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다라의 천황 폐하, 근초고 천황 때의 일이다. 근초고라는 시호는, 가까이로 먼 곳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뜻이다.
주로 북방 부여 조상의 백성들을 고구려의 위협에서 모으고 동방 왜 백제 인들을 수호하여 야마타이 가라 국(일본 가야)으로 부터 지켜낸 조선 부여의 천황 근초고.
백제는 홍익인간의 미륵 곰의 뜻을 받아 소서노 여신(스사노오노 오미카미. 혹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천조 대명 여신)을 국조로 섬기며 반도에 웅진(구마노 쯔)을 비롯한 7담로가 있고 열도에 웅본(구마노 모토)을 위시한 15 담로가 있는 도시 연합 국가이다.
원래 반도의 중앙성인 웅례(위례. 熊禮)성에 태조 천황 온조 천황과 비류 공 전하가 함께 도읍 하였을 때, 비류 공 께서는 서쪽 해안의 미추홀에서 터전을 잡아 온조 천황과 서로를 함께 지키는 형세를 이루고자 하셨다.
비류 공 전하는 머지 않아 주변에 큰 위협이 없음을 보시고 충청 전라 마한 70개국을 회유하사 목지국을 다독이시고 웅진에 웅례에 이은 최초의 담로. 다시말해 다무로( 다물. 성.)를 건설하시었고 홍익인간 이화 창세를 명하신 천부경의 부여 대명신의 뜻을 물으사 보다 더 동쪽으로 나아가시어
아홉개의 주로 구성된 구주(규슈)에 터를 잡으시고 백제국 제 3 담로인 구마노 모토. 웅본(熊本)을 건설하셨다.
한편, 고려인이라 고도 불리우고 카라 인이라 불리우기도 하며 가야인 혹은 가라인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공격적인 족속이 야마타이. 邪馬台. 사마태. 다시말해 삿된 자들이 기마 병을 위주로 태풍을 몰고 다닌다는 뜻의 가야 민족의 왕조가 무고한 열도 백성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열도를 통일한 후 다시 반도로 치고 올라가 북방까지도 차지하겠다고 하는 거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라인, 혹은 가야 혹은 고려인이라 불리우는 족속의 군병들은 다른 부족을 겁주기 위해 몸에 호랑이 카라(무늬 깃)을 칠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는 근경(近京. 긴키. 수도 위례와 경기 일대)이 평정되고 부여계가 구다라 본가 백제에 귀부하여 고구려와 일전을 벌인 직후의 일이다. 고구려 태황 사유가 황해도를 잃고 패주한 후, 위례 웅례성에 도달한 전언은 이러했다.
"고구리 고려 인들을 꺾으신 일 참으로 경하드리나이다. 하오나 우리 나라'奈良=奈羅' 측은 구다라 '大熊奈羅=쿠마노 나라=큰나라'에 원군을 급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는 가라 고려인들의 침입 때문에 한시라도 버틸 수 있을 지 형세가 촉급한 상황이나이다. 구해 주소서."
반도의 기마 부족 계열을 고려인이라 이미 부르고 있었고, 그것은 부여계가 고구려 가야 민족을 동일 선상에 놓고 둘을 뿌리가 같은 분파 국가라 보고 있음을 반증하는 이름이었다. 야마타이도 물론 고려인의 범주에 속했다. 가야 본가의 천황이 직접 가라인들을 이끌고 열도 정복에 나서고 있는 상태였다.
구다라의 천황 폐하, 근초고 천황은, 목지국에 길을 열고 수군을 보조할 것을 명했으나, 목지국은 이 때가 기회라 여겨 일제히 마한 70국과 반기를 들었다. 구다라의 천황 근초고는 사로국. 신라에 동맹을 요청하고 길을 빌었다. 긴 설득 끝에 가야 본진을 신라가 차지하고 열도의 집안은 근초고 천황이 구해내는 것으로 결론을 낸 후, 수군이 없다시피 한 신라의 어선들을 빌어 대마에 상륙하여 열도의 웅본 구마모토를 구원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때는 태풍이 부는 8월.
삼종의 신기를 꺼내어 하늘 제사를 드린다.
방울로 천신과 지신과 사람 신 모두를 부르오니, 형수의 나라를 구해내질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나의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질 지어다.
거울로 나 제사장 천황의 모습을 비추어 보노니, 하늘과 땅과 조상과 사람들에 이르러 한 점의 부끄럼이 있다면 이 구리 거울앞에 욕된 망념의 한 자욱 까지 모조리 갈라져 쏟아져 나올 지어다.
검으로 하늘과 땅과 조상 신령과 사람들의 신께 비오니, 기필코 승리하여 형수님의 나라를 구원케 도와 주소서.
비류 백제의 수장은 히미코. 다른 말로 소서노 가문의 여왕인 비미자 였다. 남편을 병으로 잃고 군왕으로 있었으며 덕으로서 사방의 부족을 이끌어 무력 토벌을 일삼는 사마태와는 정반대의 정치를 하고 있었다. 사마태의 천황 시마(서마. 일본서기의 환무 천황)는 강제로 끌어 모은 열도 선주민을 화살받이로 앞세워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였다.
