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지난 2월 한 남자의 부음을 접한다. 남자의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인한 돌연사. 아내는 생활고와 스트레스에 못 이겨 10개월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이제 세상에는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들, 남매만 남았다. 오빠는 열여덟 살, 동생은 열다섯 살.
고(故) 임무창 씨. 그는 쌍용자동차의 '무급 휴직자'였다. 2009년 쌍용자동차가 2646명의 구조 조정 계획을 발표하자, 그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회사에 맞서 옥쇄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전쟁보다 끔찍한 상처를 남겼지만, 무급 휴직자에 대해 "1년 경과 후 순환 근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고 쓰인 '노사 합의서'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임 씨는 생전에 무급 휴직자가 회사로 돌아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동안 그와 아내를 포함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중 열네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2009년 옥쇄 파업 이후 우리가 머릿속에서 지웠던 '쌍용자동차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생사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 소식에 정혜신 대표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3월 26일 평택을 찾는다. 그는 쌍용자동차 파업을 겪은 해고 노동자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가족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진단하고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가수 박혜경의 재능 기부 프로젝트 '레몬트리 공작단'이 해고 노동자의 아이들과 노래 부르며 놀 때, 그는 해고 노동자들을 앉혀 놓고 심리 상담을 진행했다.
▲ <홀가분>(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해냄 펴냄). ⓒ해냄
aladinOrderButtonWrite('8965743095');
심리 치유 프로그램 1기가 막을 내린 직후인 23일, 정혜신 대표가 강남구 신사동에 직접 꾸린 '심리 카페 홀가분'에서 그를 만났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이야기와 새 책 얘기를 듣기 위해서다. 이달 중순 그는 남편인 심리기획자 이명수(마인드프리즘 대표)와 함께 카페 이름과 똑같은 제목의 책 <홀가분>(전용성 그림, 해냄 펴냄)을 펴냈다.
홀가분. 정혜신 대표가 매주 만나는 해고 노동자들이 이고 사는 감정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다. 정 대표를 만난 23일 19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진 송지선 아나운서가, 잇따라 27일 목숨을 끊은 가수 채동하 씨가 결코 다다르지 못했던 상태다. '사람'과 '마음'이 사라진 세태 속에서 갈수록 각박해지는 우리 역시 홀가분과는 거리가 멀다.
슬픈 소식과 무심한 클릭만이 익숙한 세상을 향해 정 대표는 "'홀가분'에 이르려면 자기를 천천히 깊게 보는 게 먼저"라고 조언했다. 나아가 그는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인터뷰는 이명현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진행했다.
정혜신은 두더지, 이명수는 저울?
프레시안 : '마인드프리즘'에서 낸 그림 에세이를 묶어 <홀가분>을 펴냈다.
정혜신 : 홀가분하다. 연재가 시작된 지 5년이 넘었다. 처음엔 마인드프리즘에서 1:1 상담 마친 분들에게 보내드리는 편지였다. 하다 보니 그분들이 부하 직원이나 친구한테도 메일을 돌리더라. 여럿이 보고 싶다는 문의가 계속해서 왔고, 그래서 '선물하기' 기능을 시작했다. 그렇게 퍼져나간 것을 중간에 한 번 묶어 냈고 이번이 두 번째다.
▲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 ⓒ조재무
프레시안 : 이명수 대표의 말에 따르면 <홀가분>은 "느긋하고 밝고 깊은 책"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가?
정혜신 : 상담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강한 자기애를 갖는 것이다. 이 책은 자기애와 관련한 근본적인 화두들을 변주한 글들의 모음이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들이 책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자기애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있어 근원에 해당한다. 그것이 상처 덩어리든 콤플렉스 덩어리든, 자기 자신을 깊게 천천히 들여다보면 애정과 끌림이 무한하게 솟아나온다. 결코 자신이 근사하고 멋지고 대단해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출근길 그(이명수 대표)와 내가 나눈 사유의 결과물이 <홀가분>이다"라고 썼다. "정혜신이 쓰고 이명수가 마음을 포갰다"는 서문을 보고 '예쁘게 산다'고 질투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정혜신 : 예쁘게 산다는 표현이 적절한 나이가 아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좀 쑥스럽다. 다만 그 사람(이명수)은 책에도 쓴 대로 "정혜신의 심리적인 구루"다.
