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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의 경제학(Social Problems) _ 헨리 조지 지음, 전강수 옮김 / 돌베개
1. 점점 커지는 사회문제의 중요성
금세기 말(19세기 말)에 중대한 사회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 시대의 특징인 물질적, 지적 진보의 결과다.
사회의 발전과 종(種)의 발전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조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면 더 큰 능력과 힘이 주어지지만 욕구와 위험도 증가하고 따라서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된다는 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곳에서 관찰 가능하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직된 존재다. 그런데 더 큰 능력을 발휘하려면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능이 없으면 인간은 아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능은 자연계의 계층구조에서 고등동물로 올라갈수록 높아지지만,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오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인간의 지능은 동물의 지능에 비해 월등하게 높아서, 양자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종류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오면 본능, 즉 무의식적인 진능이 의식적인 이성으로 바뀌며, 하나님에게서 온 듯한 적응력과 발명력은 연약한 인간을 자연계의 왕으로 만든다.
종의 발달이 끝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이 시작된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인간이 끝인 진보에서 발견되는 법칙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이 진보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 한 단계 진보할 때마다 훨씬 더 높은 지능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가 시작되면 사회적 지능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지능을 통합하여 여론이나 공적 양심 그리고 공적 의지를 형성하며, 법률/제도/행정 등으로 표현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능이 필요하게 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능이 요구 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개인들 간의 관계가 점점 더 밀접해질 뿐만 아니라 중요해지고, 사회조직은 점점 더 복잡해져서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야만인들로서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긴다. 개인의 복지는 모든 사람의 복지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개인은 점점 더 사회에 종속되게 된다.
개인은 필요한 물건 중에 몇 가지 혹은 심지어 한 가지의 일부만 생산하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반면에 사회조직은 더 민감해진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혼란이 찾아온다. 현대 문명은 강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급속한 진보는 생산방법과 물질적 생산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의 변화는 사회변화를 수밚기 마련이고 결국 정치적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옷이 몸에 맞지 않게 되듯이, 사회가 진보하면 기존 제도는 새로운 사회에 맞지 않게 된다. 진보하는 사회에서 사회문제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전보다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진보와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더 그렇다.
증가하고 있는 필요와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맞추어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부와 권력을 운이 좋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키고 그 외의 사람들을 인간 기계로 취급하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무질서를 조장하고 파괴를 초래한다.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을 강구할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이 출현하기만 하면된다.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은 이미 우리 손에 잇따. 한쪽에서는 빈곤과 결핍이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다른 한쪽에서는 생산 능력의 과잉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
사회문제를 처리하는 데 발휘되는 지능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질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발휘되는 지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자연과학은 성큼성큼 전진하는 반면 정치과학의 발전은 느리다. 부를 생산하는 기술은 크게 진보했지만 공평한 분배를 달성하는 일에서는 아무런 전진도 없었다.
문명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의 처리에 더 많은 지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지능이라야 한다.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또, 정치경제학을 대학교수들에게만 맡겨둘 수도 없다. 국민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국민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능은 단지 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감상에서 나오는 생명력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에서 나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소수의 이기심이건 다수의 이기심이건 이기심을 초월해야 한다. 또 그것은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모든 사회문제의 바탕에는 사회적 불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정치적 위험
미국의 정치제도는 근대적 사고에 가장 잘 부합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덕에 유럽 국가들을 괴롭히고 있는 위기와 여려움에서 벗어나 있으며, 광대한 미점유 토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
미국에서 성장과 진보가 매우 빠르고 현대 문명의 여러 특징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의 이면을 볼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도 이곳에서 가장 분명하게 노정될 것이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긴박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성 또한 엄청날 것이다.
과거 문명의 역사를 곱씹어보는 사람이라면 부유하고 강대한 민족들은 어김없이 자유를 상실하며, 오직 작고 가난하고 고립된 공동체에서만 자유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성장하면 정부는 점차 사람들로부터 독립되고 사람들을 넘어서는 존재로 변질되며 권력은 점차 지배계급이 장악하게된다. 지배계급이라 함은 사적 소유권이나 세습적 지위를 가진 계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사적 소유권과 세습적 지위 때문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사적 소유권과 세습적 지위가 생기는 것이다.
사회성장으로 인한 변화에다 산업기술의 개선이 가져오는 변화가 결합된다. 증기기관과 기계는 분업을 발달시키고 부와 권력의 집중을 초래했다.
극도로 부유한 사람과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는 권력을 장악한 사람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만다.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저항에 필요한 정신과 지성이 없고 극도로 부유한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는 부의 분배가 평등한 곳, 즉 대다수의 시민들이 빈곤에 매이지도, 부에 사로잡히지도 않은, 인격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살 수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모든 정치문제의 저변에는 부의 분배와 관련된 사회문제가 존재한다.
정부가 점점 더 부패하고 국민들의손을 떠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일 정말로 우리나라 정부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정치에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의 견해를 검토하여 낡은 생각은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편견을 버리고 자유로운 정신에 입각해 판단해야만 한다. 바람의 방향이 어떻게 변하든 돛을 똑같이 유지하면서 똑같은 항로를 고집하는 항해사는 절대로 안전한 항구에 도달 할 수 없다.
3. 도래하는 사회적 압력
우리가 곧 미국 문명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조건 하나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삶에 자유와 기회를 부여하고 유럽 선진국들에서 작용하고 있던 사회적 압력을 완화한, 처녀지로의 진출 가능성이다. 처녀지로의 진출이 가능하던 시절에는 전혀 무해했던 현상들도 상황이 바뀔 경우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화약은 좁은 곳에 밀어 넣기 전까지는 폭발하지 않는다. 천천히 올라가는 유압 프레스에 손을 얹는다고 해보자. 기계는 아주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릴 것이다.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려! 저항에 직면할 테니.
