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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카노사의 굴욕 사건
교회사는 크리스찬들이 외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성경의 예언서 내용들이 역사이고 교회사이기 때문이지요.
십자군 원정의 추악하고 무지한 사건의 원인과 발단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서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개혁가 레오 9세 교황(1049-1054)은 성직자의 독신과 성직매매 근절을 회의에서 주창하고 쇄신에 주력하여 교황의 권위를 높이려고 애쓰면서도 미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교회와 분쟁 하였지요. 당시로는 성경 말씀 책의 소유나 읽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니 인본주의적 사고로 이권에 눈멀게 되고 성품에 따라 희비가 좌우되는 시기에 1053년 이탈리아 남부로 침공한 노르만족을 대항한 전투에서 훈련과 준비 부족으로 패해 교황이 포로가 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교회의 내분도 문제지만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쟁 중에 11세기 후반에는 황제와 교황권 사이에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있었지요.
1075년 초까지 국왕과 제후들이 임명해 오던 성직자들에 대해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를 부인하더니 성직자들에 대한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다고 발표하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왕권도 신께서 부여하신 고유권한이라고 하면서 교황만이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없다고 반박하였는데 그해 12월 교황은 편지로 황제는 교황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하였지요.
그러자 황제는 다음 해 1076년 보름스 제국 국회를 소집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폐위를 가결 시켰다지요.
이에 대한 교황의 대응은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선고하였고 따라서 황제의 신하들에게 황제와 접촉하지 말 것과 충성하지도 말라고 지시까지 하였다는 것이지요.
종이와 인쇄기술의 발명 이전 유럽의 종교적 세계관은 다분히 원시적이지요. 예수님께서 앉으셔야 할 교황 자리가 인디언 추장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추락되어 피조물 인간이 앉아서 세속 황제와 권위 다툼이라니 한심하지요.
파문당하면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 되던 시기에 황제를 지지하고 따르던 제후들과 성직자들마저 돌아서게 되고 1077년 2월 교황 주최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황제 추방까지 결의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4세는 당황하게 되고 성직자들과 제후들까지 배신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하였지요.
사태의 심각성과 불리해진 여러 요건을 돌파하려고 빠르게 처신하였지만 그래도 불안하였는지 직접 알현하고 용서를 빌기로 하고 왕비와 왕자 신하들까지 대동하고 출발하자, 자신을 보호해 줄 군대가 없는 교황은 황제가 자신을 만나러 출발했다는 소식에 두려워서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견고한 카노사성에 피신하게 되었지요.
황제는 자신을 만나기 싫어서 카노사로 간 것으로 오해하여 그곳까지 찾아가 알현을 요청하였으나 여러 번 거절되었다지요.
하는 수 없이 진정한 참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맨발에 눈 속에서 여름옷으로 3일간이나 반성하는 태도로 일관하자 성루에서 몰래 내려다본 교황은 그 모습에 안심하고 알현을 허락하고 제후들과의 분쟁도 교황이 중재하겠다고 하면서 서약과 함께 파문 취소가 이루어졌고 성직자 서임권은 교황의 권한으로 되었다지요.
치욕스러운 패배를 경험한 황제는 제후들을 제압하여 자기 세력으로 막강하게 다지는 과정에서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를 교황이 재차 파문하면서 후임 루돌프 황제까지 임명하였다지요.
이미 막강한 세력을 확보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무시하고 독일과 이탈리아 세력까지 포섭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였다지요.
신의 대리인이라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교황 좌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돌게 되고 권위마저 추락하게 되었지요.
한 시대에 2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지요.
오랜 후에 재차 보름스 회의에서 성직자 서임권은 교황에게, 서임 된 성직자의 봉토는 왕에게로 마무리되었다지요.
십자군 전쟁
하인리히 4세 세속의 황제와 카톨릭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알력다툼에 밀려 교황의 보금자리 로마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로 후임 빅토리오 3세를 거쳐 우르바노 2세 교황까지 대략 15년이 넘게 떠돌아다니게 되지요.
자기와 같은 상파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고 영특한 젊은 수도사라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칭찬하던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지금까지의 위기를 만회하려는 노력으로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 때 대성당 앞 야외 연설에서 신도와 일반인들을 향하여 내전 상황(하인리히 4세와)을 종료하고 카톨릭 형제를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 노예로 팔고 있는 이슬람 이교도들에게서 구출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자는 연설을 하였다지요.
