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10 제자 훈련
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노모히데오는 전설적인 포크볼을 만들기까지 십수년이 걸렸는데,
하물며, 거듭남이 제일 중요하지만, 심지어 거듭났더라도 죄짓지 않도록 자신을 연단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것은 운동선수의 트레이닝과 같은데, 연단이라는 말이 체육관이란 뜻의 김나지움의 어원으로, 벌거벗고 훈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벌거벗고 훈련한다는 말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거치는 것을 다 벗어버리는, 제거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바울도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있거든 그것을 잘라버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 말이다.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로 선수들의 교관이나 다름이 없는데, 예수님은 교관들의 교관으로서, 엄중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제자 훈련이다. 왜냐하면 이 제자들은 앞으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명령하고 가르쳐야 하며, 또한 죄를 경고해야 하며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 본문의 앞뒤를 미루어볼 때, 경고 곧 책망과 용서하지 않아서 생기는 실족인 것 같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 본인의 예를 들면, 게임광풍이 불 때, 중독이 돼서(하루에 10시간), 아버지와 장마전선이 형성되었는데, 정말 심각하였다. 레스링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한 참이 지나 나는 끊어야 함을 깨닫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하니 게임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다가 교회 근처로 이사를 와서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그러다가 몇 달에 한 번 그러다가 은혜받는 때도 생기고, 거의 매주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책망과 용서 덕분이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덕분이다.
그런데 성도는 잘 보면,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을 곧 죄의 광풍과 죄의 풍랑 속에 항해하고 있는 배와 같다. 그런데 주의 수많은 책망과 용서가 아니면, 항로를 이탈하여 좌초되거나, 배가 아예 침몰할 수도 있다. 아무튼 성도는 하나님께 7번을 70번이 아니라, 죄를 지적받고 수없이 용서를 받고 산다. 아무튼 그러므로 그렇게 천천히 경건이 준비된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벗어났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하여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노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인데, 노모 히데오가 공 하나를 완성시키는데 십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하물며 죄로부터의 일은 더 그렇다. 그러므로
히12:12~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 그런데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죄를 경고하는 일이나, 또 7번이나 죄를 지은 사람을 7번 회개하고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을 두고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믿음을 더하소서 간구한 것이다. 예전에 군대훈련소에서 앞으로 교관하고 싶은 사람 손드시오! 응? 칼빈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싫은 소리를 한다며 교회에서 당장에 쫓겨났고, 웨슬리도 짱돌이 날라오고, 벽돌이 날라오고, 조나단 에드워드도 교회에서 바른말을 한다고 쫓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봐도 때론 말씀이 달때도 있지만, 매우 매워서 입에서 뱉어버리고 싶은 경우도 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불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사역을 할 때, 항구적으로 보지 못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너무 어려운 사역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소서! 성도들의 삶도 그렇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못산다. 믿음이 아니면, 죄를 경고도 용서도 회개도 못한다. 그런데 말씀의 완전함, 예수의 죄사함,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었노라, 여기에 회개와 용서의 근거가 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일은 약간의 믿음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고도 용서도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러나 내가 아니라, 주의 약속, 신실하심을 말하는 믿음이다. 곧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정도 믿음만 있으면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심기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 병 낫는게 쉽냐 아니면 죄사함 받는 것이 쉽냐고 물으셨는데, 믿음으로 죄사함 받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내 죄가 용서받은 것이 뽕나무가 뿌리 뽑혀 바다에 심기어진 것과 같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겨자씨만큼 믿음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있는 보상심리를 말하시는 것이다. 제자된 성도는 아무리 자신이 일을 잘했어도, 당연히 할 일을 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진리, 은혜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탕자가 가졌던 마음, 나를 종으로 써주셔도 감사합니다라는 무익한 종의 인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은혜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경건의 근거도 믿음이다.
롬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