내가 하는 일이 상처받은 분들과 상담하는 건데, 그분들과 만나는 현장은 유혈이 낭자한 수술실이다. 대표적으로 고문 피해자 분들. (정혜신은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잔인한 고문 끝에 허위 자백으로 간첩으로 만들어진 피해자들을 돕는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이사로도 활동한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분들이 찍어보고 싶다고 왔다가, 그분들 얘기 자체가 끔찍해서 도중에 다 그만둔다.
그런 일을 자청해서 듣는데 어떻게 버티겠나. 여러 버팀목이 있겠지만 그 근원의 힘은 그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겐 엄마가 필요하다. '엄마성'을 갖춘 무언가를 공급하면 누구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엄마성을 제공하는 이에게도 엄마가 필요하지 않겠나. 치유자로 활동하는 나를 치유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것은 정말로 행운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아이들'로 유인하다
프레시안 :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제 얘기를 해보자. 3월부터 지난 21일까지 8주간 해고자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심리 치료를 진행했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건가?
정혜신 : 2009년부터 파업 당시의 상황과 연이은 자살 소식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지난 2월 어머니는 자살로, 아버지는 돌연사로 아이들이 고아가 됐다는 기사를 보고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다. 고(故) 임무창 조합원 얘기다. 심리 치료를 무조건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쪽에 심리 치료 받고 싶은 사람을 모아달라고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무작정 가서 "심리 상담합니다. 하고 싶은 분들 오세요" 한다고 사람들이 올 거라고 생각 안 했다. 왜냐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건 자살률이 가장 높은 정신과 질환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하는 질환이다. 끔찍한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사력을 다 하는 중인데, 제 상처를 남 앞에 드러내겠나.
그러니까 "상담 받으러 오세요" 할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유인할 것이 필요했고, 그게 '아이들'이었다. 당장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알리면 부모들이 올 수 있지 않겠나. 그들은 당장 2년 동안 사투를 치르느라 부모로서 애들을 돌봐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놀아준다는 건 부모의 죄의식을 더는 큰 유인이 된다.
프레시안 : 그러다가 '레몬트리 공작단'을 만난 건가.
정혜신 : 그렇다. 가수 박혜경을 만났다. 박혜경은 평택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겪는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다.
자살 시도를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아이들이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지 너무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내가 치유 프로그램을 하기 위해 아이들과 놀아줄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했더니 '레몬트리 공작단' 얘기를 해줬다. 자원 활동 목적으로 트위터에서 사람을 모았는데 그게 400명이나 된다고.
레몬트리 공작단이 평택 와서 아이들과 놀면, 내가 부모들을 유인해 일단 차부터 들게 하면서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첫날 온 부모들이 50여 명이었다. 파업 이후 최고로 많이 모인 거라고 한다. 그간 모두 공포 때문에 숨는데 바빴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의 '쌍'만 꺼내도 악몽을 꿀 정도니까….
그날 레몬트리 공작단에서 정말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해 왔고, 너무나 헌신적으로 아이들과 놀아줬다. 우리 심리 치료 팀은 그 사이에 부모한테 말을 건넸다. 왜 상처를 내놓아야 하는지, 감추고 피하는 건 '증상'이고 치료되어야 한다고. 피하고자 하면 더 고통스러워진다고 설명해줬다. 그러자 그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몇 분은 울기도 했다.
그날 오후부터 바로 상담에 들어갔다. 상담 받을 사람 나오라고 했더니 8명이 나왔다. (해고 노동자) 부인들도 하고 싶다고 해서, 다음 주부터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룹을 따로 꾸렸다.
프레시안 :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나.