4. 상반되는 두 경향
이론과 우화, 그리고 미신이 상식적 믿음 속에 자리를 잡을 경우, 너무 틀려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 너무 터무니없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우화, 너무 저속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미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고문과 죽음 앞에 자신을 내놓기도 하고,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기도한다.
일부다처제는 가장 분명한 사실과 가장 강력한 본능에 반하는 것인데도 그것이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에서ㅏ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완벽히 잗연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오랜 노력과 분투만이 이런 생각을 뿌리 뽑을 수 있다.
노예제도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조차 사람을 소유하는 것을 말을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여겼다. 19세기에 이 '자유의 땅'에서조차 인간의 육체를 사유화하는데 반대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재산권을 폐지하려는 공산주의자, 이교도 혹은 선동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군주제도, 귀족정치, 아직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는 많은 부자연스러운 것들도 그렇다. 가장 적게 일을 하는 사람이 노동생산물의 가장 많은 부분을 취하는 것보다 더 부자연스러운-다시 말해 올바른 이치와 사실, 그리고 자연법칙에 반하는-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이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일뿐 아니라 자연법칙이기도하다.
생산력을 몰랍게 증가시키는 모든 발명과 개선은 소수의 수중에 부를 집적, 집중 시키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제 막 열정에 불이 붙기 시작한 사람들을 자신이 누릴 수도 없는 부를 생산하는 기계처럼 만들어버린다.
기계는 노동자의 영향력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를 부리는 고용주의 자리에 올라선다. 노동자는 단순한 보조자나 재료 공급 장치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소수의 감독자들 외에는 판단력, 속련, 두뇌가 필요 없다. 옛날 수공업 체계에서 노동자는 장시간 힘들게 일했다. 그러나 그 때 노동자는 고된 일을 하는 가운데 동료애를 느겼고, 다양한 활동에 종사했다. 또한 창조적 숙련을 발휘하는데서 오는 기쁨과 자신의 손끝에서 무언가 만들어지고 결국에는 완성품이 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자기 집에서 일을 하거나 고용주 옆에서 일을 했다. 모방, 수다, 웃음, 토론이 가능했기 때문에 노동이 부담 없고 즐거웠다. 도제는 직인(journeyman, 중세 유럽의 장인 길드에서 장인에게 고용되어 있했던 노동자)이 되는 날을 기다렸고 직인은 장인이 되어 자기 도제를 두는 날을 기다렸다.
이와 같은 하나의 산업 뿐 아니라 여타의 산업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농어에서도 대기업이 광활한 목장에서 가축을 사육하고 있고 대농장은 집도 절도 없는 방랑자 무리를 고용하여 경작을 시키고 있다. 모든 직종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도구와 노동기회로부터 분리되고 있고 모든 곳에서 재산 소유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각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낡은 보수주의가 후퇴하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발전하고 확산되고 있는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한 바람이 강한 해류를 만날 때 바다는 평온할 수 없다. 두 개의 상반된 경향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명세계가 곧 직면하게 될 사회문제의 중대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어떤 뜻으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장 34절)
5. 집적, 집중의 행진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증기기관과 기계는 인구의 도시 집중을 야기하는 중대한 요인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생산과 거래를집적, 집중시키는 데는 훨씬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농업, 축산업, 어업, 광업과 같은 기초산업에서부터 철도, 전신, 가스조명이나 전기 조명 등 최신 발명과 함께 등장한 신산업에 이르기까지 산업 부문을 가리지 않는 양상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토지 소유는 집중되고 있고, 농업 경영의 규모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한 요인을 꼽아보면,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농기계의 발달, 토지가치의 상승, 철도가 야기한 변화들, 소생산자에 비해 대규모 생산자가 누리는 이점 등이다. 이 현상과 함께 미국 농민 중 상당수는 소작농이나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이다.
옛 제도에서 독립적이었던 사람들이 대기업에 집단적으로 고용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선생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은 항상 사업에 성공하려면 열정과 근면, 그리고 절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그들은 항상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부자가 된 사람을 예로 들며 지금도 누구나 빈손으로 시작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변화의 시기에는 언제나 개인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사회관계가 다시 조정되고 나면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신생국에서 1세대의 부자들은 모두 빈손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2세대 이후의 부자들은 대개 상속받은 재산으로 시작한다. 신생국이 탄생하거나 새로운 발명품이 널리 보급되는 경우에만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성공한 스탠포드와 빌라드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처럼 성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거대 철도왕만이 다른 거대 철도와과 싸울 수 있다. 마치 나무가 크게 자라서 주변 땅의 수분을 죄다 빨아들이고 그 큰 그림자로 다른 식물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집중 현상은 모든 사업에서 나타난다. 큰 공장은 작은 공장을 몰아낸다. 큰 상점은 작은 상점이 경쟁에서 낙오할 때까지 물건을 싸게 판다.
세습 카스트제도처럼 엄격한 시스템이 지배하지 않는 한, 뛰어난 능력이나 행운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거나 하층계급에서 상층계급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부의 집중만이 아니다. 막대한 재산이 영속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은 없다.
