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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21
나라의 진로를 뒤흔들었던 지난날 '정치공작' 잔재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국민 여론조작이 그 실체다.
과거엔 선거나 여론전에서 이기려면 조직력이 필수였다. 각종 이권.직능 단체나 향우회 등 결속력이 강한 기구와 정치인을 엮는 오프라인 정치 브로커들이 활개쳤다. 활짝 열린 인터넷 시대, 지금은 그 자리를 온라인 브로커들이 차고 들어왔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댓글 조작 등의 방법으로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 댓글 조작 혐의로 구속된 이번 김동원씨(온라인 닉네임 ‘드루킹’.민주당원) 사건은 이를 상징한다.
사건은 지난 1월 인사청탁 불이행에 반발, 남북단일팀 기사와 관련한 댓글 추천 수 조작 의혹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 조작은 빙산의 일각이다. 불길은 지금 청와대로, 지난해 대선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일파만파다. 조직적 댓글조작팀 운영, 청와대 인사청탁,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백원우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 여권 핵심인사 연계 의혹 등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면 국가적 분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전체적으로는 대선 기간을 포함, 대규모 댓글 조작을 통해 여론을 왜곡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혐의다. 선거법 위반이 될 수도 있다. 권력과의 연계가 밝혀지면 중대 사건이 된다. 따라서 불발된 인사청탁보다 여권 핵심이 댓글 여론 조작을 처음부터 최소한 모른 체했다는 의혹이 사태의 본질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만에 하나 여권이 드루킹 일당에게 자금을 댄 증거라도 드러나면 '국기문란 게이트'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세부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의원과 김씨의 관계, 조직적 개입과 배후의 존재 여부, 자금의 출처, 구체적인 활동 내용 등이 규명돼야 마땅하다. 지난 대선 때 매크로 프로그램(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한 댓글조작을 했는지도 밝혀야 할 주요 대목이다. 살아 있는 권력과 연루된 정치 사건인 만큼, 있는 그대로의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대선 여론조작 여부
이번 사건은 한 언론사가 처음 매크로 프로그램에 의한 조작 의혹을 제기해 민주당이 경찰에 고발하면서 시작됐으나 김 의원 관련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검찰은 최근 이 사건과 관련, 김씨 등 3명을 구속 기소했다. 일단은, 지난 1월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포털 사이트 네이버 뉴스에 달린 문재인 정부 비판 기사의 댓글에 집중적으로 ‘공감’을 클릭한 혐의다.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기사에 달린, 정부를 비난하는 댓글 2개를 조작한 혐의만 적용했다.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김씨가 자신의 인터넷 카페 회원을 일본 오사카 총영사로 인사 청탁했다는 내용을 카페 대화방에 올렸고, 청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 의원과 보좌관에게 협박성 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찾아냈다. 앙심을 품고 정부 비판 댓글을 조작하려 했다는 추론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 씨는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을 돕는 온라인 선거 운동을 했고, 김 의원에게 지난 2016년 11월부터 올 3월까지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는 소식이다. 이 사실은 대선 때에도 이같은 여론조작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낳게 하는 부문이다. 따라서 대선 당시 김 의원과 김 씨 관계가 어떠했으며, 김씨가 그 때도 매크로 프로그램을 활용한 댓글 조작을 했는지 여부가 주요 초점이 되기에 이르렀다.
온라인 공간의 댓글 조작은 여론 왜곡으로, 엄중한 범법행위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적이다. 제2, 제3의 드루킹 사건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국은 진상을 하루빨리 밝히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대통령 측근이 관련된 사건일수록 수사의 공정성 시비가 있어선 안 된다.
미온적 수사
그같은 관점에서 문제는 역시 검·경(警·檢)의 수사 자세다.
경찰과 검찰엔 현재 진실을 파헤치고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찾기 어렵다. 소극적 수사와 정권 실세 눈치 보기 등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이번 사건이 뒤늦게 언론 보도로 공개되기까지 경찰과 검찰은 ‘숨기고, 덮고, 감싸기’에 급급했다.
경찰은 피의자가 검거돼 구속된 뒤에도 한동안 이를 숨겼다. 지난달 21일 김씨를 체포한 뒤 지난 13일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쉬쉬’ 하면서 3주의 시간을 허송했다. 3주는 증거인멸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김경수 의원에 대해서도 “현재로선 소환 계획이 없다”며 선을 긋고 있다.