정혜신 : 치유라는 게 무엇인지, 왜 경험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다른 해고 노동자들한테도 가가호호 방문하기 시작했다. 또 많은 이들이 먼저 상담 받은 사람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냐', '하니까 어떠냐' 궁금해 하며 묻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프로그램 2기가 구성돼서 6월 둘째 주부터 다시 시작된다. 자기 속에 있는 걸 바깥에 내놔도 안전하단 느낌을 받기 시작한 거다.
ⓒ조재무
죽음의 경계에 선 부모, 공포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
프레시안 : 아직도 많은 이들이 숨어 있는 건가.
정혜신 : 내가 평택 갈 때마다 늘 자살자가 더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상담 프로그램에 고개를 내밀거나 주변을 얼쩡거리는 사람들은 비교적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얘기 TV에 나옵니다", "명진 스님이, 김제동이 옵니다" 하고 유인하는데도 그런 소식 자체를 차단하는 사람들도 많다. 서울에서 사람이 온다고 하는 문자만 봐도 두렵고 가슴이 철렁하다는 거다.
아직 더 많이 파고들어야 하는데 공격적으로 가면 안 된다. 노동조합 지도부에 있는 분들은 왜 사회에서 이렇게 관심 가져주는데도 불러도 안 오냐며 답답해한다. 호응을 해줘야 판이 더 커지는데 안 나오니 화가 나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숨는 게 증상이라고. 그걸 지적하고 계몽시키려 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프레시안 : PTSD에는 1, 2차 외상이 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정혜신 :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자. PTSD의 1차 외상은 전쟁터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처럼 그 자체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온다. 2차 외상은 그 끔찍한 일을 견디고 살아 왔는데 그 행위가 부정되거나 비난을 당하는 데서 온다.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고 전쟁에 나가 죽을 고생을 했는데 돌아오니 "무자비한 전쟁", "명분 없는 참전", "가서 한 일은 살인일 뿐" 딱지가 붙는 거다.
그럼 쌍용자동차 사람들은 어떤가. 해고되기 전엔 훌륭한 아들이자 사위, 좋은 아빠였는데 파업하고 해고되고 나니 "빨갱이"라고 하고, "무책임한 가장"이라고 한다. 자기는 너무 억울해서, 살아남겠다고 투쟁에 나선 건데 사람들은 "해고됐다고 죽냐"라고 한다. 그런 시선이 두려워 명절에 집에도 못 간다. 아이들한테 죄의식이 커져간다.
<PD수첩> 팀이 어느 집을 방문했는데 식구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2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더라. 너무 억울해서 투쟁했는데 주변에서 다들 쓸데없는 짓 한다고 비아냥거리고 발걸음을 끊었다고 한다. "애들 있는데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지"라고 비난하고. PTSD 환자들은 1차 외상보다 이런 2차 외상에서 결정적으로 무릎이 꺾이는 거다. 그 2차 외상을 일으키는 것은 누구인가.
프레시안 :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가족들도 고스란히 고통을 분담하고 있다. 임무창 조합원처럼 아내가 자살한 경우도 있다. 아이들이 어떨지 걱정된다.
정혜신 : 아까 말한 PD 한 명이 취재 마치고 나오면서 그 집 아이한테 용돈으로 만 원을 줬는데 아이가 너무 좋아하더란다. 그걸 보고 아이 아빠가 2년 동안 애한테 천 원 하나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어땠겠나. 그 애가 초등학교 또래집단에서 2년을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 본다는 게.
그 아이들 겉으론 참 의젓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의젓한 게 바로 증상이다. 다섯 살짜리가 세 살짜리 동생을 내내 업고 다닌다. 레몬트리 공작단이 아이들에게 12시쯤 도시락을 주는데, 아빠 것까지 챙겨놓고 어른들 상담 끝나는 1시까지 안 먹고 기다린다. 부모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린 애들도 애어른이 되는 거다.