연설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성전에 나서라.
싸우다 죽는다면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서 원하시는 성스러운 과제를 위해 나서라.
동방으로 가라.
교회를 파괴하는 이슬람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지요.
군중들이 감동했는지 ‘Deus lo vult’ ‘신께서 원하신다.’는 함성 속에서 교황에게 서약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⓵동방원정과 ⓶내분은 신의 휴전으로 중단할 것과 ⓷성전에 참여하는 자들은 가슴과 등에 붉은 십자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결의가 되었다지요.
10일간의 추가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은
1. 십자군에 참가한 자에게는 완전한 면벌부를 준다.
2. 질병 등 불가피한 불참자는 타인의 참가비용을 (의류, 무기구입비 헌금) 부담한다.
3. 참전자의 동산 부동산 모든 재산은 로마교황이 보증하고 소속교구의 사제가 책임지고 귀환시까지 보전한다.
4. 십자군 참가비용을 마련하려고 자산을 처분할 경우 혹은 담보할 경우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감시해 준다.
5. 십자군 참가 신청자는 소속교구 사제에게 허가를 받은 후 서약하고 출전한다.
6. 십자가에 서약 후 출발하지 않거나 되돌아오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
조직력과 선동에 능하다는 우르바노 2세 교황은 6가지 조항의 후속 조치까지 치밀하였다지요.
교황과 세속의 황제가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다투더니 불리해진 교황에게 이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것이지요.
따라서 전 유럽이 십자군 성전의 참가를 호소하는 교황의 연설내용으로 점점 더 휴매니즘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고 성경의 진리 말씀과는 멀어지게 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유럽의 제후들이 앞장서고 나중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왕들까지 참전하고 튜턴, 템플, 요한기사단들까지 등장하는 것이지요.
성전의 출발은 1096년 여름 마리아 승천일이라는 8월 15일로 결정되었지요.
이러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의 와중에 프랑스인 수도사로 나귀를 타고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설교를 하던 은자 피에르마저 교황의 연설에 선동되었는지 성지탈환을 외치고 다니다가 중세 하층민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대략 5만이 넘는 무리가 모여지자 준비도 없이 자진하여 출발하였다지요. 자국 내에서는 이 하층민들의 뜻이 가상하여 동정하였지만 타 지역에 도달해서부터는 동냥이 아니라 약탈과 도둑질은 물론 강도짓까지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규율도 없는 이 무리들이 가는 곳에 유대인들을 발견하고는 이교도라고 더 잔인하게 강탈하였다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도둑질과 강도짓을 하며 봄에 출발하여 8월 초에는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달하였다네요.
그리스 정교회 비잔틴 제국 알렉시우스 황제는 쓸모없는 거지 떼가 갑자기 나타나 제국 백성들의 원성이 들리게 되자 콘스탄노플 입성을 금지하고 은자 피에르만 불러들여 요구사항인 배와 식량과 의복을 제공할 테니 신속히 소아시아로 건너가라고 명령했다지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간 이들 앞에 무장한 이교도 이슬람 셀주크 튀르크 군대와 맞닥트리게 되어 5만이 넘는 무리가 교전이랄 것도 없이 어이없게도 이슬같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교황의 허가도 받지 않고 임의로 출발한 이들에게는 죄용서의 면벌부도 받지 못하였고 천국에 대한 보장도 없이 성도 예루살렘은커녕 소아시아의 산야에서 소멸해 버리고 은자 피에르와 살아남은 몇 명은 후에 도달한 1차 십자군에 합류했다지요.
1차십자군
유럽의 제후들 중에 조직력과 용병술에 능한 지휘관들이 있었지요.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동생 보두앵 등 1096년 8월 15일에 출발하여 세속 정치에 민감한 교황이 전쟁에는 무지하신지 임명한 툴루즈 백작 레몽이 총대장으로 초겨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달하였다지요.
남으로 전진하여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오른테스강을 끼고 행군할 때에는 십자군의 실질적 사령관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공과 로렌공작 고드프루아, 툴루즈 백작 레몽 등이 이끄는 십자군은 대략 5만 정도였다지요.
그중에서도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부대가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여 승전하였다지요.
소아시아에서 7개월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98년 6월 3일 안티오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성안 사람들을 이교도라고 닥치는 대로 무차별 살육을 하였다지요. 식량부족으로 주변 도시들과 다마스커스까지 달려가 약탈도 서슴치 않았다지요.
