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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때, 왕족으로 '단산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별다른 재주는 없었으나, 옥퉁소를 부는 실력만큼은 전국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런 단산수가 한 번은 볼일이 생겨 괴나리 봇짐 속에 옥퉁소를 챙겨서 황해도를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곡산 땅의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그런 산 속에 객주가 있을리는 만무하고 그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산속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도적떼가 나타나서 그를 에워쌌다.
단산수는 겁은 났으나, 수중에 가진 것이라곤 옥퉁소 하나 뿐이라서 도적에게 큰 해를 입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도적들은 단산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어느 순간에 몇 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사지를 꽁꽁 묶는 것이었다.
단산수가 호통을 쳤다.
이놈들, 도적질을 하려면 곱게 할 것이지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사람은 왜 묶는 것이냐?
정히 재물이 탐난다면 이 보퉁이라도 가져가고 어서 나를 썩 풀어 주거라!
그러자, 도적떼들이 아니꼽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쳇, 너도 양반이랍시고 제법 큰소리는 친다마는 우리 눈에는 무서워서 벌벌떠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네놈은 우릴 보통 도적떼로 보는 모양인데, 우린 재물이 탐나서 도적질을 하는게 아니라, 바로 너같은 양반 쪼가리들을 벌주는 협객님들이다, 이말이다.
단산수는 '자빠진 강아지가 앙탈떨듯 깨갱거렸지만 별 수 없이 도적들에게 굴비처럼 엮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곤 도적떼들은 까만 천으로 단산수의 눈을 가리더니 어디론가 한참을 끌고 갔다.
그러더니, 어느 한 곳에 이르자 도적떼들은 눈 가리개를 벗겼는데, 그 곳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널따란 산골짜기에 큰 움막과 통나무로 집들을 수 백 채나 지어놓고, 수천 명에 달하는 도적들과 그들이 지닌 창과 칼이 여기 저기서 번쩍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는 붉은 관을 머리에 쓰고 비단도포를 몸에 걸친 사람이 우람한 체구에 커다란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적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너는 어디에 사는 누구냐?
예, 나는 한양 땅에 사는 단산수라는 사람입니다.
단산수의 이름을 들은 우두머리는 깜짝 놀라며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 네 이름이 진짜로 단산수란 말이지?
예, 틀림없이 제가 단산수입니다.
그러니까, 옥퉁소를 그렇게 잘 분다는 단산수가 바로 너란 말이냐?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옥퉁소를 불 수 있겠느냐?
단산수가 괴나리 봇짐에서 옥퉁소 꺼내면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예. 전 언제나 옥퉁소를 몸에 지니고 다녀서 한 곡조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우두머리는 부하들에게 술상을 차려오라고 명령하였다.
술상이 올라오자, 우두머리는 직접 단산수에게 술을 따라 권하며 사과했다.
이렇게 푸대접을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양반이기 때문에 부하들이 저지른 행동이었으니, 넓게 이해를 하고 기분도
풀 겸, 옥퉁소나 한 곡조 불어 주게나!
그러자, 단산수는 지체없이 옥퉁소를 눈을 지그시 감고 불기 시작했는데, 마침 구름속에 숨어있던 달까지 구름을 뚫고 살짝나와 마치 단산수의 신기에 가까운 옥퉁소 연주를 지켜보는 듯 하였다.
단상수는 '강남 회상곡'을 연주했는데,
그 애절한 피리소리는 흡사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도 하고, 달빛에 일렁이며 소리없이 내려앉는 이슬 방울이 은쟁반 위에 떨어져 굴르듯 청아한 소리로 산채의 모든 도적떼들을 휘돌아 어루만지듯 하여, 수천 명의 도적들은 갑자기 처연한 분위기에 모두들 고개를 떨구어 애처롭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곡이 끝나자, 여기 저기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 졌다.
와!~ 정말 잘 분다.
내 일찌기 저와 비슷한 소리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제발 소원이니, 한 곡조만 더 불어 주시오.
단산수는 이런 청을 거절하지 않고 이번엔 청춘 상사곡'을 불었다.
그러자, 온 산채가 도적들의 흐느낌 소리로 들썩였다.
이 때에 우두머리가 감았던 눈을 지그시 다시 뜨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부터 전쟁터에서 옥퉁소를 불어 적군의 사기를 떨어지게 한다더니, 과연 그 말이 허황되지 않았음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도다,..
혼잣말 처럼 지껄이던 우두머리가 갑자기 단산수를 노려보며 크게 호통을 쳤다.
너는 과연 옥퉁소로서는 천하에 제일이다마는 이제 여기서는 더이상 옥퉁소를 불지 않도록 해라.
만약 여기서 또 한 번만 옥퉁소소리를 낸다면 부하들이 고향생각을 하고 도망치는 일도 생길 수 있으니, 빨리 옥퉁소를 괴나리 봇짐에 넣고 이 산을 속히 떠나도록 하거라!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황해도의 깊은 골짜기에는 임꺽정이란 사람이 많은 양반들을 호령하면서 살고 있더라고 전파하도록 해라.
이 말을 들은 단산수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임꺽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
끝
그래서, 뭐든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고 특기를 살리라고 난리를 치나 보네요.
하기야, 옛말에도 '열 두가지 재주가진 사람이 조석간 데가 없다'--조석(아침. 저녁간 곳이 없다니까, 밥 굶는다는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