아이들이 2년 전에 어떤 걸 봤을까? 한 여섯 살짜리 아이는 버스를 못 탄다. 걔한테 버스는 경찰 버스다. 네 살 때 경찰이 자기 아빠를 무참히 짓밟고 때리는 걸 봤고, 자기도 폭행을 당했다. 레몬트리 공작단에서 동물원에 데려간다고 버스를 대절해 왔는데 그 애는 결국 못 갔다. 상담 마지막 날에도 남산공원 간다고 버스가 왔는데, 레몬트리 공작단 누나한테 안겨서 딱 두 칸 올라갔다.
어떤 해고자는 상담 중간쯤 됐을 무렵부터 가족들과 주말농장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텃밭에 가려는데 예전에 경찰과 대치했던 곳을 지나야 했나 보다. 아이가 갑자기 아빠를 붙잡으며 "아빠, 경찰 있어. 가지 마" 하더라는 거다. 아이한테 지금은 없다고 했더니,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아이들 역시 심리적으로 2009년 그 상황에 머물러 있다. 어릴 때 아빠라는 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다. 그런 아빠가 경찰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이 어땠겠나. 아직 그 기억이 레코드판 돌 듯 생생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다. 그런 애들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공포라는 건 말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아이들을 위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도 따로 있는가.
ⓒ조재무
정혜신 : 레몬트리 공작단이 와서 놀아 준 건 치유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역시 좀 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다.
어른들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과는 별개로 아이들 치유 공부방 내지는 치유 놀이방 같은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 병원이 아니라 놀이방이나 공부방인데 부분적으로 치유 기능을 도입한 시스템으로. 활동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있어서 곧 가시화 될 것 같다. 익명으로 거액의 돈을 기부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아직 전문가들의 참여가 미미한 편이다.
프레시안 : 해고자와 가족들을 상대로 한 심리 치유가 값지고 시급한 일이지만, 한계도 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택하고, 거기서 폭력을 겪고, 후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 구조 자체가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정혜신 : 정책의 문제라든지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 노사 문제 등은 내 분야가 아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 그 문제에 집중할 뿐이다. 그런 문제들은 그 부분의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다. 다만 모든 사람한테는 마음이 있고, 우리가 하는 행위의 중심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마음을 보태서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방송인 김제동도 와서 토크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때 400~500명이 왔다. 김제동의 꿈이 대안학교를 여는 거라고 하는데, 평택 아이들 문제에 개입하고 치유 공부방 얘기 나오고 하다 보니까 자신의 꿈의 첫 출발을 이곳에서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프레시안 : 지금 겪는 과정이 나중에 '결핍 동기'로 작용할 수 있는 예는 없을까? <홀가분>에서도 "어려서부터 큰 병을 앓는 아이가 성장해서 의사나 간호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없는 건강에 대한 결핍 동기가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려움과 부족이 나중에 같은 처지의 곤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활력을 이끌어 낼 수 도 있다는 얘기다.
정혜신 : 물론 그렇다. '진실의 힘'에서 함께 한 고문 피해자 분들이 좋은 예다. 그 자체가 상담을 통해 치유된 본인들이 돈을 모아 다른 이들을 돕겠다고 만든 재단 아닌가.
그분들이 몇 주 전부터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만날 때 직접 보러 오셨다. 상담하는 거 보시면서 많이 우신다. 우리 젊었을 때랑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해고자) 부인들 보면서 30대 때 내 부인이 저런 심정이었겠구나 하면서 깊이 공감하신다. 누구보다 사람의 고통에 대해 예민하신 분들이다. 이번에도 아이들 치유하는데 1000만 원을 기금으로 내놓으셨다.
22일에는 상담 마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분들, '진실의 힘' 고문 피해자 분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젊은 시절 안전기획부 지하실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가정이 파괴되고, 그럼에도 어쨌든 생존한 고문 피해자를 보면서 해고 노동자들은 굉장한 느낌을 받는다. 평생을 사회로부터 밀려나 이웃들한테 배척당하고, 일가친척도 만나지 못하고 했던 분들…. 그런 사람들의 경험 자체가 해고 노동자들한텐 위로가 된다.