나는 지금 이러한 경향이 공공의 편의를 크게 증진시킬 수 있음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유럽에서는 봉건제가 등장하던 시기에 자유 토지 소유자를 가신(家臣)으로 전환시키고 전체 사회를 수직적 계층구조로 만든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바로 봉건적 주종관계의 성립이다. 지금 문명세계 곳곳에서는 그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귀족 제도가 세습제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가 복권에 당ㅊ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참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첨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6. 현재의 사회상태에 내재하는 불의
사람들이 불평등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불평등, 즉 사람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과 역량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한사람은 1년에 몇백 달러를 벌기 위해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에 걸처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거의 일을 하지 않고도 수천 달러의 소득을 얻는다면, 이는 전자가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쓸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자기 근육의 힘뿐이기 때문읻. 동물적인 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안흔 그가 동물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기를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가 많은 봉급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뛰어난 기술을 지닌 사람이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에게 큰 상ㅇ디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하기 위해 고생스럽게 공부할 이유가 있겠는가? 라파엘이나 루벤스같은 화가에게 페인트공보다 더 많은 보수를 주지 않는 것은 엄청난 불의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성장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려다가는 진보에 대한 자극도 없에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자연의법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진실은 다른 진실로부터 격리된 거짓이 섞인 진실이다.
선체에 구멍이 나 있는데 물을 퍼내려고 앴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이 새는 것을 막고 배를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 상황에서는 재산의 불평등을 임의로 잠시 완화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평등을 초래하는 조건들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의 재산 소유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이간의자질과 능력에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다.
생산하는 사람이 소유해야 하고 저축하는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 질서에 부합하는 말이다. 여기에 비춰보면 현재으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사실, 대부호들 중에 공정하게 부를 획득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에게서는 뛰어난 근면성, 기술 또는 자기부인과 같은 요인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다른 살마보다 운이 더 좋았거나 훨씬 더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흔적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근면성, 기술, 절약정신으로 부를 얻은 것이 아니다. 영국에 있는 운 좋은 그의 친척들, 이제 여생동안 아무일도 안해도 되는 사람들이 그 유산을 얻기 위해 생산을 한 적이 없듯이, 그도 생산을 통해 그 재산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의 재산은 그가 번 것이 아니고 지표면의 한 부분을 독점함으로써다른 사람이 번 것을 전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모든 거대한 재산, 아니 오늘날 당당히 재산이라 불릴 만한 모든 것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독점, 약탈, 도박의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최대 제조업체의 대표 한사람이 내게 "우리가 돈을 버는 곳은 늘 하는 사업 분야가 아니라, 우리가 독점권을 얻을 수 있는 분야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토지가치의 상승은 토지 소유자가 부를 증가시켰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토지 소윺자는 땅을 한 번도 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땅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사회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비참한 가난에 빠져 있어야만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허용하고 만든 독점, 우리가 다른 사람을제치고 한 사람에게만 준 특혜, 그리고 법과 여론에 의해 인정받은 강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위를 돌아보면서 대부분의 재산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독점, 강탈, 약탈의 요소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편으로는 사회관계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부의 분배가 불평등해지는 이유는 인간 본성이 불평등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성에는 뿌리 깊은 잘못이 있다.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나 창조주가 정한 사회법칙-창조주의 법칙은 물리적 법칙과 함께 사회법칙도 포함한다-에 내재하는 잘못이 아니고 나쁜 사회제도에서 기인하는 잘못읻. 이런 잘못은 우리 힘으로 고칠 수 있다. 각 사람이 부를 똑같이 얻는 것이 아니라 부의 총량에 기여한 만큼 얻어야 이상적인 사회상태라 할 수있다. 그런 사회상태에서는 노력에 대한 자극이 지금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7. 이것이 절말 최선의 세상일까?
정치란 누가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건 기업들이며,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업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는 것이다. "국민들? 그들이 뭘 알고, 뭘 신경 쓰겠습니까? 언론이 국민을 지배하고, 자본이 언론을 지배합니다. 토끼 편에 서서 사냥감이 되기 보다는 개 편에 서서 사냥하는 게 낫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까지 굶주린 군중의 성난 외침이 전해지자 순진한 프랑스 왕비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텐데 저들은 왜 빵을 달라고 절규하는거지?"라고 물었다.
현대의 놀라운 발명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사회개선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은 깨지지 않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땅 위를 다니고 증기선이 바다를 건너다닐 거라는 생각을 조롱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놀라운 기계가 발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빈곤과 탐욕을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문화와 이성을 자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미치광이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몽상가로 취급받는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낡은 사상-소수에게 부를 안겨주고 다수에게 빈곤이라는 운명을 정해주며 일부 사람들을 지배자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농노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라고 보는 사상-은 힘을 잃고 잇따. 하지만 그 자리에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또 다른 사상이 들어서고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사회개선은 오로지 천천히 진행되는 인류의 진화-진화의 추동력은 험한 생존 경쟁이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 세상의 절반은 나머지 절반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는 말은 아래쪽 절반보다는 위쪽 절반에 훨씬 더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불쾌한 것보다는 즐거운 것을 보고 싶어한다. 한 푼도 없는 아이는 제과점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배고픈 사람은 축제 꿈을 꾸고, 가난한 사람은 졸부 이야기를 좋아하며, 가게 여종업원은 귀족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즐겨 읽는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관심을 끌지 못하고 묻혀버린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문명의 아름다움, 영광, 혜택은 짓밟혀서 비참해지고 뒤틀려버린 인생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8. 우리 모두가 부유해지려면
부유하다는 말과 가난하다는 말은 종종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부유해질 수는 없다고 말하거나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상대적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때 사람들이 말하는 부자는 부를 충분히, 또는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있어서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가난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나는 두 용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면서,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벗다고 선언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지금 우리가 얻으려고 악전고투하고 있는 물건들을 충분히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이웃에게 사기를 치거나 이웃의 물건을 훔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하며, 아무도 가난에 빠질까 두려워하고 어떻게 부를 얻을까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걱정하거나 밤을 지새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1등은 잘 대우해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또, 가난하면 안 된다는 것도 일찍부터 배운다. 빈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다 보면 탐욕을 따르는 습관이 형성된다.
