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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김천, 영동
* 산행일시 : 2023년 03월 19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산행코스 : 우두령-삼성산-여정봉-바람재(인증)-형제봉-황악산(인증)- 백운봉-문수봉-천덕산-여시골산-괘방령-가성산(인증)-눌의산(인증)-장군봉-추풍령(23.8km/11시간)
- 출발지점 :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산9-27 우두령
- 도착지점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203-5 도계공원 주변
* 산행시간 : 02:53~10:55 (산행 8:02분/휴식시간:0시간 45분)
* 산행속도 : 3.31 km/h
* 산행거리 : 24.12km
* 날씨 : 미세먼지 맑음
* 기온 : -4~15
* 약수터 정보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100대 산 정보 : 산림,블약,한산)
* 산행난이도 : 고도차:상 , 거리:상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우두령에서부터 시작하여 괘방령을 거쳐 다시 추풍령까지 가는 코스이다.
전체 35구간에서 오늘이 27구간이다.
앞으로 약 8구간 정도 남았고 87% 정도 완료된 듯하다.
7월 말쯤 끝나는 것으로 하면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다.
우두령에서 괘방령은 일전에 황악산 왔을 때 걸어봤지만.
대간길은 괘방령에서 추풍령은 가보지를 못했다.
일행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벌써 끝나신 분들도 있고.
우리 63기에서 한꺼번에 끝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7명에서 9명 정도 되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주간만 하는 백두대간 기수들은 그 기수가 끝나는 시점에서 한꺼번에 회원도 같이 끝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간은 2주에 한 번씩 가기 때문에 주간만 하면 약 55구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2년이 다 된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하는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다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그 기수 사람들이 끝나기 전에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63기는 무박으로 산행을 36구간으로 나눠서 하기 때문에 1년 반 정도면 끝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기수가 끝나는 시점에 함께 끝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나는 지금껏 백두대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수가 끝나는 시점에 함께 끝나는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니 끝나는 시점이 나도 끝나는 것이다.
우두령이다.
이곳에서 황악산을 가는 경우도 많다.
이곳 우두령에서 올라서 황악산을 거쳐서 직지사로 가는 코스가 대표적인 100대 명산 산행을 하는 코스이다.
나는 황악산을 3번인가 와본 것 같다
이번에 4번째인가..!
[우두령(질매재)] 73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날씨가 따뜻했었는데 주말에 갑자기 추워졌다.
추워진 기온은 영하 4도까지 떨어지고 바람도 거세서 더 추운 것 같다.
다 준비했는데 두꺼운 장갑을 준비하지 않아서
결국 발핫팩을 장갑 안쪽에 넣어서 사용하면서 보온을 하면서 산행을 했다.
이곳 삼성산까지는 완만하게 오르막이 시작된다.
밤이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일행들과 속도롤 맞춰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삼성산] 985m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삼성산까지 완만한 오르막을 올랐다가 잠시 내려가서 다시 오르면 여정봉이다.
[여정봉] 1030m
숲으로 인하여 조망이 없다.
[바람재] 810m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 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유고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궤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평의 목장은 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겉으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목장에서 한국 축산업의 현주소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장에는 한 마리의 소도 없다. 마지막 14마리의 소까지 팔아치우면서, 이제 목장 주인은 흑염소다.
여정봉을 지나서 내려갔다가 다시 형제봉까지는 조금 더 경사를 올라야만 한다.
형제봉이다.
조금 가파르게 올라야 하는 거리로 약 6.4km 지점정도 된다.
이곳에서 황악산은 약 800m 정도 되는데 완만한 오르막이 또 시작된다.
[형제봉] 1020m
정상에 표지석도 없고 쉴만한 공간도 없는 능선길에 불과하다. 조망도 트이지 않고 다만 황악산 비로봉만 올려다 보인다. 잠시 내려섰다 올라서면 바로 황악산 정상이다. 두 개의 봉우리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어 형제봉이라 불리는 듯하다.
황악산이다.
이곳에서 일출을 봤으면 좋으련만 이곳까지 7km 정도 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출은 보기 어렵다.
오늘의 일출은 6시 30분경으로 2시 50분경 출발을 했으니 결국 3시간 40분이 지나야 만 일출이 가능할 것 같다.