'저런 사람들도 살아남는데 내가 겪은 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준다. 물론 고통은 비교될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자살 시도가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한다' 이런 괴로움의 굴레에서 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대화가 주는 도움은 절실하다.
북한산 등반 중에 '진실의 힘' 선생님 가운데 어떤 분이 농담 삼아 "내가 고문 견디길 너무 잘했다"고 하시는 거다.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과 만나서, 이런 도움을 주고받고, 정신적으로 충만함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실 정도로 결핍 동기에 대한 보상이 된 것이다.
프레시안 : 물론 다 그런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정혜신 : 그렇다. 자기가 마음을 제대로 보살폈을 때 결핍된 것들이 긍정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 그 과정을 잘라놓고 얘기하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비수를 꽂을 수 있다. 그들을 치유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게 우리 모두의 역할이다. 경제적 보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됐을 때 결핍도 긍정적인 동기로 바뀔 수 있다.
ⓒ조재무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할지 생각하라!
프레시안 : 사람을 보고 마음을 감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에겐 부족하다. 야구선수와 스캔들에 휩싸였던 송지선 아나운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사망 전에 트위터를 통해 심정을 드러냈음에도 오히려 잔인한 악성 댓글이 그녀를 괴롭혔다.
정혜신 : 일부에서 지적하듯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가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유명인에게 과도하게 몰입했다가 조금이라도 실망스러우면 완전한 매도로 돌아서는 극단성이 심하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와 존중을 못 받고 살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유명인을 과도하게 이상화 하게 되고, 그 에너지가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유명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 대부분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정말 부족하다. 내가 하는 행위가 어떤 파장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감각이나 고려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그런 감각을 접한 적도 교육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자식, 선생님과 아이들 할 것 없이 관계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프레시안 : 다시 책 얘기로 돌아와 보자. 책 제목이자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심리 카페의 이름이기도 한 '홀가분'은, 소위 '쿨하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인가.
정혜신 : '쿨'이 어떤 태도를 말한다면, '홀가분'은 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없는 무언가를 얻거나 이뤄야 할 게 아니라 현 상태에서 불필요하고 부적절하게 갖고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한다. 어린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더 본능적인 공감 능력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는데, 이처럼 인간은 본래 완전하고 행복하게 태어난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 가지 욕망과 상처, 콤플렉스가 덧대어지면서 뭔가가 뒤틀리는 거다.
부적절한 욕망 때문에 덧대어진 것들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보면,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 정말로 황홀하다.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무한하고 충만한 에너지가 나온다. '홀가분'은 그렇게 다 덜어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이명현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재무
프레시안 : 이 책은 읽기 쉽다. 그러나 여기 나온 조언들은 따르기 가장 어려운 얘기들이다. '홀가분'한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생활 속에서 실천할 만한 작은 방법이 있다면?
정혜신 : 무엇을 더 하면 좋아질까를 생각하지 말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무엇이 나올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건강하게 '웰빙'을 하고 싶다. 그럼 대부분 건강 보조 식품을 먹을까, 유기농 야채를 먹을까를 고민하면서 현상적인 것에 매몰된다. 거기서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까'를 물으면, 먹을거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발암물질이나 중금속 따위일 텐데, 그럼 땅, 물질, 삶, 일상 사이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시안 : 책 마지막 장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얼굴로 '나 자신(眞我)'을 말했다. 그 얼굴에 얼마나 접근했나.
정혜신 : 하하하. 내 입으로 말하면 남우세스러운 거다. 사실 정신 분석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치료를 잘 받아야 한다.
성악가가 제 목을 관리해야 하듯 내겐 내 인성이 치료 도구다. 내게 치우침이나 콤플렉스가 있다면 왜곡의 연쇄 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잘못된 치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담이라는 건 끊임없는 반응의 주고받음이라 내 문제가 상대방에게 그대로 가게 되어 있다. 참고로 내 레지던트 시절 월급의 3분의 1은 내 치료비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보는 과정 덕분에 보다 홀가분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안 할지 생각하며, 나 자신에게 더 파고들어갈 맥을 알아냈기 때문에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