현실에서 가난이 꼴찌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부의 헛됨을 설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정신없이 벌이는 생존경쟁은 끝날 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진정한 기독교적 문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자기 주위를 돌아보기만 하면, 빈곤은 자연의 인색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역을 해도 간신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것을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 아니면 신성모독이다.
빈곤은 더 많은 부를 생산할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생산능력이 시장의 소화능력을 능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두려운 일은 너무 적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생산과 생산능력의 과잉은 모든 산업 부문, 모든 문명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늘 다른 나라들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줄까봐 두려워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관세로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공공의 은인으로 추켜세운다. 우리는 늘 일자리 제공이 사회에 주어지는 최고의 은혜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엄청난 생산능력이 늘 낭비되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미국의 모든 산업 부문이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가 남북전쟁 때였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시장의 공급과잉은 과잉생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과잉 생산되었다고 이야기되는 물건들을 생각해보자. 그 물건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기회만 주어지면 자기 노동과 그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과잉 생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회만 있으면 기꺼이 일을 하려고 하는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아무일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는 것은 다른 노동(다른 노동자가 만드는 생산물을 뜻한다.)에 대한 유효수요를 만드는 기금(소득을 뜻한다.)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이 삭감된다는 것은 그로 인해 소득이 감소하는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늘 생산력의 낭비를 초래하고 산업 불황기에는 전쟁 때보다 더 큰 손실을 야기하는 마비현상은 욕구 충족을 위해 기꺼이 노동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충족되지 않은 사람드의 욕구가 남아 있고 자연이 부의 원료를 인간에게 계속 제공하는 한, 자연의 제약이 그 마비현상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 마비현상은 틀림없이 자연적 기회의 독점을 허용하고 노동자에게서 정당한 보수를 빼앗는 불의한 사회제도 때문에 생간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제약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분배의 불평등과 불의가 빈곤의 원임을 지적하는데 그치려는 것이다.
자연에서 빈곤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심지어 장애인이나 노인들조차 빈곤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고, 만성적인 빈곤으로 인해 인간성이 왜곡되고 사람이 짐승처럼 되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가족의 사랑과 사회의 동정으로 자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을 활용하여 사회조직을 자연법칙에 맞게 조정하지 않는다면, 심술쟁이들에게 사용하지도 못하는 것을 독점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리고 힘과 술수로 정직한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우리는 만성적인 빈곤과 그로 인한 사회적 해악을 모면할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6장 11절 일부) 성경 구절 중에 의미가 왜곡되어 마귀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고르라면 바로 이 구절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 정의와 사랑의 나라-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나라를 위해 싸우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에는 빈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전에는 철강이 그처럼 싼 적이 없었고, 노동이 그처럼 남아돈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부유한 정통 그리스도인 한 사람의 이야기)
우리가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음에도, 아무런 잘못도 없이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요, 우리의 수치다. 누구든 자기 주위를 돌아보기만 하면, 노동으로 하여금 자연적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하고 생산자에게서 그 노력의 소산을 빼앗는 불의가 우리 모두를 부유해지지 못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부를 가지는 사회, 빈곤을 추방함으로써 그로부터 생기는 두려움과 탐심과 욕망까지도 추방해버린 사회 즉, 정의에 기초한 사회에서 생산력이 어떻게 발현될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희미하게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발견과 발명은 여가와 물질적 안락함과 자유가 주어질 때 이뤄진다. 이런 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다면, 인간은 자연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분이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건 단순한 꿈 이상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9. 첫 번째 원칙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의 중심에 분배문제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은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문제에는 해결책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어정쩍한 대책이나 부착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나귀가 지는 짐을 모두 한쪽 바구니에 담고는 그 불쌍한 짐승이 똑바로 걷게 하려고 다른 쪽 바구니에 돌을 담는 멍텅구리의 발상과 다를 바 없다.)
사회적 병폐를 치유하고 사회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정의로운 부의 분배를 방해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부의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부의 분배란 분명 자연적인 부의 분배고, 따라서 불의한 부의 분배는 이 자연적인 분배가 사람들의 방해를 받아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부의 분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부를 만든 사람에게 그 부를 주고 부를 저축한 사람에게 그 부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정의로운 부의 분배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부를 안겨준다. 창조주가 우리에게 주신 원료를 사용하여 노동이 만드는 것(찾아내는 것을 포함한다.) 외에 어떤 부의 품목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영국의 한 작가가 모든 사람을 세가지 범주, 즉 노동자, 거지, 도둑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개인이 부를 획들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 즉 노동, 타인의 증여, 절도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자가 쥐꼬리만큼 부를 획득하는 이유는 분명히 거지와 도둑들이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생산하지 않은 부를 얻고 있다면, 그는 필시 그 부를 생산한 다른 사람들의 희생하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으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부과하는 공정한 부담금(공정하게 부과되는 조세를 연상하기 바란다.) 같은 것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려면 부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부지런한 사람들ㅇ르 희생시켜야 하며, 거짓되고 실현 불가능한 평등성을 실현해야 한다.