이곳이 아니면 조망이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여시골산으로 향한다.
우두령에서 황악산까지는 약 2시간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황악산] 1111m
형제봉에서부터 황악산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부드럽다. 비록 '악(岳)' 자가 붙었긴 했지만 산세는 지극히 순한 육산이다.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다고 하며 지도상에도 흔히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 및 직지사의 현판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 황학산은 분명 오기인 듯하다.
굳이 '岳'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북에서부터 내려오는 대간의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이렇다 할 산을 솟구치지 못하던 차에(속리산에서 황악산 사이에 1,000m가 넘는 산은 하나도 없다.) 1,111m나 되는 산을 만나고 보니 당연히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또한 이 산이름의 첫 글자인 황(黃)은 오방색(五方色) 중 가운데를 나타내는 색인데, 옛 사람들도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명명했을 것 같다. 실제로 황악산은 삼면 바다를 기준으로 봤을 때 한가운데에 있다.
황악산에서 백운봉으로 향하는 기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쁘게 떠 있는 그믐달이다.
이쁘게 깜깜한 하늘에 혼자 빛나고 있다.
아니 별들도 참 많은데 가늘고 길게 아담하게 떠 있는 달이다.
그믐달을 뒤로하고서 다시 백운봉으로 향했다.
하산길이 참 온화한 것 같은 기억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틀린 느낌이다.
돌길을 내려가야 했고 길도 가파르고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왜 이 길이 편하고 좋았던 길인 것 같이 느꼈을까..!
[백운봉]
황악산의 동봉(東峰)이자 직지사 백련암의 배후에 자리한다. 황악산의 일봉이지 독립 봉우리는 아니다.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위치에 있다. 이곳에서의 '백운'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운수봉이라 되어 있다.
찾아보니 천덕산 운수봉이라고 한다.
이곳 운수봉은 하사길에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되는 곳에 볼록 잠깐 솟아오른 봉우리이다.
[운수봉] 680m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이다. 정상은 암장이다.
雲水峰.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제 서서히 저 먼 곳에서 여명이 시작된다.
네이버 지도상 여시골산이라 되어 있는 곳에서의 조망 여시골 바로 위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여시골산은 약 1km 정도 가야만 한다.
아직 6시 정도 되었고 조망이 되지 않아서 여시골산 쪽으로 조망되는 곳에서 보기로 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보통은 일출이 시작되려면 그곳에 정말 빨갛게 달아오르는데 그런 것이 없는 것 보니 일출은 없을 것 같다.
일출이 시작되지 않아서 이곳 여시골산까지 올라왔다.
인증을 하고 있는데 먼 곳에서 빼꼼하게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여시골산] 620m
현재 대간꾼들 사이에 여시골산(620m)이라 불리는 산은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상에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시골산이라는 이름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듯한데, 과거 이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간 등마루 위 오름길의 시작 부분에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다.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오늘도 이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탁 트인 조망에 일출을 봤으면 더 멋졌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일출을 봐서 참 좋다.
일출이 있고서 조금은 따뜻해졌다.
반장갑으로 갈아 끼고서 다음 괘방령으로 향했다.
가는 곳곳에 진달래가 있는데 고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진달래가 없고.
이렇게 하산길 고도가 500m 이하에서만 진달래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올괴불나무 꽃들이 제법 많았다.
꽃이라는 것도 그 시가를 조금만 늦추거나 빨라도 볼 수 없다.
그래도 제법 귀한 올괴불나무 꽃들이 제법 눈에 보였다.
괘방령에 도착을 하여 쉼터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가성산으로 향했다.
가성산에 오르는 길도 이렇게 진달래가 제법 많이 있었다.
저기 저 위가 가성산인데.
조망이 되지 않는다.
가성산은 그래도 제법 올라야만 한다.
아무래도 아침을 먹고서 오르는 산이라서 더 힘든 것 같다.
바로 저기 위가 정상인데 보이지도 않는다.
올랐더니 그곳이 봉우리가 아니고 몇백 미터는 더 가야만 하는 것 같다.
가성산 정상이다.
이곳은 사방으로 조망이 참 좋다.
조망이 없는 곳을 계속 걸었는데.
이곳저곳 탁 트인 조망이 변겨준다.
