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1월 5일
절제, 생명과 경건의 방향으로
믿음은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덕을 세우는 데에는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식은 덕을 세우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사랑은 덕을 세우지만,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말씀을 다시 기억하자.
그러므로 지식은 언제나 덕의 최고의 목적인 '사랑'에 의해 통제되어야야 한다.
사랑이 역사할 때, 지식은 덕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식은 오히려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예이다.
법을 가장 잘 어기면서도 가장 잘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법을 잘 아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해 가면서 법을 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우선 법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그 사람은 다름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자신과 함께 남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
이렇듯, 신적 성품에서 절제를 '지식을 바로 사용하기 위한 사랑의 힘'으로 정의해 볼 수 있을까.
헬라 문화적 배경에서 '절제'는 높이 칭송받는 덕목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분출은 무질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간의 이성으로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완성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이었고,
절제는 이런 점에서 이성적 지식에 의해 함양될 수 있는 덕목이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절제를 지식에 종속시킨 것도 이런 이유이며, 이성적 지식에 의해 욕망을 통제하는 힘이 절제라 본 것이다.
이런 견해도 일리가 있다. 예컨대, 종말과 심판이 반드시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지식은 그로 하여금 마땅한 절제를 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참으로 '안다면' 그는 스스로 거룩함을 위하여 절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아도 절제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도 있는가? 그럴 수 있다.
지식에 절제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방종하게 할 것이다. 지식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단지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방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의 신적 성품에서 절제는, '지식에 덕을 공급하라(6~7절)고 하는 말씀처럼
지식에 더하여 공급되어야 하는, 그래서 지식만으로는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는 덕목인 것처럼 제시된다.
또한,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는 말씀이, 헬라 철학 등에서 지식이 있다면 욕망을 제어할 절제가 생긴다는 식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지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정도의 금욕주의에 그치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여기에는 작은 것 같으나 큰 차이가 있다. '욕망'혹은 ' 정욕'은 성경에서 종종 그 자체로서 더럽고 악한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정욕 자체가 죄와 죽음과 허무함위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에게 주신 욕망은 그것 자체로서는 좋은 선물이다. 식욕, 성욕, 명예욕,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영원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마음은, 인간이 인간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헬라의 스토아 철학에서처럼 인간의 욕망들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금욕주의적 방향으로 가는 것이나, 아예 희로애락 같은 감정조차 다른 욕망들과 함께 없애 버리려는 신비주의적 노력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이 욕망에 관해 가르치는 진리는, 그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과, 그러나 지금은 더러움과 썩어짐과 허무함으로 인해 변질된 세상과 함께 인간 조건으로서의 그런 욕망들도 동일한 죄와 죽음과 허무의 군세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인간 조건인 우리의 욕망들이 더 이상 죄와 죽음과 허무에 봉사하지 않도록 악한 권세에서부터 해방시켰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없애 버리거나 단순히 억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래의 목적 곧 덕과 사랑과 생명의 '방향'으로 고정되고 또한 그 방향으로 견지되어, 더 이상 불의 병기가 아니라 이제는 의의 무기로 오직 선한 목적에 봉사하도록 다스려지고 훈련되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어느것이다."
-어느 신앙서적에서,
단풍이 들어가는 첫 가을 같은날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