로마시대부터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 공방전이 승리로 마무리될 즈음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 롱기누스의 창이 발견되었다고 법석였다지요. 사실관계나 진위여부를 가리지 않고 성물을 중요시하는 카톨릭답게 발견한 창끝을 잘 포장하여 귀중히 다루게 하고 계속 남하하여 마라트 알 누만에서는 레몽의 부대 군인들이 지휘관의 무능으로 군량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자 이슬람의 시체를 불에 구워 먹는 놀라운 사건으로 그리스도교 십자군들이 식인종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네요.
십자군들이 정말로 제대로 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면 그럴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지요. 이슬람은 이교도라고 하면서 배고프다고 그들의 시체를 불에 구워 먹을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런 수준의 군상들이 크리스쳔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도 없었겠지요.
더구나 예수님을 찌른 창 끝인지의 그 진위 여부는 그렇더라도 그런 것까지 성물취급을 할 수 있을까 안타갑지요.
위조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도 형상으로 만들지 말고 신처럼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내용이 없나보지요.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로 피흘리시는 모습의 형상을 지금도 걸어두고 보면서 템플들마다 현관 앞에 여자의 형상을 세워 두고 경배한다고 하니 참으로 가증하고 협오스럽지요. 그러니 지옥의 자녀들이 확실한가 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명백하게 부활하셔서 40일간이나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 같이 생활까지 하시다가 올리브(감람)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증언하는데도 명백하고 중요한 사실들에 대하여 외면한 채로 잔인하게 아직도 가시관 쓰시고 피 흘리시는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내려드리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Anti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당시 이집트 칼리프 관할인 팔레스티나 도시들에 십자군들이 진군하여 들어가자 이집트 관리나 총독 외에 일반인들에게는 해방자로 보였겠지요. 허지만 방목하는 양이나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자 우호적인 태도가 돌변할 수 밖에 없었지요.
주로 해안가 도시들을 공략하여 악고, 하이파, 가이사랴, 욥바까지 빠르게 진군하였다지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빛나는 철 갑옷으로 중무장한 유럽의 전사들의 손에는 방패와 장창을 들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얼굴도 철통으로 가리고 나타나자 섬뜩한 모습에 기겁을 하게 되었다 지요. 가슴과 등에는 붉은 십자가 부적을 새겨 더욱 부정적이었겠지요. 여기서 다시 내륙 쪽으로 진격하여 베들레헴을 점령하게 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여 군량 확보에 주력하면서도 점령한 도시의 영유권을 놓고 언제나처럼 서로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했다지요.
1099년 6월 초에 드디어 성도 예루살렘 교외에 도달 야영을 하게 되고 4km 정도의 둘레에 불과한 작은 성을 공략할 대비를 하며 공성용 탑을 제작하고 이집트의 원군에게 배후를 공격 당하게 될 것을 대비까지 하였다지요.
이집트 칼리프의 신하 장수 이브티하르 아다울라는 본국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대책을 세워 식량과 물을 비축하고 부족한 병사를 걱정하며 비둘기 다리에 원군 요청서를 묶어 이집트로 날려 보내고 병사까지 보내었다네요.
외부인들에게 양이나 가축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반면에 그리스 정교도들은 성밖으로 추방하고 유대교 도들에게는 잔류를 허락하였다지요. 성 밖 우물들에는 독약을 풀어 십자군들이 사용할 수 없게 조치하였다네요.
십자군들이 1099년 7월 13일에 예루살렘 성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공격하며 두 곳에 집중하도록 유도한 후 공성용 탑을 이용 성벽을 넘어가려고 하자 이슬람 쪽에서 그리스의 화염기(항아리에 원유와 유황가루 혼합)를 던지고 불화살을 쏘아 순식간에 공성 탑에 불이 붙어 고전했다지요.
15일 아침에 헤롯 문 근처 성벽에 공성 탑을 밀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성벽을 넘어가 안에서 성문을 모두 열고 예루살렘 성 탈환에 성공하여 우르바노 교황이 열변으로 호소한 성도 예루살렘의 해방과 교황의 권위가 회복은 물론 절정을 치닫게 되었고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위상이 재차 파문된 채로 추락하게 되었는데 온 유럽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지 예루살렘이 회복되었다고 들끓게 되었다네요.
15년 넘게 로마 근처도 못가던 교황의 권위가 단번에 회복 라테란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유다 인들도 이교도였다는 것이지요.
