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페이스북 친구인 강남순 교수님의 글입니다. 임보라 목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는데 페이스북 덕분에 이번에 이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 성정체성과 성소수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 주신 임보라 목사님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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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보라 목사의 죽음 앞에서, 그의 삶을 기념하며>
1. 너무나 마음 아픈 소식을 듣는다. 임보라 목사의 죽음이다. 그는 인간됨의 따스한 미소를 상실하지 않고서,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주변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 진정한 목회를 해 왔다.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비난을 퍼붓는 이들을 ‘악마화’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신을 타협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2. 내가 한글 페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성수수자인 나의 동료교수의 한국방문이었다. 나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의 희생자들에 관한 책을 쓴 스티브 스프링클 교수의 책을 우여곡절 끝에 한국어로 번역출판하도록 주선했다. 대여섯 개의 출판사의 ‘거부’를 거치고 2013년, 드디어 '알마'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게 되었다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 성소수자 혐오범죄에 대한 성찰 (알마, 2013)>). 나는 스프링클 교수에게 책 출판을 계기고 한국 방문을 권했고, 한국 방문 가능성에 기뻐하던 스프링클 교수와 나는 10일간의 한국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한국어로 SNS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스프링클 교수의 한국 방문과 그의 책을 ‘홍보’하고자 한국어로만 하는 페북에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3. 그렇게 해서 2013년 가을, 스프링클 교수와 나는 빽빽한 한국 일정을 가지고 여러 곳을 함께 다녔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처음인 스프링클 교수의 ‘임시 매니저’가 되어서, 나는 그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갖가지 일정을 소화했다. 다양한 강연과 설교 일정, 그리고 신문사와의 인터뷰 등을 주선하면서 그의 가이드, 매니저, 또는 통역사의 역할을 하며 바쁜 10일간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 때 임보라 목사님이 담임자로 계신 “섬돌 향린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임보라 목사님과 그 교회는 편하고 따스했다. 이후에 나는 임보라 목사님의 초청으로 섬돌 향린교회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기도 했다.
4. 내가 2015년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칼럼이나 글을 쓰고 나면 초기에는 갖가지 혐오의 메시지를 페북이나 대학 이메일로 받곤 했었다. 그리고 한 신학대학의 장소를 빌려서 몇 단체가 강연장으로 했는데, '강남순'과 같은 “위험한 교수”가 하는 강연을 위해서 강연장을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충실한 기독교인’들의 전화가 그 신학대학에 빗발쳐서 자칫 강연이 무산될 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 대하여 ‘포기’했는지 크리스천들로부터 그러한 메시지를 거의 받지는 않는다.
5. 임보라 목사의 죽음과 접하면서 다양한 반응을 SNS에서 접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라는 표현이다. 어떤 이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가 ‘이단’이기에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다’라고 하기도 한다. 충격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죽음과 접하면서, 충격과 아쉬움을 표현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를 “신이 데려갔다’라고 하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인간의 죽음과 삶—그것은 많은 경우 “왜”를 알 수 없다. “장미는 왜가 없다 (The Rose without Why)”라는 앙겔루스 실레지우스 (Angelus Silesius)의 시에서 처럼,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왜”는 우리의 인지 세계-너머에 있다.
6. 임보라 목사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자. 성소수자와 같이 소외된 이들과 관련된 현장에 언제나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한국 기독교에 이렇게 주변부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목회자와 크리스천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그 존재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본다.
7.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크리스천들의 ‘혐오정치’는 점점 그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소수자, 난민, 타종교인 등에 대한 혐오와 그 혐오선동은 이제 도가 넘어서고 있다. 임보라 목사와 같은 이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현재 한국 교회들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소위 ‘이단’으로 규정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8. 예수 역시 ‘이단아’가 아니었는가. ‘정통’이라는 옷을 입고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이들이야 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이단’이다. 임보라 목사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보고자 했던 보다 정의로운 사회와 종교를 이루기 위한 그의 연대와 변화의 씨뿌리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임보라 목사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그의 삶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의 의미가 뿌리내리도록 우리가 크고 작은 변화와 연대의 씨앗 뿌리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그의 치열한 연대의 삶을 기념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