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을 검색해 보니, 위백에서는
정견(正見, 산스크리트어: samyag-drsti, 팔리어: sammā-ditthi)은 바른 견해라는 뜻이며, 엄밀한 뜻으로는,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뜻한다.
연기법을 바르게 보고 생긴 견해를 정견이라 한다는 것인데.. 누가 12연기법을 바르게 보고 있지.. 매우 드물다.
그리고 12연기법을 바르게 보는 자라면 12연기법은 12인연법이나 인과법과 다르다는 것을 본다.
계속 검색하니 불교신문에서 정견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편견과 사심을 버리고, 누구와 갈등하거나 대립함이 없이 공정한 안목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라는 대혜스님의 가르침이 바로 정견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서로 돕고 은혜 느끼는 생활이 ‘정견’
/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저와 같은 설명을 기억하면서 부처님이 설하는 정견을 보면..
정견은 8정도의 처음으로 8정도는 곧 중도라 하셨다. 그리곤
중도란 고행이 아니고 쾌락이 아닌 것이다[고락중도], 영생이 아니고 단멸이 아니다[단상중도], 태어남이 없고 멸함이 없는 게 중도다[생멸중도]
고로 졍견이란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하거나 인생은 단 한 번이라고 보거나 더 나아가 인간은 태어나거나 죽는다고 보는 게 아니다.
부처님이 설하는 정견과 편견이니 사심이니 갈등, 대립 같은 일반적인 설명인 정견 뜻의 차이가 보이는지..
바르게 보아야만 바른 견해가 생기니 정견을 바른 견해라고 설명하는 것은 8정도에서 정견에 이어 나오는 정사유를 보면 이해가 된다.
바르게 보아 바른 견해가 생겨야 바른 사유가 가능하지 않은가.
바르게 보아도 바른 견해가 생기지 않으면 바른 사유는 불가능하다.
고로 정견은 바르게 보아서 생기는 바른 견해라고 설명한다.
다시 부처님이 설하시는 정견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삶 안에서 바른 길을 보는 게 아니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자아라는 자가 있어 그가 이것과 저것 가운데 골라서 바르게 보는 것을 정견이라 하는 게 아니라
생멸하는 자아가 없다고 보는게 또는 그리 보는 견해가 정견이라 하는 것이요,
정견을 하려면 고행이나 쾌락에는 없다고 하듯 무아임을 보는 게 정견이라 한다.
그러기에 12연기법을 바르게 본다[안다]는 것은 무아임을 아는 것이요, 무아로 세상을 본다는 게 된다.
그런데 위에서는 한결같이 삶 안에서 (내가) 바르게 보거가 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을 정견이라 하지 않는가.
석가 부처님 가르침으로 보면 위에서 설명하는 정견은 세간 정견일 뿐 출세간 정견이 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재가자인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세간에 살고 있다.
고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간 정견이지 출세간 정견이 아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면 위에서 설명한 일반 정견 설명이 틀리지 않는다.
출세간 정견의 핵심 언어는 바로 무아인 안아트만이다.
그에 반해 세간 정견은 아트만을 인정한 정견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것이 정견(正見)인가?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世間)의 정견으로 번뇌[漏]가 있고 취함[取]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출세간(出世間)의 정견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속의 정견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그가 보시[施]가 있고 주장[說]이 있음을 보고, 내지 이 세상에 어떤 아라한이 있어 후생(後生)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세간의 정견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잡아함. 588경 에서>
세간 정견의 특징은 나 아트만이 있어 번뇌가 있고, 죽어서 나는 좋은 세계로 가길 바라는 견해다.
이렇듯 두 가지 정견을 설하시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정말 전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간 정견은 부처님이 아니어도 성현으로 알려진 이들이면 한결같이 가르치는 정견이다. 그것을 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바로 안아트만[무아]인 출세간 정견을 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0세기 이후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가 여러 가지라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불교 안에서 무아를 근간으로 하는 출세간 정견은 무뎌지고 법실유라 하여 세간 정견이 핵심처럼 자리하니..
그것을 들은 자들은 그런 불교라면 힌두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힌두교나 이슬람교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게 보인다.
곧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입으로는 무아라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무아의 출세간 정견을 잊었기 때문이다.
8정도가, 정견이 수행이라 함은..
무아를..
무아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