또한 경찰은 지난 17일에야 김씨를 비롯한 관계자들 자금 출처 확인 등을 위해 수사팀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자금 출처 조사는 수사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수사 착수 후 두 달이 넘었고 김씨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뒤로도 20여 일이 지난 이 시점에서 한다는 것이다. 여론의 압박에 밀려 뒷북을 친 형국이다. 수사 초기 범죄 현장 폐쇄회로TV(CCTV)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않았던 경찰이 이제야 뒤늦게 사건 관련자 계좌 추적에 나선 셈이다.
정권 실세라는 김 의원의 연루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도 경찰의 감싸기는 여전했다. 이주민 서울경찰청장은 “김 의원은 (텔레그램) 문자를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댓글 조작이) 불법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변호하듯 말했다. 검찰에 사건을 송치할 때도 김씨와 김 의원이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 주범이 민주당원이라는 점도 공개하지 않다가 언론에 의해 보도된 뒤 밝혔다. 축소 수사 논란을 자초한 것이다.
검찰도 마찬가지다. 대선 직전인 작년 5월 중앙선관위가 김씨 등의 불법 선거운동에 대해 수사 의뢰를 했지만 대선이 끝난 뒤인 11월에 무혐의 불기소 처분하고 수사를 종결하고 말았다. 이는 지난해 대선 때 김 씨가 어느 정도 수준의 활동을 했는지, 앞으로 새롭게 규명돼야 할 이유기도 하다.
한마디로 검.경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수사에 미온적인 양상이다. 권력에 굴종했던 행태를 답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있다. 경찰이 추가 수사를 해 검찰에 넘겨본들 두 기관의 처리 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민주화 이후 각 정권들이 출범시에는 언제나 검.경의 중립성과 개혁을 외쳤지만, 실제로 현실은 때때로 그 반대가 되어 왔음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이들 기관의 흑(黑)역사는 막후에서 줄을 세우는 정치권력과 여기에 고개 숙인 고위 간부의 잘못된 처신이 태생 배경이다.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화 정권기인 지난 참여정부 시절 검·경이 스스로 힘의 균형을 조율하게 자율권을 줬다가 결국 실패한 것도 그런 반성의 사례가 된다.
국민은 과거 행태를 되풀이하는 수사기관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산 권력’에 대한 눈치 보기 수사로 비치는 상황이 계속될 경우 국민의 요구는 특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의혹들
밝혀 내야 할 의혹들이 점증하고 있다. 우선, 1차적 의혹은 역시 자금출처다. 김씨가 운영한 출판사는 8년 동안 책 한 권 낸 적 없는 사실상 ‘유령 출판사’였다. 그러나 경찰이 압수한 댓글·문자폭탄 등 여론조작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휴대전화만 170여 대다.
이 출판사는 지난 1월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 측에 자신들의 모임을 소개하기 위해 보낸 자료에서 "운영자금은 연 11억원"이라고 밝혔다. 실제 많은 돈을 썼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건물 3개 층, 총 280㎡를 임대해 사용했다. 임차료만 월 485만원, 연간 5820만원이다. 결국 어디선가 돈이 들어왔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여권 핵심과의 연계부문 의혹도 짙다. 김씨가 대선 전부터 당시 문재인 후보 대변인이던 김경수 의원과 온·오프라인을 통해 접촉해 왔고, 김 의원 주선으로 인사 청탁 대상자가 백원우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면담한 사실까지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김씨의 여론조작 활동 본거지인 경기도 파주 느릅나무출판사를 두 차례 방문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가 자신을 청와대 행정관으로, 지인을 일본 주오사카 총영사로 임명해 줄 것을 김 의원에게 청탁했으며, 이들 청탁이 실제 청와대에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둘 사이가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문이다.
결국 이번 댓글조작에 김 의원과 민주당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론조작 활동 경비 출처는 어디인지, 인사 청탁이 진행된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밝혀내야 하는 것도 이들 의혹과 맞물려 있다. 지난 대선 과정을 포함해 김씨의 댓글조작 활동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돼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의혹의 최대 핵심은, 대선 당시에 조직적으로 불법 여론 조작을 했는가,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그리고 이를 김 의원 등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가, 이와 관련된 협의나 지시가 오갔는가 하는 점 등이 될 것이다.