정의가 도덕의 발달단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첫번째 가치라는 사실이다. 정의보다 높은 가치는 정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의를 포함해야 하며, 정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사회제도는 정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란 너무도 명확해서 누구도 부정하거나 논박할 수 없는 권리에 관한 원칙들-자연스럽고도 영원한 원칙들-을 의미한다. 생산하는 사람이 소유해야 하고 저축하는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소유권 개념을 약화시키거나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한 근거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또 생산의유인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보상이 더 확실하게 이뤄지도록 만들어서 더욱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면 각 개인은 자신의 것을 보장받게 되고 따라서 자선사업 자체가 필요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정의, 즉 각 개인에게 그의 것을 보장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정의는 자선보다 더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3절)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사회상태를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좀더 완전하고 고상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비교할 만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존 브라운(1800~1859,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은 두 팔이 묶인 상태에서 어린 노예의 키스를 받으며 중죄인으로 죽었지만 그것은 그가 영원히 사는 길이었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했던 마치니(1805~1872, 이탈리아의 혁명가로 가리발디를 도와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도모한 인물) 연설 속에 담긴 진리를 높이 평가...
[ 노동자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상을 변화하실 때, 그분은 부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권리를 더 얻을 필요가 없었고, 가난한 자들은 권리가 주어지면 꼭 부자들을 본따서 그것을 남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사람들의 행복이나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이해관계와 행복에 사로잡혀 부패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의무에 대해, 사랑에 대해, 희생과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 그들에게 온 힘을 다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서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실한 삶이 모두 사라져버린 곳에서 울려 퍼져서 진실한 삶을 회복시켰고, 수백만 명을 회심시키고 마침내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분의 말씀 덕택에 인류의 교육 수준은 진보의 사다리를 한 계단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때와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제국만큼이나 부패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런 사회를 변화시켜 다시 살릴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의 법칙을 따르며 하나의 목표를추구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맹아 형태로 주신 모든 재능을 자유롭게 그리고 진보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 땅이 천국을 준비하는 곳이 되고 이 사회가 하나님의 뜻을 혁신적으로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은 그분이 가르치신 믿음의 가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또 그분 곁에는 자신들이 받아들인 믿음을 행위로 드러낸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들과 같이 된다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분들과 같이 된다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여러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미덕과 희생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덕이 높고 남을 사랑하며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존재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대담하게 이야기하고 여러분의 필요를 용감하게 밝히십시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반발하거나 휘협하지는 마십시오. 위협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경우 그들을 대적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흥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
10. 인간의 권리
사람과 사람 간에는 정부 성립 이전부터 이미 권리가 존재했으며 그 권리는 정부가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가지는 인간 사회의 어떤 법보다도 더 높은 법, 즉 자연에 새겨져 있고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창조주의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기계 제작자가 기계 제작 과정에서 뭔가 물리적 법칙을 무시했으려니 추측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병폐와 정치적 불의를 발견할 경우, 사회조직 내에서 도덕법칙에 맞서고 인간의 자연권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생존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음)
미합중국 헌법 전문-정의를 실현하며....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보장
프랑스 인권선언(1789년)-인권에 대한 무지와 소홀함 또는 멸시가 공적 재난과 정부 부패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오늘날 미국인들은 보통 인간의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가 모두 인정받고 있다고 믿고 있다. 빈곤, 범죄, 저임금, 과잉생산, 정치적 부패 등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병폐들은 분명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
생명과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인정한다면서 재산에 대한 권리-자기 노동과 자기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우리는 인간의 평등한 자연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노동과 자기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를 만드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기본권을 부정하면 한쪽에서는 빈곤이 발생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풍요로움이 넘치고 극히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서 비롯되는 낭비와 부패와 타락이 만연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 자기힘의 사용에 대한 권리 그리고 자기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자연적이고도 자명한 권리다. 자기 노동과 그 결실에 대한 기본적인 자연권이 허용된다면, 이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필요를 여유 있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의,식,주 등 부라고 불리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을 생산할 수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부의 원료를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노동이나 노동의 결실을 제삼자에게 팔아서 얻는 돈으로, 이 지구의 특정 부분을 '소유한자'에게 이 지구상에서 살아갈 특권을 누리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데 자기 노동의 일부를 바친 다음에는 식량과 의복을 얻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토지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하지 못하고 토지 소유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조건으로 노동을 팔아야만 한다. 토지 소유자들이 원하는 조건은 너무 혹독해 우리의 주인공은 극히 비참한 상태에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즉, 노예제 시절 최악질 노예주라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만 받고 간신히 살아가는 것이다. 짐승처럼 되어버린 영국의 백인 노예들이 대저택의 주인들을 가르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산이 남아 돌아서 철도 주식 또는 공채에 투자하거나 미국 토지를 매입한다. 하지만 이 재산 중에 그들이 생산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재산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토지 소유가 허용되고 있어서 생산자들이 만든 부가 그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의 분배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원인이 명백하게 드런난다.
