하다.
청정한 진리…미래부처님 상징, 진리 그 자체를 나타내는 法身, 고통없는 세상 여는 ‘메시아’
부처에는 3가지 종류의 삼신(三身) 부처가 있다.
* 법신 : 우주의 이치와 진리를 인격화한 무형의 부처이며 부처를 이루는데 근거가 되는 몸을 뜻한다.
* 보신 : 보살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완덕에 이른 이상적인 부처이다.
* 화신 : 특정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는 부처로서 인도의 실존 인물 석가모니 부처,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가 그 예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이란 수인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먹을 가슴에서 아래, 위로 포개고 밑의 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싼 모양이다. 이것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님, 미혹함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손모양을 통해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소리도 없고 형상도 없다
침묵(沈默)과 적조(寂照)의 미(美), 그것은 아마도 불교미(佛敎美)의 최상일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장엄하며 평화스러운 미(美)라고 생각한다. 색깔로 치면 무채색의 은은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은 칼라풀한 다채색의 강렬한 아름다움보다 훨씬 인간을 평화롭게 하며 내면으로의 자기를 반조케하는 숙연함이 있다. 아마 그것은 영원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군더더기 없이 말쑥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영원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불은 『법화경』에서 대략적인 묘사만 했을 뿐이고『화엄경(華嚴經)』에 이르러 영원한 부처님인 법신불을 침묵의 부처님, 광명의 부처님으로 언급하면서 비로자나불을 전면에 내세운다.
비로자나불의 산스크리트 표기는 바이로차나 붓다(Vairocana Buddha)이다. 바이로차나는 태양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는 특징 내지는 태양 자체를 이름하는 것이다. 원래 '골고루'라는 뜻의 부사 '비(vi)'와 '빛나다'라는 뜻의 동사 원형 '루츠(ruc)'에서 파생된 것으로 불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달을 지칭하기도 했다. 여하튼 태양의 빛이 만물을 비추듯이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일체를 비추며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 법신불에는 형상이 없고 소리도 없다. 그래서 전혀 설법을 하지 않는다. 다만 법신불의 미간(眉間) 백호(白毫)에서 광명이 터져나와 시방 세계의 모든 나라를 드러낸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혹은 적광전(寂光殿)이라 하며 그 부처님 이름을 따서 비로전(毗盧殿) 이라 칭하기도 한다. 불국사에는 법을 설하는 강당 무설전(無說殿)이 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로자나불이 빛을 발하자 그곳에서 무수한 불 보살이며 신들이 나타나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찬탄하고 그 대지를 아름다운 연꽃으로 꾸미며 부처님 대신 설법한다. 바로 화엄(華嚴)의 바다가 펼쳐진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한 떨기 연꽃으로 피어나 조화를 이루며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하니 바로 연화장(蓮華藏)의 세계인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모든 악기가 각기 제 목소를 내더라도 하나의 화음을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를 일컬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法界)라 한다. 그래서 그러한 통일의 원리,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인격화해서 법신불이라고도 했다.
