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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송강 후손들의 집성촌
1) 진천의 놋점정씨
松江은 四男 三女와 庶一男 孼一女해서 모두 五男 四女를 두었다.
맏아들 기명(起溟) 화곡공(華谷公)은 31살의 젊은 나이로 卒하였고 一男을 두었다.
둘째아들 종명(宗溟) 강릉공(江陵公)은 五男을 두었다.
셋째아들 진명(振溟) 운붕공(雲鵬公)은 一男을 두었다.
넷째아들 홍명(弘溟)기암공(畸庵公)은 一男을 두었으나 서자庶子다.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 당연히 양자를 들여야 했지만 그러자면 아들을 다섯이나 둔 둘째 형에게서 양자를 들여야 했으나 五男 중 막내아들과의 나이 차가 父子의 연을 맺기에는 무리가 있어 서손(庶孫)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이렇게 松江의 宗孫과 血孫들은 대를 잇는데 큰 문제가 없었으나 송강의 증손자 대에 가서 종손에 문제가 생겼다. 후사가 없었다. 양자를 들여야 했다. 당연히 둘째아들 종명(宗溟)의 손으로 대를 이어야했다. 그러나 셋째아들 진명(振溟)의 손에서 양자를 들였다. 松江의 맏아들로 이어지는 종손이 둘째아들이 아니라 셋째아들의 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왜일까?
松江의 둘째아들 宗溟 강릉공은 모두 五男을 두었지만 첫째아들 직(溭)은 외아들을 두었고 둘째아들 수洙는 不育이고 셋째아들 윤沇도 不育이고 넷째아들 양(瀁)은 외아들을 두었고 다섯째아들 뇌(雷)도 不育이었으니 종손으로 양자 갈 孫이 없었다. 다행히 송강의 셋째아들 진명(振溟) 운붕공(雲鵬公)의 외아들 한(漢)이 아들 셋을 두어 그 가운데 둘째를 양자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왜 큰집으로 양자를 보내는데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아들을 大宗家의 宗孫으로 들여보냈을까? 더구나 둘째아들은 繼配의 아들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 처사는 두고두고 宗家의 사회학적 유전자의 온전한 계승에 문제점을 남겼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양자로 들어간 世演의 증손자 대에서 손이 없어 다시 양자를 들이게 되는데 그때에는 初配에서 낳은 맏아들의 증손자가 종손으로 입후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제점이 있었다. 맏증손자가 아니라 둘째증손자를 대종가의 종손으로 보낸 것이다. 3代 전의 잘못을 또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맏 증손자가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면서도 양자를 들이지 않아 代가 끊기면서 자연스럽게 송강의 종손으로 양자 간 둘째증손자가 첫째가 되었고 그렇게 되자 셋째가 운붕공(雲鵬公)의 종손이 되어 4代만에 아래 위의 순서가 바르게 되었다. 先祖들의 혼령이 그 잘못을 바로 잡아 주셨는가 싶다.
이러한 누대에 걸친 사연들로 인하여 松江의 宗家에서 松江의 묵직한 삶의 사회학적 유전자의 흐름을 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松江의 墓가 경기도 고양에서 충청도 진천으로 천장이 되면서 종손과 가까운 친척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내려와 살게 되었다. 종손은 松江의 묘가 있는 지금의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松江 묘소 옆 山 기슭에 터 잡아 사당을 짓고 살았고 일가들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게 되는데 후에 놋점이라는 자연부락 명으로 불리우게 된다. 유기그릇을 파는 상점들이 있던 곳으로 진천과 가까운 안성의 유기를 떼다가 여기저기로 팔기도 하고 소량의 유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놋점의 놋은 놋쇠를 뜻한다. 점은 정방, 즉 상점을 말한다. 그래서 놋점이라는 부락명이 생기게 되었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3대를 걸쳐 벼슬을 하지 못하면 평민과 다를 바 없었다. 양반은 벼슬길에 나아가 녹을 받아 생활을 하던지 아니면 농경사회에서의 부의 창출 수단인 농사를 짓기 위한 농토가 있던지 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면 차선책으로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귀천 순위에서 商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손은 문중에서 위토답을 장만해 주어 그나마 여유롭게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종손을 따라온 일가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놋점에 모여 살면서 일가들은 자연히 놋그릇을 떼다 팔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양반이 들어내 놓고 놋그릇을 이고 지고 팔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 놋점을 낼 수 있도록 자금을 대던가 아니면 대리인을 앞에 내세워 장사를 하던지 하였다.