수사 책임
이는 대선의 정당성까지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검·경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수사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김 씨의 사무실 운영 자금, 휴대전화 170대 운용 비용, 선거 때 정치인에게 건네려 했던 자금 등의 출처도 수사해야 한다. 성역(聖域)을 뚫어야 바른 길이 열린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의혹을 축소하고 은폐하면 나중에 그들 스스로도 특검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경험은 검·경에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던진다. 지난 2009년 1월 경찰청이 일선 경찰관들을 동원해 용산 철거민 진압 참사 원인에 대한 여론을 조작하려 한 경험은 경찰의 옹색한 처지를 스스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선 경찰관들에게 용산 참사의 원인을 묻는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의 인터넷 시청자 투표에 적극 참여하라고 지시한 것은 스스로 진압 작전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문화방송(MBC)의 ‘100분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관들에게 인터넷 여론조사에 참여하라는 문자 메시지가 일제히 발송된 사실이 경기와 광주·경북 등 전국에서 확인됐다. 이 때문인지 ‘100분 토론’의 여론조사는 조사를 시작한 날부터 나흘 동안은 ‘당시 김석기 경찰청장부터 파면해야’가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그 후 부터는 갑자기 ‘진상규명부터 이뤄져야’가 더 높아졌다. 띄워 놓고 여론몰이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아픈 경험을 오늘의 경찰은 되새겨야 한다.
사안이 엄중할수록 수사는 정도로 가야 한다. 수사에 성역을 둬서는 안된다. 대선 커낵선 의혹 수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야당인 바른미래당은 이를 검찰에 본격 수사의뢰했다. 2012∼2017년 문재인 후보 대선캠프와 드루킹의 범죄행위 간 연관관계를 밝혀달라는 것이다. 바른미래당에 따르면 지난해 대선 당시 ‘철수’ 공세를 하라는 지침 등이 하달됐다는 내용이다. 대선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건이 엄청난 인화력을 지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김씨가 문재인 후보 당선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혹시 그것이 댓글 조작이 아닌지, 이 과정에서 김 의원이 김씨와 소통하며 개입했는지, 이에 대한 수사는 이제 불가피해졌다.
▲ 지난 19일 민주당원 댓글 사건인 이른바 '드루킹 사건' 연루 의혹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의 의원회관 의원실 앞에 많은 취재진이 대기를 하고 있다. / ⓒ뉴시스
여권 자세
가뜩이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의혹과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낙마로 도덕성에 상처를 입은 청와대와 여당에 이번 사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반응과 해명도 매우 미온적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오히려 우리가 (댓글 조작 사건의) 피해자”라며 “매크로(작동 반복 수행 프로그램)를 돌렸는지, 안 돌렸는지가 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짜 본질은 매크로를 돌렸느냐의 여부를 넘어 누가 댓글 조작을 통해 대선에 영향을 미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느냐를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대선당시 김씨가 주도한 정치 모임 '경인선(경제도 사람이 먼저다)'을 찾아 격려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대표적 단서가 될 수 있다. 인터넷에 공개된 영상에서 김 여사는 대선 직전인 지난해 4월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경인선도 가야지"라며 이 모임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다음 일정 장소로 가자고 재촉했지만, 김 여사는 경인선에 가야 한다는 말을 다섯 차례나 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와 여당은 그동안 김씨를 수많은 자발적 지지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영상은 다른 진실을 담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며 선거 현장을 누벼야 하는 대선 후보 부인이 '경인선'이라는 이름을 여러차례 거듭 불렀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여권이 김씨를 각별하게 여겼다는 또 다른 정황도 있다. 19대 대선이 끝난 후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서로 고발했던 선거법 위반 건을 취하하기로 합의했었다. 민주당은 국민의당에 9건을 취하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8건은 당초 합의대로 국회의원 및 당직자 관련이었고, 한 건은 합의에 없던 일반인이었다. 그 일반인 속에 바로 김씨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민주당이 국회의원, 당직자들과 같은 우선순위로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비중높은 대상이었던 셈이다.