이슬람인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오던 유단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지요.
성묘사원에서 무릎 꿇고 기도드리는 그리스도교 중세 십자군 기사이며 장교들인 이들에게는 이교도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안 되는지 무차별 살육행위를 방치했다는 것이지요.
십자군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가 1099년에 실질적 지배자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었지요.
십자군 왕국으로 재정비하여 예루살렘을 십자군들이 수성에 전념하지만 이집트 파티마 왕국을 점령하고 새로 아이유브 왕국을세우고난후에 시아파와 순니파 둘로 갈라져 내분하던 모슬렘 세력을 통합한 살라딘의 지휘하에 메뚜기떼같이 공격해오는 1192년 치열한 투쟁의 보람도 없이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고 기독교도들의 안전한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십자군들이 항구도시들로 물러나게 되었지요.
2차 십자군부터 8차까지는
2차 십자군원정은 1차 때 정복한 에데사(우르파)가 이슬람의 이마드 앗딘 장기(zangi)의 공격으로 빼앗기자 유럽사회가 소란해졌고 교황의 독촉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 왕의 군대가 출동하게되고 카톨릭의 신학자 출신까지 선동되었다지요.
3차 십자군 1191년에는 영국 왕 리차드가 이슬람 살라딘 군과의 전투에서 티루스와 아코를 탈환하자 이슬람 이교도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살라딘으로부터 2만 달란트를 받기로 협상이 되었다지요.
약속한 8월 12일이 지나고 일주일을 기다린후 지연전술임을 깨닫자 20일에 2천5백명의 이슬람인들을 아코의 언덕으로 인솔하게 한 다음 멀리서도 살라딘 군대가 볼 수 있도록 배치한 다음 전원 살해하였다지요.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황제에게 십자군들이 탈환한 점령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서약하게 하고 식량과 해협을 건너갈 선박과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 안내자의 제공을 약속받은 제후들에 이어 유럽의 왕들이 참전하게 되지만 그 약속은 1차 때인 처음부터 무시되고 기사도 정신이나 기독교적 본래의 취지에서조차 벗어나 약탈과 온갖 만행으로 얼룩진 중세 카톨릭 역사에서 참담하게도 베네치아 상인들의 사주로 아드리아해의 중간 카톨릭 영내의 도시 자라를 약탈하여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더니 비잔틴 황제의 후계에서 밀려난 왕자의 음모로 시작된 기독교 일파인 그리스 정교회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황제와 가족을 죽이고 살아남은 가족들마저 쫓아내더니 황궁을 약탈하는 참상까지 이르게 되었다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라틴제국>을 설립하여 초대 왕으로 이탈리아 출신 제4차 십자군의 총대장 몬페라토 후작을 선출하여 동방 비잔틴 제국을 뭉개어버리고 눌러앉게 되었다지요.
교황의 대리인 총대주교에는 베네치아인 토마스 모로시니 사제가 새로운 제국의 성직 계 통솔자로 취임했다는 것이지요.
중세 교회사의 암흑기에
이어 페스트와 몽골군의 서진으로 유럽은 참혹한 시련기를 거치게 되고 대항해 시대로 진입하지만 변함없는 피조세계 유럽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약탈을 멈추지 않았고 식민지 쟁탈전으로 부유해진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망치질 소리로 전 유럽이 요란해 졌다지요. 인간들의 마음에 세워야할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호화스런운 석조건물을 세우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 위에는 유명 예술인들의 작품으로 장식하고 건물밖에는 예외 없이 남자나 여자의 아름다운 나체조각상을 세웠지요.
교황청 건물도 자물통 형태로 배치하고 그 중앙에 이른바 천국의 열쇠 꽃을 자리를 이집트의 상징물을 탈취해다 세웠다지요.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님께 내리신 천국의 열쇠는 보이는 형상적 실물 열쇠가 아니라는 사실이 사도행전에 그 답이 있지요.
하나님 앞에서 피조된 인간 군상들이 이게 다 무슨 짓을 하여 왔는지 알기나 할까요?
유럽의 지성들이 대답하셔야겠지요.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성경이 출간되고 종교개혁이 되지만 진리의 수호자들 소수는 은둔하게 되고 유럽은 계몽사상과 인본주의 발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아서서 여전히 변함없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카톨릭에서는 이제 그만 위조문서로 판명 난 성경을 버리고 제대로 번역된 성경으로 돌아설 때이지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한 사제들이 깨어나셔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