어느 종손 代에서는 위토답을 이런저런 사연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자 전라도 창평 고향에 남아 살던 일가들이 부랴부랴 위토를 다시 찾아주는 일도 있었다. 어느 代의 종손은 돈이 아쉬우면 쭈루루 내려가 돈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松江 할아버지 위패를 모시고 창평으로 내려오겠다고 엄포(?)를 놓아 일가들이 어마뜨거라 하고 얼른 돈을 마련해 주곤 하였다. 대종가의 종손과 가까운 일가가 된 연 때문에 창평에서 진천으로 재화를 참으로 많이도 올려 보냈다.
놋점의 일가들은 조선조 후기를 걸쳐 일제강점기 때에 재산을 축적하고 이리저리 놋그릇을 팔러 다니면서 사회의 돌아감을 일찍 알고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어 현대에 와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공화당 때 여러 부처의 장관을 지내고 충북 지사를 역임한 정종택, 자유당 때 장관을 지낸 정운갑과 그의 아들로 장관과 충북지사를 역임한 현 국회의원인 정우택 등등의 인물들이 놋점 일가들이다. 정치가들만 거론하였는데 학계나 재계 등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놋점에서 나왔다. 현대에 와서 松江의 후손 중에 출세(?)한 인물들이 놋점에서 많이 나온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2) 충주 소일정씨(昭日鄭氏)
충주의 소일정씨는 정씨 중에서 한 파를 이루는 姓이 아니다. 영일정씨 문청공파(松江) 후손들의 주 집성촌이었다. 집성촌集姓村이란 같은 성씨의 일가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을 말하는데 놋점정씨, 소일정씨, 월림정씨, 지실정씨 등처럼 마을이름을 따서 姓氏를 붙일 때는 그 지역이 문중의 실질적 중심 역할을 하였을 경우다. 문중의 사회유전자가 강하게 작용을 하였다. 松江의 첫째아들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진천 놋점 마을의 놋점정씨, 松江의 둘째아들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충주의 남한강변 마을인 소일의 소일정씨, 제천 월림의 월림정씨, 松江의 셋째아들 후손들이 살고 있었던 담양 지실마을의 지실정씨 등이 그렇다.
松江의 둘째아들 정종명鄭宗溟(1565년明宗20년~1626년仁祖4년)은 28세 때 (壬辰년1592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東人의 세에 밀려 크게 쓰이지 못하다가 仁祖反正 후 西人의 세상이 되자 느즈막에 江陵府使로 나아가 임지에서 卒하였다. 墓는 고양의 先山에 썼다가 넷째아들 鄭瀁이 祖父인 松江의 墓를 고양 先山에서 진천으로 천장할 때 함께 옮겨 아버지 松江의 발치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자리 잡은 명당에 눕게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자식에게 돌아가는 커다란 음덕이었다. 家兄 정기명(鄭起溟)이 젊은 나이에 죽자 집안의 대소사에 맏이의 노릇을 다 하였다. 松江의 임종 시에는 단지(斷指)를 하여 회생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홍인걸(洪人傑)의 딸 南陽洪氏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을 두어 맏아들을 먼저 앞세웠으나 다행히 외아들을 남겼고 넷째 아들도 겨우 외아들을 두었다. 둘째 셋째 다섯째 아들들은 모두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아들은 다섯이었으나 손자는 둘만 건진 셈이다. 병자호란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江陵公 정종명(鄭宗溟)의 손자 정경연(鄭慶演)은 다섯 살 때 아버지 정직(鄭溭)이 돌아가시자 어머니 비안박씨比安朴氏를 따라 경기도 고양에서 외가가 있는 충주로 내려오게 된다. 그 당시에는 깊은 산골이었을 지금의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노은고개에 터를 잡았다. 松江의 후손이 충주에 자리 잡게 된 사연이다. 대략 1612년(光海君4년) 경이다. 올해로 400여 년이 되는 셈이다.