청와대 역할
이런 흐름은 청와대가 실체적 진실을 숨김없이 밝히는 정면 돌파만이 판을 바로 잡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의 말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김씨의 인사청탁건만 해도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가 몇 시간 뒤 “추천 인사를 민정비서관이 만났다”고 뒤집었다. 그러다 “추천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신고’를 받아 만난 것’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거듭된 말바꾸기는 상황만 악화시킬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김씨와 김 의원이 어떤 관계였고, 그가 특정 자리를 요구한 이유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도 피해자’라느니, ‘문제는 매크로를 돌렸는지 여부’라는 등의 말만 늘어놓고 있다. 매우 부적절한 언급이다.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결국 특검을 불러오고 판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권에선 김씨를 유명인과 친분을 과시하며 잇속을 챙기는 '정치 브로커'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별 공도 없는 사람이 여권 실세 의원을 상대로 총영사 자리를 요구하고, 김 의원이 이 청탁을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것은 납득이 안된다. 그가 운영한 인터넷 카페 '경제 공진화를 위한 모임(경공모)'은 회원 수가 한때 2500여 명에 달했으며 안희정 전 충남지사,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등 진보진영 유명인사를 불러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그가 현 여권에 크건 작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을 개연성을 부인키 어렵다.
이제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간 정치공방은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바른미래당 안철수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대선 당시 여론조작 의혹과 관련, "김 의원이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 하는 게 합리적 의심"이라며 문 대통령까지도 의혹의 고리에 포함시킬 정도다. 이런 시기에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사과는 커녕 “야당의 저질 공세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고 있다. 소속 당원이 주도한 여론 조작 사건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를 해야 할 추 대표가 “김경수 의원 실명이 유출된 경위와 왜곡 보도한 언론사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언론을 겁박한 것도 적반하장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 문재인 정부를 비방하는 댓글이 쏟아지자 “네이버 댓글이 난장판이 돼버렸다”고 추 대표가 비난한 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쪽은 민주당이다. 바로 이 수사의 결과로 이번 댓글 조작이 드러났다. 민주당은 지금도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의 댓글 공작에 대해선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내로남불’도 이 정도면 심하다.
인터넷 댓글문화
이번 사건은 국가정보원의 댓글조작 사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온 것이다. 댓글을 통한 여론 조작 행위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지를 반영한다. 익명의 공간으로 방치돼온 인터넷 댓글 문화가 얼마나 깊은 바닥까지 추락해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댓글이 조직적인 여론조작의 도구로 악용돼 민주주의 시스템을 갉아먹을 수 도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 사람이 수십 개의 ID를 동원해 댓글을 쓰고, 매크로프로그램으로 댓글 순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10%내에 불과한 이른바 슈퍼댓글족이 전체 댓글 중 절반 이상을 독점하며 한 달에 200만건 이상 도배질을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디지털 시대 어둠'의 단면이다.
댓글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지난 3월 이뤄진 한 여론조사를 보면 10명 중 8명이 뉴스 댓글이 사회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댓글을 보고 정부정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43.5%나 됐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댓글의 부정적 영향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
댓글의 폐해가 많다고 해서 댓글 자체를 폐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면 그에 걸맞은 수준의 투명성과 규율을 갖춰야 한다.
댓글 여론조작을 가능케 한 1차적 책임은 포털 사이트에 있다. 기사 클릭 시 언론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아웃링크’ 방식을 쓰는 구글 등 해외 포털과 달리 네이버, 다음 등은 포털 플랫폼 내에서 뉴스를 읽고 댓글을 달고 공감, 추천을 하게 만든다. 이용자들의 체류시간을 늘려 광고수익 등을 올리려는 상업적 목적에서다. 댓글 수, 공감클릭, 추천 등에 따라 메인화면이나 랭킹에 오를 수 있게 해놓으니 수백 대의 전화와 컴퓨터, 조작 프로그램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세력이 달려드는 것이다.
이제는 상업적 목적으로만 진화해온 포털 댓글 시스템의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때다. 막말과 인신공격성 댓글, 가짜뉴스가 게시돼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포털 사이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매크로 프로그램처럼 소프트웨어 등을 이용해 댓글 작업을 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입법도 조속히 요구된다.