구다라군의 하늘 제사가 끝나고 태풍이 멎었다. 어선을 이끌고 대마로 상륙하려 하는데, 북대마를 향하려던 계획을 남대마로 바꾼다. 바람이 다시 격하게 불어 그리 된 것이다. 남대마의 영주는 북대마의 영주와 라이벌 관계였는데, 어차피 가야 제국에 충성하여 죽어 봤자 실익이 없겠다 싶어서 북 대마를 기습하여 성을 빼앗고 대마 전체가 넘어가게 된다.
한편 가야 야마타이의 서마 천황은 사로국의 해변가에 근초고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급해져, 구마모토 성에 포위전 대신 직접 공성을 명하게 된다. 열도 백성들은 구마모토 편을 들어 그곳의 싸울아비가 되거나, 아니면 가야 야마타이 제국의 싸울아비가 되어 서로를 막 죽여 넘기는 상황에 처했다.
이치노 마루. 니노 마루까지 함락되고, 산노 마루 만이 남은 상태.
히미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결연하게 말한다.
"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없는 듯 하니, 아아, 아마도 운명은 여기 까지인 듯 싶네.
그대들은 새로이 만들어진 야마타이 통일 국가에 반기를 들어 죽음을 자초하지 말게. 나로인한 추억으로 그대들까지 죽어서는 아니 되리."
스사노오 히미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골방에 들어가 스스로 칼로 배를 찌르나
곧 발견 되어 나라 무장들이 칭칭 동여 매어 치료를 감행한다.
소서노 가문의 싸울아비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백성과 병사들의 분기를 일으킨다.
"너희가 항복하여도 살아 남게 하려는 히미코 전하의 뜻을 보아라. 서마 따위 인간은 비교할 수 도 없다. 그 자는 항복한 자도 죽이고 태도가 당당한 자도 꺾어서 죽인다. 이와 같은 폭군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으랴? 나라의 싸울아비들아, 이래도 죽음이요 저래도 죽음이라면 최후까지 항전하자."
가야 제국의 서마 천황은 근초고가 대마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근초고 천황이 가야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은 데 놀랐고, 약골이라 우습게 본 신라 따위가 가야를 공격한다는 데 놀랐고, 또 한가지 구마모토의 단결력에 놀랐다.
저마다 제 살기 바쁘고 승세를 탈 때에야 군대는 힘을 발휘한다는 게 그간의 경험인데, 3면만 포위하고 도망갈 길을 열어 줘도 저들은 결사 항전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산발 기습을 통한 군량등에 대한 지속적 공격이 후방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도 놀라운 점이었다.
"나루호도. 과연 국가라는 것을 세워 놓으니 저렇게나 민관군이 합동이 되어 잘 버티는 구나. 하지만 그 버팀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산노 마루는 함락되지 않았다.
최후의 일전을 다시 각오하는 찰나, 서마에게 급보가 날아 들었다.
구다라의 천황 근초고. 대군을 이끌고 후방에 기습!
그리하여 역으로 토벌당하여 열도 동쪽의 대화군 산성에 이르기 까지 패퇴하였고 그곳에서 서마는 공식적으로 근초고에게 항복하였다.
이제 전후 처리가 문제인데,
근초고와 서마의 세력을 합쳐 아우른다는 명목하에
구다라와 나라의 문관 귀족(공가라 한다.)들과 무관들을 윗줄로 세우고 서마의 가야 무신들을 결속력을 잃게 하도록 하면서 일일이 등용하여 회유하였고 손 발이 다 잘린 것이나 다름없는 서마를 扶桑 侯王(일본왕. 왜왕)으로 세워 히미코와 혼인을 시켜 버린 것이다.
히미코 입장에선 참으로 비참한 정략 결혼이었다.
가문은 물론 미추홀의 비류 가문이 이어진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분명히 했다. 서마는 패배후 백제국의 데릴 사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라 국의 판도가 넓어져 열도를 모두 통일한 지금, 열도 곳곳에 백제 천황과 구다라 무관과 문신의 영토와 장원을 두고 사마태 가야 제국의 신하들을 회유하게 되었다.
가야 본토에 대한 처리도 신라 입장에선 매우 화 딱지 나는 처결이었다. 항복한 가야인들이 보기에 본토 가야 만큼은 어디까지나 지켜 내야 할 땅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아무 실익도 없이 물러 났고 주력 무장이 가야계이고 몸통은 백제인 왜 라는 거대 세력과 마주 해야 하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열도내의 신라 호족들은 차츰 관서나 규슈에서 관동으로 이관 처리 되고 무비를 과하게 갖추지 못하게 중앙의 심한 간섭을 받아 신라 본국과의 연계성도 사라져 갔다.
이리하여, 지금의 나라 지역에 도읍을 두고 나라라 하였으며
구다라와 나라를 합쳐, 혹은 근초고 천황 때부터 사실상 종속 국가가 된 가야까지 합쳐 구다라 나라 가라를 다 합쳐 백제라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