정경연(鄭慶演)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학업에도 열중하여 스물여섯 살에 司馬試에 합격을 하고 이어 벼슬길에 나아가 마지막으로 청안현감(淸安縣監)에서 물러나 노은고개에서 말년을 지냈다. 이 지역의 地名이 노은老隱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청안공(淸安公) 정경연(鄭慶演)이 살았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노인老人이 은거하던 곳이라는 뜻의 노은(老隱)이다. 원래 老 字는 존경의 뜻이기도 하다. 존경스러운 노인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하여 붙여진 地名이다. 1970 년대까지만 해도 청안공(淸安公) 정경연이 살았던 가옥이 보존되어 내려 왔었으나 연수원이 들어서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청안공(淸安公) 정경연(鄭慶演) -松江의 증손자- 은 모두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配 덕수이씨 소생으로 셋, 繼配 여흥민씨(麗興閔氏) 소생으로 다섯을 두었다. 이 가운데 다섯째 아들 정호(鄭澔)가 가장 공부를 잘 해서 형제들이 힘을 모아 마음 놓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정호(鄭澔)는 이에 힘입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英祖 원년에 領議政에 올라 조선조 내내 松江의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先祖가 되었다. 숙종조에 청백리로 천거될 만큼 청렴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생활이 하도 곤궁하니까 英祖가 식량을 내려주고 아들 정희하(鄭羲河)를 연풍현감에 임명하여 아버지 정호(鄭澔)를 봉양토록 하였다. 高祖父 松江처럼 이리저리 귀양을 많이 다녔다. 의성 縣監으로 있을 때 松江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정호는 결혼을 하여 새살림을 차린 곳이 이곳 소일이었다. 고향집 노은고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한강변의 마을이다. 그 당시에는 水運이 주였기에 이곳은 지금의 고속도로 변이나 마찬가지였다. 충주에서 한양까지 뱃길로 여주 이천을 지나 양평으로 미사리로 한양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소식도 늦지 않고 물동량도 많아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후에 이곳에 누암서원(樓巖書院)이 세워지고 민정중 송시열 권상하 정호 등을 배향하면서 소일은 조선조 중후기에 걸쳐 문중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주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소일에서 達川(달래강)을 따라 오르면 송시열이 오랫동안 은거하고 있었던 화양동에도 다다를 수 있었고 만동묘도 지척이었다. 이곳에 살던 일가들을 소일정씨라고 하였다. 주로 문경공(文敬公) 장암(丈巖) 鄭澔의 후손이었다.
3) 제천 월림정씨 (堤川 月林鄭氏)
제천의 월림정씨는 江陵府使公 정종명(鄭宗溟)의 넷째아들, 즉 松江의 손자가 되는 정 양(鄭 瀁)의 墓를 제천 월림에 쓰면서 그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鄭 瀁(1600년~1668년)은 막내 삼촌 정홍명(鄭弘溟)(1582년~1650년)과는 두 살 아래로 함께 沙溪 金長生의 門人이 되어 공부를 하였다. 同門이다. 지금처럼 말하자면 삼촌과 조카가 한 반에서 공부하는 셈이다.
삼촌 정홍명(鄭弘溟)은 大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大提學에 이르렀고 조카 정양(鄭瀁)은 司馬試에 합격하여 侍講院進善에 이르렀다. 死後에 나라에서 정홍명(鄭弘溟)에게는 議政府左議政을 追贈, 諡號는 文貞이고 鄭 瀁에게는 吏曹判書를 追贈, 諡號는 文節이다.
삼촌 정홍명(鄭弘溟)과 조카 鄭 瀁의 사이에는 松江이 선조대왕에게 하사 받은 벼루 용연龍硯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용연(龍硯)은 명나라 신종 황제가 선조대왕에게 준 것인데 선조는 어느 날 여러 대신을 앞에 하고 禮記의 어려운 부분을 질의할 때에 松江이 바른 해설을 아뢰자 그를 갸륵히 여겨 서책 및 옥배와 아울러 용연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松江의 자손 중에서 가장 학문이 높은 후손이 이것을 전수키로 되어 먼저 公의 第四子 弘溟이 이를 간직하였고 다음은 손자 瀁이 물려받았는데 병자호란 때 瀁이 강화로 피난하면서도 이 벼루만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瀁은 어느 날 호병의 습격을 받아 청룡도를 맞았는데 몸에 지니고 있던 벼루가 몸을 보호해 주어 목숨을 건졌다. 그 바람에 용연의 한 귀퉁이가 깨졌다. 云云....
문절공(文節公) 정양(鄭瀁)은 호號가 포옹(抱翁)으로 66세 되던 해에 자원하여 진천현감으로 나아가 公보다 일곱 살 아래인 우암 송시열의 조언을 받아들여 할아버지 松江의 墓를 경기도 고양에서 충청도 진천으로 천장을 하였다. 그때 아버지 江陵府使公 鄭宗溟의 墓도 같이 천장을 하여 松江의 墓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우암 송시열이 松江의 墓를 옮기는데 관여를 하게 된 것은 鄭 瀁과 송시열은 같은 沙溪 金長生의 門人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신독제(愼獨齊) 김 집(金 集)에게도 배웠는데 스승인 金集은 松江의 막내아들 정홍명(鄭弘溟)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었다.
鄭 瀁이 松江 墓의 천장을 계기로 진천에서, 충주에서, 담양에서, 문중이 겨우 안정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松江 후손들의 경기도 고양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鄭 瀁의 외아들 정연(鄭 衍)(처음 이름 대연大演)은 우암(尤庵) 門人으로 아버지 鄭瀁이 죽자 스승인 우암과 상의하여 제천 월림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후로 鄭瀁의 후손이 이곳에 세거하면서 이들을 월림정씨라고 하였다. 代를 이어 내려오면서 우암의 문인으로 또 우암의 제자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학맥을 이어나갔다. 문중의 대표적 학자 집안이었다.
