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위장 결혼에 대한 기이한 낭만을 심어준 건 영화 '그린 카드'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코밖에 보이지 않던 못생긴 남자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여신처럼 아름다웠던 앤디 맥도월. 정체불명의 남자는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해 여자와 합의하고, 정원사인 여자는 기혼자만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의 정원이 탐나서 그 결혼에 합의한다.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예상한 대로 좁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동거 아닌 동거'를 하던 이들은 결국 사랑에 빠진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는 위장 결혼이 꼭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실제로 미국만 놓고 보자면 신분이 불안정한 많은 사람이 시민권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돈을 벌기 위해, 군대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 실패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고향이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땅이 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게 아시아인 시민권자는 노란 독수리, 백인은 하얀 독수리, 흑인은 검은 독수리라는 은어로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미국 여권에 새겨진 독수리 모양 때문에 생긴 은어라고 했다. '독수리를 잡는다'는 은어는 영주권을 얻는 데 걸리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모두 생략한다는 뜻으로, 결혼을 해줄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시민권자를 잡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법적인 '결혼'이 조금씩 무의미해지고 있는 유럽에서조차 안정적인 체류를 위해서는 '피앙세 비자'가 필요하다. 3개월 무비자라는 시한부 삶은 사람들의 삶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박탈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했고, 직업을 빼앗기거나 더 이상 그곳에서 공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나라의 이민법은 수많은 변호사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한 인간의 존재 조건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영화 '로나의 침묵'의 로나는 알바니아 출신이다. 그녀에게 벨기에는 고향과 정확히 대조되는 기회의 나라다. 애인 '소콜'과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서 멋진 식당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던 그녀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브로커를 통해 마약 중독자 클로디와 위장 결혼한다. 악질적인 브로커는 클로디를 약물중독으로 죽이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물론 로나 역시 처음부터 그 사실에 합의했다.
로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철저히 클로디를 외면한다. 그녀에게 현재는 그저 빠르게 지나가야 할 통로일 뿐이다. 만약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산다면 현실은 그 자체로 지옥이 된다. 사랑하지도 않는 약물중독자와 고된 노동, 애인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 상황들이 그녀에겐 버겁기 때문이다. 애인과 누릴 달콤한 '미래'만이 실제 존재하는 로나의 삶인 것이다. 그녀는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견디고 있으며, 미래를 앞당겨 희망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믿는다. 결국 그녀는 꿈에 그리던 벨기에 시민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