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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제22대 정조(이산)의 여자들 ㅡ
효의왕후 김씨!
후궁 4, 자녀 2남 2녀
정조!
조선왕조에서 가장 태평성세를 이룬 왕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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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이라고 하면 답이 아니다.^^
정조라고 해야 한다.
조선왕조의 피크, 르네상스 시기였다.
세종대왕 시절에는 안팎으로 우환이 많았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도 만들고 문화적으로 과학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태평성세는 영조가 52년 동안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여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주었고 정조는 왕도정치를 잘 펴서 나라가 평온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과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정조가 나이 11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목격했다.
노론 벽파가 주동이 되어서...
정조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래서 왕으로 즉위해서 첫 일성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듣는 노론들,
얼마나 뜨끔했겠는가?^^
그러나 탕평책으로 균형잡힌 정치를 해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문화사업을 많이 했다.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이 많은 서적들을 발간하였고 청나라 선진문물도 받아들였다.
특히 서얼차별을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하였다.
그래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 북학파들이 규장각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휴머니스트 왕이셨다.
조선의 중흥을 위해 탕평책으로 인재를 등용하고, 초계문신제로 실력있는 젊은 관료들을 양성했다. 또한 백성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신해통공을 발표한다.
금난전권 폐지를 통하여...
지금으로 말하면 독과점 금지법이다.^^
*금난전권 : 시전상인이 난전상인을 단속하는 것으로 사업장 등록한 상인들이 길거리 난상들을 단속하는 권한.
예로, 일요시장이나 길거리 상인들은 난전이다.^^
이산!
정조의 이름이다.
드라마, 영화로 나왔다고 한다.
참 좋은 애민군주였는데
하늘이 뭐가 그리 급했는지 49세에 데리고 가버렸다. ㅠㅠ
아쉽다!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
정조의 유일한 본부인이시다!^^♡
영조 29년(1753년) 음력 12월에 청풍 김씨 김시묵과 남양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살이 되던 1762년(영조 38년)에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1살 연상의 왕세손 이산과 가례를 올렸다.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윤득양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최종적으로는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가 세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한다.
영조는 그녀의 본관이 청풍 김씨 출신이며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청풍 김씨(제 18대 현종의 비)가 아버지인 숙종을 낳았듯이, 그녀도 정조의 아내로서 적법한 후손을 낳아주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인한 지 4개월 만인 윤5월 21일,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때 그녀는 왕세손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이거 시집 잘못 온 거 아녀?"
야사에 의하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다고 한다. 아마도 쬐끔 곰보였을 것이다.
많았다면 어찌 세자빈으로...
1776년 남편인 정조가 즉위하자 세손빈에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자신의 도리를 잘 해내 칭송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후사를 낳지 못해서 1790년에 수빈 박씨가 정조의 아들 순조를 낳자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키웠다.
세손빈 시절부터 임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1787년에 상상임신을 해서 산실청까지 세워진 적도 있다 하니, 불임으로 인한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사실 무자식 상팔자인데...^^)
성격이 온후하였고,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벌레를 밟을까봐 함부로 풀을 밟는 것도 자제했을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진다.
ㅎㅎ
리크라테스도 풀 밟을 때 조심한다.
비암이 나올까봐...^^
효심이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시할아버지인 영조는 물론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영조 역시 손자며느리인 효의왕후를 총애했다.
시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텼으며 화완옹주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ㅎㅎ
인자무적이다!
또한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수라상을 올릴 때는 자신이 직접 반찬의 맛을 보고 올렸다고 한다. 검소한 걸로도 유명했다.
수진궁이나 어의궁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으면 친정에 보내는 왕비들도 많았는데, 효의왕후는 이 재물을 공물로 생각하고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공사구분이 명확하셨다.^^
그 시대 이상적인 여성상에 맞추어 항상 정조를 조용히 내조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나선 일은 딱 한 번 있었다.
정조가 총애한 신하인 홍국영과 대립한 일이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이가 원빈 홍씨였다. 홍국영은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참 눈에 뭔가 안 보였나보다. ㅠㅠ
그러나 우리의 현명하신 정조께옵서는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 왕비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효의왕후를 모함한 홍국영을 귀양 보냈다.
하긴 홍국영이 정조를 좀 도와주었다고 너무 나갔다.
'실세도 언젠가는 허세가 된다'는 것을 알았어야지...^^
조선왕조에서 드물게 후궁이지만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무품빈으로 입궁한 경우가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정조의 후궁들인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다.
그 이유인즉슨 다른 왕들이야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거나 궁녀에게 성은을 내려 후사를 이었지만,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에게서 자식이 없는데다 궁녀들을 가까이 하는 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학문에 취미가 대단하셨다.
그래서 여자를 탐하지 않으셨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무신...^^
그리고 공부에 최대의 장애물은 잡생각(?)이다.
잡생각?
다 알게다.^^
이 때문에 정조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이 다 되어 가도록 자식이 없었고, 당시 왕대비였던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명문가의 규수 중에서 후궁을 간택하게 된다.
암, 후사는 이어야지!
못 이기는 척 하고...^^♡
첫 번째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와의 사이는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원빈 홍씨(숙창궁)의 조현례 과정을 그린 《숙창궁입궐일기》에 의하면, 효의왕후는 유월의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인사 받기를 며칠이나 미룬다.
또, 원빈 홍씨의 오라비인 홍국영과 효의왕후의 갈등은 야사로 잘 알려져 있다.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자 2번째로 간택된 후궁 화빈 윤씨와의 사이는 기록된 바 없지만, <이재난고>의 내용을 보아 자신을 심하게 질투하는 후궁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정조의 3번째 후궁이자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후궁 의빈 성씨와의 사이는 꽤 각별했던 것 같다. 효의왕후와 의빈은 1753년(계유년) 동갑내기인데다, 입궁 시기도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같다.
남편 정조는 15살 때부터 의빈 성씨(당시 나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조가 직접 쓴 의빈 성씨의 어제묘지명에 따르면, 처음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가 아직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또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정조가 앞으로는 효의왕후 처소에 자주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참 보기 드믄 아름다운 모습이다.^^
정조의 4번째(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 역시 효의왕후 등 윗전을 잘 공경하였다고 한다. 효의왕후와 화빈 윤씨, 수빈 박씨 이 세 여인은 정조 사후에도 약 20년을 더 살았고, 약 60세 정도에 1~2년 간격으로 효의왕후, 수빈, 화빈 순으로 졸하였다.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를 받으며 지내다 1821년 창경궁 자경전에서 숨졌다.
향년 69세. 사후에 '예경자수'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시호를 효의(孝懿)로 정하였다.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 남편과 함께...
보기 드믄 현숙한 왕비였다.
그래서 부창부수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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