제천의 영일 정씨는 봉화에 거주했던 감무공파 정 양(鄭 瀁)[1600~1668]의 후손이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일대에 입향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영일 정씨는 정양 때 월림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나, 정양의 아들 정보연(鄭普衍)이 백운의 민광훈(閔光勳)의 딸 여흥 민씨와 혼인하면서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4년 「제천군각읍면씨족별통계표」에 따르면 영일 정씨가 금성면에 107세대 거주하였으며, 1998년 마을지에 따르면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수산면 하천리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최근에는 본관 성씨별 자료를 수집하지 않아 자세한 세대수는 알 수 없으며, 2000년 자료에 따르면 제천시에는 연일 정씨가 507가구 1,506명, 영일 정씨가 124가구 362명이 있었다.
영일 정씨 중에 호산(壺山) 정재찬, 건재(健齋) 정일원(鄭一源), 계릉(桂陵) 정운호(鄭雲灝) 등은 유고를 남겼다. 송운 정운경(鄭雲慶)은 의병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후손가에 의병 관련 문건이 다수 남아 있다.
4) 담양 지실정씨 (芝室鄭氏)
昌平이 담양군으로 편입이 되면서 남면 지곡리(지실마을)는 창평 지실이 아니라 담양 지실로 불리워지게 된다.
昌平은 松江의 伯父 南原府使 鄭惟深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父 贈贊成公 鄭 潙의 墓를 이곳에 쓰면서 인연을 갖게 되었다. 乙巳士禍로 松江의 가족이 내려와 살면서 昌平은 松江이 자라고 공부하고 가정을 꾸린 즉 松江을 길러낸 인적 물적 근거지가 되었다.
松江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처가가 昌平이고 경제 창출의 근거인 토지가 이곳에 있고 또 무엇보다도 祖父의 墓와 伯父의 墓도 당지산 기슭에 있다보니 昌平은 자연스럽게 松江의 고향이 되었다. 그래서 松江은 벼슬살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昌平으로 내려와 창작을 하고 재충전을 하였다.
松江의 네 아들 중에 세 아들은 모두 松江이 벼슬을 그만 두고 昌平에 내려와 있을 때 결혼을 시켰다. 큰아들 起溟은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昌平으로 내려와 있을 때 黃崗 金繼輝의 딸과 결혼을 시켜 高陽에 분가를 시켰고 둘째아들 宗溟도 동서 대립이 심화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 내려와 있을 때에 參議 洪仁傑의 딸과 혼인을 시켜 역시 高陽에 살림을 차리게 하였다.
셋째아들 振溟의 혼사도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위로 두 아들은 고향인 高陽에 분가를 시켰지만 셋째아들 振溟은 창평에 자리 잡게 하였다. 네 아들 가운데 한 아들만이라도 松江이 자라고 결혼하고 공부한 이곳에 남겨 昌平과의 인적 물적 관계를 유지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아직 막내아들 弘溟이 그 당시 겨우 대여섯 살이라 셋째아들 振溟에게 그 역할이 지워졌다. 그 바람에 振溟은 34세의 늦은 나이에 進士試에 합격을 하고 종당에는 出仕를 하지도 못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이 공부를 하는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서울과 멀리 떨어진 昌平은 벼슬길에 나아가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文烈公 金千鎰의 딸이 배위이다. 이때부터 昌平은 본격적으로 松江의 후손이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高陽에 자리 잡았던 첫째와 둘째아들의 후손들이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또는 松江의 墓를 옮기면서 진천으로 충주로 제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것과는 달리 창평에 자리 잡은 셋째아들의 후손들은 대대로 昌平에서 살면서 가문의 인적, 물적 보급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昌平은 松江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의 번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넷째아들 畸庵公 鄭弘溟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昌平 지실마을 溪堂에 살면서 아버지 松江의 문집을 출간하고 저술을 하였다. 사후에 贈贊成公 鄭潙, 南原府使公 鄭惟深, 바로 위의 兄인 雲鵬公 進士 鄭振溟의 墓가 있는 창평 당지산에 묻혔다.
畸庵公이 살던 溪堂은 그의 庶子 同福縣監 鄭涖가 살다가 일시 他姓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었으나 셋째아들 振溟의 후손이 다시 취득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 살던 정씨들을 지실정씨라고 불렀다.
지실마을 계당(溪堂)은 松江이 살던 집으로 그의 시우(詩友) 옥봉(玉峯) 白光勳이 하루 밤을 머물고 계당우후(溪堂雨後)라는 漢詩 한 편을 남긴 후로 松江의 후손들이 당호堂號를 계당溪堂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