무차별적인 소문 확산으로 개인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훼손하고 기업에도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등 인터넷의 악용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는 오래다.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로서 우리사회가 묵과할 수 없는 행위다. ‘드루킹의 자료창고’라는 경제·시사 블로그를 운영해온 이번 사건의 김씨 역시 지난 2009년과 2010년 네이버의 파워블로거로 뽑혔고, 최근까지 ‘하고 싶은 거 다 해’ 등 시사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 영향력을 키워왔다. 이런 유형의 인터넷 역기능이 더 이상 번져나가기 전에 뿌리를 뽑는 특단의 대책이 절실해 지고 있다.
'한국적 현상' 개혁을
민주당은 야당 시절, 이명박 정부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돕기 위해 댓글공작을 했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여당 국회의원 비서진이 선관위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한 사건에 대해서는 특검을 요구한 바도 있다.
따라서 정작 자신의 당원들이 저지를 이번 사건과 관련, 민주당은 야당을 비판만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진상규명에 앞장서 소모적 공방을 빨리 종식시켜야 마땅하다. 악성댓글이 널뛰듯 하며 여론을 뒤흔드는 정치문화를 개혁하는 일도 이제 정치권 스스로 나서야 한다.
악성댓글이 익명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창궐하는 건 한국적 현상이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가 없다. 한때 온라인판에서 댓글 기능을 없앴던 미국 뉴욕타임스도 요사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도입해 악성댓글을 자동 삭제한다고 한다. 일부 유럽국들처럼 뉴스 댓글을 포털이 아니라 해당 언론사 홈페이지에 달도록 하거나,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만이라도 댓글 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다각적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여론조작 행위가 더는 발을 못 붙이게 하는 방책이 절실하다.
물론, 선거개입이나 정치공작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의 뒤틀린 정치사는 이를 증언한다. 요체는 요즘 세상에도 흑색선전이 통하리라 판단하는 정보고위층의 상황판단 의식이 문제다. 이번 사건 역시 그 잔재다. 이제야 말로 이를 말끔히 씻어내겠다는 국가사회적 처방이 긴요하다.
지난 2012년 8월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안철수 룸살롱’ ‘박근혜 콘돔’ 같은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되는 사태까지 있었음도 되돌아 봐야 한다. 인터넷 공간이 저질 음모론으로 뒤덮여 버린 사례다. 당시 상황은 여론의 창이 특정 세력이나 일부 군중의 개입과 조작으로 간단히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인터넷 공간의 선거 역기능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그 해 헌법재판소가 하루 평균 이용자수 10만명 이상인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 때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도록 하는 인터넷 실명제를 위헌이라고 결정한 적도 있었다. 이로써 2007년 도입 후 논란이 많았던 인터넷 실명제가 사라지게 됐지만, 이제는 그 역기능을 다시 고심치 않을 수 없게된 국면이다.
앞으로도 유언비어나 비방, 언어폭력 등이 인터넷에서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란 관측은 높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허위정보 유포나 사이버 테러는 선거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포털사나 인터넷 언론들도 상업적 욕심 때문에 악의적 글이나 유언비어가 나도는 것을 방치해선 안된다. 댓글에 대한 모니터링과 이를 차단시키는 블라인드 제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 때의 ‘안철수 룸살롱’ 사건에서 보듯 거대 미디어공룡에 의한 여론조작 가능성은 계속 경계돼야 한다.
국정기조 쇄신돼야
여론 조작은 그 주체가 국가기관이 됐든, 개인이 됐든 결과는 동일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적 훼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번 '드루킹 사건'은 여론의 창으로 여겨지는 인터넷 댓글이 얼마나 심각하게 민의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파헤칠 기회다.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명예훼손이나 모욕행위가 모두 익명성이 근본 원인이고, 특히 익명의 벽 뒤에 숨어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선거 같은 국가진운의 정치적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회적 해악이다. 디지털 시대, 싸구려 댓글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를 이번만은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검·경은 더욱 단단히 유념해야만 한다. 불법과 반칙을 일삼는 정치문화를 일소할 절호의 기회임을 재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부 관련기관들 역시 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를 신속하게 구제할 수 있는 후속대책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책임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여론 조작과 검·경의 편파적인 수사, 정부·여당의 바람잡이로 국민의 귀와 눈을 속이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국정 기조를 전면적으로 바꾸기 바란다.
이병도 주필
출처 : 시사오늘(시사ON)(http://www.sisa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