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가고
없어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정수
나는 어제
목욕탕에 가서 목욕도 했건만 오늘 아침엔 샤워실에서 일찍 세수를 하고 나왔다. 얼굴에는 며느리가 사준 로숀과 스킨도 발랐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친구 문상을 가려고 외출준비를 했다. 마음도 몸도 추웠다. 아직 약속시간이 남아있는데도 마음은 바빴다. 봉투 하나를 꺼내 봉투 앞면에
부의(賻儀)라고 정성스럽게 쓴 뒤 저승에 가면서 쓰고 싶을 때 쓰라고 부의금도 넉넉히 넣었다. 평상시와 다른
나의 정성이었다.
2015년 1월
7일 점심 무렵, 63세로 세상을 떠난 그 친구는 나와 알고지낸지 40여 년이 된다. 사회친구로 고엽제후유증 환자로 광주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빋던
때였다. 김제가 고향이며 김제군청에 다니던 때라 나를 알아보는 선후배들이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인 친구가 H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4년
후배였다. 동생처럼 형처럼 서로를 위하며 광주보훈병원에 갈 때 H가 차량을 가지고 사무실로 찾아와 같이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니던 시절이었다.
호남지방에는 유일하게 국가유공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보훈병원이 광주에 있다. 특히 전라북도에서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치료를 받는 불편이
있어 보훈처는 전주예수병원을 지정병원으로 정하여 애용하고 있다. 지정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지병이 발생할 경우 광주보훈병원담당의사의
위탁진료처방을 빋아 큰 병원으로 갈 수가 있다. 병명이 같아 고생하는 우리는 서로 마음까지 통해서 더욱 친한 친구가 되었다. 점심시간이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월남참전전우들과 어울려 점심에 뚝배기 한 사발씩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 주저앉아 버렸다. H의 아내는 H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떤 위로를 해야할지 고민이었다. 1월 9일
12시 발인이라고 하여 아침 일찍 문상 갈 준비를 했다. 도저히 나 혼자 차량을 이용할 수 없어 친구에게 부탁하여 익산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예식장으로 들어가니 넓은 장소에 인적은 없고 상주도 없이 영정사진 만이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갈 길이 이렇게 급했는지
가슴이 아팠다. 한참 뒤에야 친구 부인을 볼 수 있었다.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고 정승 강아지가 죽으면 문상 가서 정승의 눈도장을
찍는다는 웃지못할 옛말이 이 상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친구 부인과 그동안의 여러 말들을 하나하나 들을 수 있었다. H가 당황하여 병원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원대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참 기구한 운명을 갖고 살아온 친구가 아닌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온 게 죄라면 죄일 것이다. 국가에 충성하려고 파월장병이 되어 참전했고, 고엽제로 인하여 얻어온 질병과 씨름하다 폐암 3기라는 판정을 받은지
36시간도 채 안 되어 이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서 무엇을 남겼는가? 내가 보아도 그 친구는 남겨둔 게 아무 것도 없다. 상처뿐이다. 폐암
3기이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내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죽을병에 걸려 이승과 이별의 순간 누구나 다
하던 말들이다. 입원해 있으면 수없이 들어온 소리다.
“내 병명을 아내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
죽어가는 사람이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아 아내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2014년 12월 29일, 전북대학병원 호흡기내과로 원외처방을 받고 병실에
입원한 뒤 바로 나에게 전화가 왔었다. 나 역시 예수원병 내분비내과 당뇨조절이 되지 않아 2014년 12월 26일에 입원하였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빨리 치료하고 나아서 맛있는 것 사먹자고 호탕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3번의 전화를 한 것이 H와의 통화였다. 그러니까
36시간이 지난 지금, 가버린 친구의 호탕한 목소리만이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굳이 알려고 한다. 왜 그럴까? 내가 한참 일할 때 자기는 무엇을 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도 물러나 선량한 시민으로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친구를 하루
아침에 보내고 나니 모든 세상살이가 욕심이요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것 하나 몸에 지니고 가는 게 없다. 무겁고 가벼운 짐들을
누구에게 쓰라고 다 내려놓고 가는지! 나도 모르지만 가는 길을 위하여 남기지 않고 미리 미리 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나는 여러
친구들을 먼 세상으로 보냈다. 그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에 며칠간씩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유달리 정이 가는 친구가 가고난 뒤 병원에
입원할 때도 있다. 고엽제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질병일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죽었다고 보훈청에 연락하면 염하는 대형 태극기
하나를 보내준다. 그것이 마지막 가는 길에 조국이 안겨주는 유일한 유품으로 오늘도 내일도 고엽제환자들이 다 떠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 봐주며
순번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갑 질들은 있어도 을에 대한 국가의 배려는 돌아오는 해에도 없을 것이다. 친구의 장지는 국가유공자묘역인 대전
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 같은 현충원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 세상은 어떤 이슈도 3일을 가다려 주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같은 엄청난 국가적 재난인데도 3개월이 지난 지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든 사회는 물론 그렇게도 짖어대던 TV나 언론 그 누구도 잊어버린 듯
지금은 적막감마저 들게 한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야. 그런 것이 세상살이인 거야.' 추운거리를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하는 노부부의 말이
내 귀를 스친다. 복바쳐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한참 서서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두들 잊어버린다. 친구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북대학교 암 병동에서 익산 원광대학교 암 병동으로 가고 싶다고 하여 119응급차를 불러서 가는 도중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너무도 편안하게 숨을 거두어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장례식장에까지 도착하여 남편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한없이 눈물이 났다.
"자네 곁으로 갈 때 자네처럼 나도 잠자는 것같이 포근하게 아내
품에 안겨 갈려고 노력할 것이네. 마지막 떠나는 자네 영정사진을 촬영한 것이 너무도 다행일세. 그때 촬영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했겠나?"
다행히 영정사진을 걸어놓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맞이하는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잘 가게나. 편히 쉬게나. 친구!"
(2015.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