토지에 대한 자연권을 빼앗긴 채 하나님의 땅을 침범하는 존재로 취급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단지 짐승처럼 사는 '특권'을 얻기 위해 무리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공업 지역이나 도시 빈민가에서 인간성은 비참함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들이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미국 시민권은 미국 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첫번째 인권이자 가장 근본적인 인권이라 할 수있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에 대한 권리는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미국에서도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11. 쓰레기 갖다 버리기
한 나라의 힘은 사람에 있다.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고, 부를 생산하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문명화된 기독교 정부, 혹은 그렇게 간주되는 정부가 마치 뉴욕에서 쓰레기를 싣고 대서양에 가서 버리는 것처럼 자기 국민들을 다른 대륙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모국에 머문다면 그들은 최고 호황기에도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기가 그다지 좋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세금을 더 걷어서 시혜를 베풀어야만한다. 가장 싸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공공경비를 들여서 그들을 밖으로 실어 보내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적이고 평등하며 양도 불가능한 인권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자연적 질서하에서라면 원래 생계를 잘 꾸릴 수 있는 사람들이 궁핍과 기아로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그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 노동을 자유롭게 투입할 자연적 기회(토지를 가리킨다)가 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노동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 노동의 성과를 빼앗는 것이 합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땅은 경작되었고 인구도 조밀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부락들과 이곳저곳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남아메리카 남쪽 끝에 있는 섬들) 사람들도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오두막집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런던과 파리에 살고 있는 이 땅의 '주인들'-이들 중 다수는 자기 땅을 본 적도 없다.- 이사람보다 가축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사실상 토지에서 생기는 수익보다 더 많은 양을 지대로 납부하고 있다. 토지와 바다를 이용하는 대가뿐만 아니라 바람에 대한 대가까지 납부하고 있는 셈이다.
대지주들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소득은 그들 자신의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지주들이 할 일이라곤 돈 쓰는 일뿐이다.
12. 과잉생산
과잉생산은 보통 거래 부진과 일자리 부족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약과 무리와 궁리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빈곤과 결핍을 겪고 있는데, 부가 과잉생산되고 있다니! 부에 대한 욕구가 모두 충족되고 누구도 더 많은 부를 원하지 않을 때까지는 전반적, 절대적 의미의 과잉생산은 분명 있을 수 없다.
물론 상대적 과잉생산은 있을 수 있다. 어떤 상품의 생산이 다른 상품들의 생산과 유지해야 할 적절한 비율을 초고해서 이뤄짐으로써 다른 상품들과 다 교ㅕ환되지 못하고, 그 결과 생산에 투입된 노동과 자본이 통상적인 수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상대적 과잉생산은 단지 여러 상품의 생산에서 비례관계가 깨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상품의 생산이 증가해서 발생할 수도 있고, 다른 상품의 생산이 감소해서 발생할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모든 겨래는 상품과 상품의 교환이다. 화폐는 단지 가치 척도이자 교환을 경제적이고 편리하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수요-구매력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른 개념이다.- 란 가치가 동일한 다른 물건을 내주는 대신에 한 물건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급이란 가치가 동일한 다른 물건을 받는 대신에 한 물건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는 공급을 수반하고 공급은 수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상대적 과잉생산은 생산을 증가시키는 요인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고, 생산을 감소시키는 요인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산업 부문에서 생산이 증가하면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증가한다. 거래가 활성화되고 전체 경기는 좋아진다. 일시적으로 깨진 균형은 금방 회복된다. 반면에 한 산업 부문에서 생산이 감소하면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감소한다. 거래는 위축되고 전체 경기는 나빠진다. 한 산업 부문에서의 생산 억제가 다른 산업 부문의 생산물들에 대한 수요 감소로 이어지는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불황이 확산되어가는 것이다.
생산 과잉이 아니라 생산 억제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직간접으로 생산을 억제하는 원인은 많다. 생산이 물건을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운송하고 교환하는 일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다. 상업이나 상업수단에 가해지는 제약은 농업이나 공업에 가해지는 제약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관세는 해외무역을 어렵게 하는 것, 즉 우리나라 생산물과 다른 나라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을 억제하는 것이 명시적인 목적이지만, 실은 생산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독점도 같은 방식으로 생산을 억제한다. 독점기없들이 국내 상업에 요금을 부과한다는 것, 즉 서로 담합하여 공급을 줄이고 인위적으로 가격을 인상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연방국세청이 공업에 부과하는 조세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억제한다.
생산하고 개량하면 벌금이 뒤따른다. 한 농부가 지금은 사회의 부를 증가시키는 일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빈 땅에 가서 그곳을 개간하고 경작해 농작물이 가득하게 만들거나 또는 그곳에 많은 가축을 방목할 경우, 우리는 그가 부를 증가시키는 일을 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땅을 그냥 놀리고 있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그에게 부과하여 생산의욕을 꺾는다. 저축할 경우에도...그의 절약에 벌금을 부과한다. 그리하여 모든 방면에 생산이 억제된다.
훨씬 더 큰 생산 억제 요인이 존재한다.
한 부문에서 부의 생산이 억제되면 다른 부문에서 생산되는 부에 대한 수요가 감소한다.그리하여 생산 억제는 한 산업 부문에서 다른 산업 부문으로 파급되고 흔히 과잉생산이라 불리는 현상이 야기된다.
토지가치는 인구와 부가 증가할 때는 물론이고 증가하리라는 기대만 있어도 상승하기 때문에, 강력하지만 실체가 없는 낙관이 토지가치 상승과정에 개입하기 쉽다. 그래서 자기는 생산에 두팁되는 노동과 자본이 제대로 수익을 낼 수 없게 되는 수준까지 꾸준히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급속하게 성장하는 나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노동과 자본이 생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노동과 자본이 생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투기가 과열되고 그로 인해 산업 전반에 걸처서 갑작스럽게 생산이 억제될 때 일어난다. 이런 일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생산 억제가 모든 산업 부문에 확산되는 이유는 그것이 수요 억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투기 과열로 인한 생산 억제와 그로 인한 수요 억제, 바로 이것이 상업불황 혹은 산업불황이라 불리는 주기적 발작의 주요 원인이다.