비로자나불, 인격화된 공(空)의 모습
법신불은 법, 즉 공의 인격화된 보습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공의 의미를 살펴보면 비로자나불의 특징이 좀더 확연히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일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의 「동양적 무의 성격」에 그러한 공의 특징이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첫째, 무일물성(無一物性)이다. 무일물이란 단지 한 물건도 없다는 부정적 표현이 아니라 어떠한 집착의 흔적조차 없다는 뜻이다. 내외의 대상을 전부 끊어버리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둘째, 허공성(虛空性)이다. 이 허공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⑴ 무장애(無障碍)이다. 말 그대로 어떤 것에도 장애를 받지않는다는 의미이다. ⑵ 주편(周遍)이다. 허공은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은 심적인 곳까지 미치므로 사실 허공보다 더 그 범위가 넓다. ⑶ 평등이다. 취하고 버리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선이거니 악이거니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받아들인다. ⑷ 광대(廣大)이다. 타자로부터 한정되지 않으므로 한계가 없이 광대무변하다. ⑸ 무상(無相)의 뜻이 있다. 외형상으로나 내면상으로 어떤 모습이 없다. ⑹ 청정(淸淨)의 뜻이다.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푸르른 벽공(碧空)을 떠올려 보라. 육체적으로 청정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명경지수처럼 청정하다. ⑺ 부동(不動) 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불생불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고정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동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부동이 아닌 것이다. ⑻ 유공(有空)의 뜻이다. 자로 재거나 기하학적으로 측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참이라든가 미 등으로 헤아리기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⑼ 공공(空空)이다. 공이라 해도 단순한 무가 아니라 유무도 초월하여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무적 주체를 말한다. 공에 대한 머무름 또한 공에 대한 집착이므로 그러한 공마저 끊어버린 대 자유이다. ⑽ 무득(無得)의 뜻이 있다. 어떤 소득도 없다. 다른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소득도 전혀 없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이고 무탐(無貪)이며 적빈(赤貧)이라는 의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셋째, 즉심성(卽心性)이다. 허공에는 생명이 없으나 공에는 마음이라는 포근한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생명이나 마음이 아니다. 허공과 같은, 그렇치만 생명이 있는 진짜 마음으로 진정한 생명과 자각이 흘러 넘치고 있다. 바로 무념 무심한 마음이요 무각(無覺)의 각(覺)이 공에는 서려있는 것이다.
넷째, 자기성(自己性)이다. 이는 주체적 마음을 말한다. 그것은 대상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아니다. 나아가 주객으로 나누어진 이후의 이분법적인 자기가 아니라 주객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주체적 자기를 말한다.
다섯째, 자재성(自在性)이다. 공은 주체적 주체일 뿐더러 완전히 자재한 주체이다. 어떤 대상, 심지어 부처님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로 자유로운 경계를 말한다. 불교의 진정한 해탈은 이러한 자재성이 철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집착하거나 걸림이 없이 즉각적으로 상황에 응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유희 삼매의 경지이다. 이를 인격적으로 일러 무위 진인(無位眞人) 또는 무의 도인(無依道人)이라 한다.
여섯째, 능조성(能造性)이다. 바로 창조성을 말한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인류 문명을 형성해 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어냈어도 생명만은 창조할 수 없었다. 즉 인간의 창조성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모든 생명까지 만들어 낸 전지전능한 창조자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실증되지 않은 신화에 불과하며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유심(唯心)의 실증이다. 이러한 마음은 물과 같아 거기에서 물결이 수시로 일어나고 이윽고 사라지되 물 자체는 불기불멸(不起不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을 바탕으로 무수한 물결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공으로부터 숱한 사물들이 창조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은 광대무변하고 못 미치는 데가 없으며 모든 생명의 바탕이요 창조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 공의 인격화인 법신불 비로자나불을 가리켜 '변일체처(遍一切處)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한다. 구체적으로 원효(元曉) 스님은 이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⑴ 크나큰 지혜요 광명이다(大智慧光明)
⑵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두루 비춘다(遍照法界)
⑶ 진실 그대로를 아는 힘이 있다(眞實識知)
⑷ 깨끗한 마음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自性淸淨心)
⑸ 영원하고 행복하며 자유로우며 깨끗하다(常樂我淨)
⑹ 청결하고 시원하며 언제나 변함이 없이 자재하다(淸凉不變自在)
바로 무에서, 그 고요한 침묵에서 이 모든 삼라만상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그것이 화엄(華嚴)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이 화엄의 비로자나 부처님을 극진히 섬겨왔다. 신라는 그 삼국 통일의 원리를 이러한 화엄의 사상에서 빌어왔다. 해인사, 부석사, 범어사를 비롯한 전국의 유수한 사찰이 화엄의 세계관 위에 중중무진 꽃을 피운다. 거기 비로자나 부처님이 지권인(智拳印)을 한 모습으로 침묵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보림사나 도피안사의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도 그렇게 천년을 훨씬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미소짓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서양적 사고 방식에 세뇌당하여 이러한 무를 등한히 하고 너무 유 내지는 존재에만 치우쳐 왔다. 그러나 그 존재의 세계는 한계가 있는 세계이고 때가 낀 세계이며 오히려 어두운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