[가성산] 720m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독립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쪽 경사면에 김천시립 공원묘원이 있는데 규모가 꽤 크다. 동쪽 발아래로 고속도로와 철도가 경쾌하게 뻗어 있다. 동쪽의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에서 유래하는 봉우리로서 '가성(枷城)'은 화령권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다음 가야 할 눌의산이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눌의산이다.
좌측으로 장군봉이 있다.
눌의산도 계속 오르막인데.
그래도 가성산보다는 조금 수월하기도 하다.
가성산에서 눌의산을 보면 제법 가파르게 보이지만
정작 눌의산은 뒤쪽으로 있고 앞쪽으로 장군봉과 작은 보우리를 오르고 넘어야만 눌의산에 도착을 할 수 있다.
가성산에서 내리막을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면 장군봉이다.
오르막길은 능선길이었지만 내리막길은 계곡길과 같아서 돌길과 조금은 험한 길이다.
[장군봉] 625m
가성산 바로 건너 산이지만 깊게 내려갔다 올라가야 한다. 가성산 정상을 넘으면 오른쪽으로 김천공원묘지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몇 십미터 나가서 큰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밑으로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면 장군봉이고, 장군봉을 넘어서 계속 오르면 눌의산 직전 663m 봉우리다.
장군봉은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長君이라고 함.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신갈나무 무성한 부드러운 육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이렇게 눌의산을 저 앞에 두고서 능선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아마도 마지막 봉우리다 보니 더 멀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바위를 넘어가면 드디어 눌의산에 도착을 한다.
눌의산이다.
이곳도 가성산과 같이 조망이 참 좋은 곳이다.
[눌의산] 743m
추풍령 남서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직선거리로 2Km밖에 안 된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낮은 구릉지에는 포도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서쪽에서 접근하여 북쪽과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향한다. 추풍령에서 벌판이나 다름없는 화령지역은 그 성질을 다하고 눌의산 이후로는 덕유산권이 시작된다.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결코 어눌한 모습이 아니다. '訥?山'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추풍령 뒤쪽에 자리잡은 산으로 등산인 들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이 산의 이름인 `눌의'는 한자어로 정의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뜻이니 추풍령 영마루를 사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 긴급을 다투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활활 타는 봉화를 피워 올려 제몫의 역할을 다했을 눌의산의 늠름함이 살아 있다.
봉대산 지장산 쪽의 조망이다.
남쪽으로 무좌골산 돌기산 방향이다.
올라왔던 가성산 쪽 방향이다.
이제 눌의산을 뒤로하고 추풍령으로 하산길이다.
하산길은 제법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가파른 길을 내려와야 하고 또 돌길이다.
조금 고도가 내려오다 보니 이렇게 이곳저곳에 진달래가 우리를 반겨준다.
이쁜 올괴불나무 꽃도 반겨준다.
이곳저곳에 많이 피어 있는 생강나무 꽃이다.
이렇게 산행을 다 마치고 내려오니 밭에 매실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곁에 가니까 그윽한 매화향기가 참 좋다.
하산길에 철길이 있기 때문에 굴다리를 지나서 와야만 이곳 추풍령 공원에 도착을 한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氏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 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이렇게 이곳 추풍령에서 오늘 산행을 마친다.
다행하게 몇 개의 식당들이 문을 열어서 같이서 해장국을 먹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로는 올갱이국이 더 맛나다고 한다.
GPS 트랙
본산행의 트랙
설명이 포함 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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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제가 갔을때도 11월이라 제법 추웠었습니다.
괘방령에서 오르는데 어찌나 춥던지, 애먹었었습니다.
봄인데 춥던데요..!
아직은 겨울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일출도 좋았는데 정작 탁트인 공간이 없어서
나뭇가지 사이로 봤습니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전혀 하지 않아서 괘방령부터는 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도가도 그길이 그 길 같기도 하고..!
다음에 몇번씩 더 가야만 조금 알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이 할 계획은 없고 풍경 좋은데 다시 한번씩 가보고는 싶더라구요..
산행 잘 하고 계신지요.
정맥이다. 백두대간이다. 하다보니 탁히 산행기를 올릴 것이 없어서 못 올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진 조금과 함께 트랙만 올려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