산업과 상업의 교란이 어떤 원인에서유래하건 생산요소들이 토지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얼핏 보아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도 주기적 불황이 확산되고 지속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했다. 경기침체 혹은 불경리라고 부리지만, 심한 경우 대구모 전쟁보다 더 큰 손실과 고통을 유발하는 공적 재난은 사실은 우리가 인권을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자연을 이용하며 녿의 성과를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평등하고도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경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13. 실업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끔찍한 현상에 대해 살펴보자.
노동은 분명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노동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기까지는 노동 수요가 노동 공급에 못 미치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 없다.
토지와 공기와 물, 이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토지가 중요하다. 인간은 토지 표면 위에서 살고 토지로부터 생존 물자를 얻기 때문이다. 인간이 대양을 항행하고 있고 또 언젠가 공중을 항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토지에서 나오는 물자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토지는 물자와 힘을 보관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다. 인간은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이 창고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는 인간이 노력하여 확보했거나, 욕구에 맞추기 위해 변형한 자연의 물자와 산물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부의 생산에는 능동적 요소인 노동도 필요하고 수동적 요소인 토지도 필요하다. 토지가 없이는 노동은 생산도 할 수 없고 생존도 할 수 없다.
노동이 자연의 기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경우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의 재료와 기회가 공기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세상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렴움이 있을 수 없고,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일이나 임금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서 노동자들이 간신히 살아가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 세상이 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제공해준다고 해서 그에게 감사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식욕을 준다는 이유로 감사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기회가 공기처럼 공짜인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하면서 의도하는 바는, 노동으로 하여금 토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바로 맷돌의 아래짝이자 산업구조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어려움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방식과 정도가 다를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는 토지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토지가 없으면 어떤 사람도 사룻가 없다. 토지가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농업은 토지의 유일한 용도가 아니다. 여러 용도 중 하나일 뿐읻. 고층 건물의 최고층이 최하층과 마찬가지로 토지 위에 세워져 있듯이, 공장 노동자는 농민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토지를 사용한다. 끝까지 따지면, 모든 부는 토지와 노동의 결과물이며, 모든 생산으 ㄴ토지에 노동을 가하는 것이다.
농업에서 노동 수요와 임금률(시간당 임금)을 경절하는 요인은 노동이 스스로를 고용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토지 획득의 용이성임에 틀림없다. 토지 획득이 어려운 오래된 나라들에 비해 토지를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신생국에서 농업뿐만 아니라 모든 직종의 임금이 더 높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가치가 상승할 때 임금이 떨어지고 일자리 찾는 일이 더 어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토지에서 직접 부를 만들어내는 근본 직종에까지 내려가보자. 거기서 노동이 스스로를 고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면, 파생 직종에서 남아도는 노동은 순식간에 흡수되어버릴 것이다. 이는 일자리를 잃은 기계공, 공장 노동자, 사무원이 모두 자기 농장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직종에서 일자리의 압박을 완하하기에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토지로 향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14. 기계의 영향 중국인들이 노동적약적 기계를 도입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혁신을 맹목적으로 혐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발명이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그 유익은 결국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19. 가장 위대한 개혁
창조가 인간에게 부여한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 가운데 첫번째 권리, 즉 자연적 기회의 사용과 혜택에 대한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기 전까지는 실제적이며 지속 가능한 성과를 거둘수는 없다.
항상 옭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중도를 찾으려는 사람은 부당하게 참수당할 운명에 놓인 사람을 보면 발을 자르는 정도가 적절하다고 주장할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공유지를 실제 거주자에게 불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해서 토지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다.
하지만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려면 뿌리부터 다뤄야만 한다. 소유의 집중을 초래하는 일반적인 원인이 해소되지 않는한, 어떠한 법적 수단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자기 나라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기 전까지는 임금은 그런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한명의 노예 주인이 소유할 수 있는 노예 숫자를 제한하는 방법으로는 노예제도를 철폐할 수 없었듯이, 토지 소유의 규모를 제한하는 방법으로는 산업 노예제를 철폐할 수 없다. 창조주가 모든 사람에게 부여한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하고,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
노예제도, 일부다처제, 식인풍습, 어린이 두상 변형, 전족 등은 그런 제도나 관습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은 토지가 노동생산물처럼 개인의 소유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생각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나라의 처녀지가 전부 사유화된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층, 범죄집단, 극빈계층이 출현했으며, 소위 자유로운 미국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열심히 수고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토지 소유가 로마의 심장부를 점령한 이래 전 세계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가공할 만한 재산이 축적되고 있다.
본질적으로 토지는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야 하는 인간 노동의 생산물과 다르다. 토지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지만 노동생산물은 인간이 생산한 것이다. 토지는 양이 고정되어 있지만 노동생산물은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토지는 여러 세대가 왔다가 가더라도 그대로 있지만 노동생산물은 금방 마모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듯이 땅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토지의 개량과 적절한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에 투입되는 노동과 자본이 각각 그 대가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 된다. 사실 토지가 모든 사람의 공동재산으로 취급된다면 사람들은 지금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개선에 나설 것이다. 개선하는 사람이 개선의 이익을 모두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제도하에서는 토지를 얻으려면 가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개선은 억제도리 수밖에 없다. 구입하든지 임차하든지 해서 토지를 확보하고 개선에 나서면 개선의 성과에 대해 세금이 부과된다. 개선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것이 중과세 대상이다. 토지가 모든 사람의 공동재산으로 취급된다면, 공동체에 귀속되는 토지 지대로 공공경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세금을 모두 철폐할 수 있다. 개선하는 사람은 개선할 토지를 더 쉽게 얻을 수 있고, 개선의 이익을 몽땅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세금 면제다.
모든 시민에게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은, 일부 무지한 사람들이 추측하듯이 모두에게 농토를 지급하고 도시 토지를 잘게 분할하자는 뜻이 아니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보장학 위해 토지를 똑같이 나눌 필요는 없다. 단지 토지 지대를 걷어서 공동의 이익이 되도록 쓰면 된다. 다른 조세를 모두 처례하여 조세 부담이 토지가치에만 돌아가게 한 후 지대를 징수하여 공동의 익익이 되도록 쓰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는 정부기구를 확대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크게 단순화하면서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만들 수 있다.
토지 지대를 조세로 징수해서 공적 목절을 위해 사용할 경우 지금 노동과 자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모든 조세를 철폐할 수 있다. 생산에 대한 제약은 제거되고 생산을 자극하는 유인은 커지기 때문에 부의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또한 자연적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는 것을 통해서 부의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다. 어떤 사람도 토지가치의 상승을 기대하여 토지를 보유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토지가치가 상승할 경우 조세가 그걸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토지 투기는 완전히 근절되고 토지 이용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사용 토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연적 수단과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는 동시에 지금 생산을 방해하고 생산에 벌금을 매기고 있는 조세가 철폐됨으로써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 모든 소득의 원천이 되는 기금도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 개혁은 부의 분배를 지금보다 훨씬 더 평등하게 만들 것이다. 노동에 가해지고 있는 제약이 제거되고 자연적 기회가 모든 사람에 개방되면, 노동은 자유롭게 스스로를 고용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만 서로 구직 경쟁을 벌이는 일방적인 상황이 사라지는 대신,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자연히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연대할 필요도 없게 된다. 물론 고융주는 기술, 예측 능력, 자본으로 생산에 기여한 부분을 가져가게 될 텐데, 그것은 그에게 돌아가야 정당하다.
이렇게 부의 분배가 평등해지면 엄청난 절약이 가능해지고 생산력은 크게 증가한다. 사회는 빈곤 때문에 생기는 나태, 극빈자 문제, 범죄 등에 대처하기 위해 써야 하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부의 분배가 평등해지면 노동의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고 대중으ㅟ 지성은 향상 되며, 임금이 상승하여 발명과 생산과정 개선의 유인도 커질 텐데, 또한 생산의 비약적 응가를 자극할 것이다.
토지가치에 부과되는 조세를 제외하고 모든 조세를 철폐하면 정부기구가 크게 단순화되고 정부지출도 크게 줄어든다.
"토지는 집 밖에 있다." 감추거나 이동시킬 수 없다. 그래서 토지 가치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훨씬 쉽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며, 토지가치에 부과되는 조세도 100퍼센트 확실하게 그리고 최소의 비용으로 징수할 수 있다.
생활상태가 평등해지고 빈곤이 타파됨에 따라 사회생활 가운데 나타날 도덕적 분위기의 고양도 중요하다. 부에 대한 탐욕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소를 짓밟는 것은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ㅏㄷ. 졸부가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 만들어내는왜곡된 사고방식 때문이다.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단순한 세제개혁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회제도를 자연법에 맞도록 바꾸는 것이다. 창조의 창조 계획에는 인간의 물질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들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를 이루며 사는 존재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필요와 기능이 커지므로 수입도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 개인적 필요뿐만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도 그것을 충족시키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수입을 확보하는 데도 자연스럽고 올바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토지가치에 과세하는 것이다. 성질상 보행에 적합한 것이 발인 것처럼 성질상 과세에 적합한 것은 토지가치이다. 또 몸과의 관계에서 볼 때 보행에 적한 것이 발인 것처럼 사회와의 관계에서 볼 때 과세에 적합한 것은 토지가치다. 토지가치는 사회가 통합되면서 공공의 혹은 공동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토지가치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고 성장하기 ㄸ"ㅐ문에 생기는 토지가치를 사회가 징수해서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쓰자는 말보다 더 정으에 부합하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의 재능과 사회의 능력이 그런 것처럼, 자연의 다양성은 자연력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늘어날 수록, 사회가 발달할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이 토끼풀로 덮인 한없이 넓은 목초지에서 산다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숨은 능력과 기쁨을 준다.
지대 법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인들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된다. 사회가 성장할 수록 개별 구성원들은 점점 더 통합되고 일반적 이해관계의 삶의 조건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그럵 경우 개인이 혼자 힘으로 창출할 수 있는 가치를 초과하여 사회 전체가 창출하는 가치가 생긴다. 이 가치는 토지가치로 표현되기 때무에 누구나 감지할 수 있고 확실하며 계산과 수취도 가능하다. 사회가 성장할수록, 사회 전체가 생산에 기여하는 ㅂ2ㅜ분에서 유래하며 그 부분을 감지 가능한 형태로 표현해주는 이 가치도 증가한다. 자연법-확하과 천문학의 목적이 각각 그 관련 방면으 자연법을 찾는 데 있듯이, 경제학의 목적은 이 자연법을 찾는 데 있다.
우리가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 찬 개들에게 어린아이들의 빵을 던져주고 다양한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게 된 것은,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만들고 자연이 모두를 위해 마련해둔 이 기금을 개인이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명의 한 가운데에서사회 부패의 전조라 할 수 있는 끔찍하고 터무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창조주의 선한 선물을 오용하고 그분의 사회법칙을 무시하거나 거역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