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찢은 여자
최화경
여자는 유년의 내 이모들을 소환하며 한없는 정다움으로 푸근하다. 아마, 여자가 쓰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지방 사투리 억양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이모들은 한결같이 여자와 같은 사투리를 썼던 것 같은데, 남원 주변 여러 면으로 출가한 이모들의 말씨가 지금 여자의 억양과 똑같았다. 여자는 고향 특산물인 감자처럼 포근포근 부서지는 그 무해한 색깔과 맛처럼 모난 데 없고 원만하다. 어느 문학회 행사든 여자가 보이지 않으면 허전하고 기댈 데 없는 노인처럼 불안하다. 여자는 변덕이 없고 성정이 고지식할 만큼 선하다.
얼마 전 작은 모임에서의 일이다. 여자가 커피 테이크 아웃을 위해 지갑을 들고 급히 나갔다. 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늦는다 싶어 일행 중 한 사람이 커피 솝에 가 봤더니 지갑의 지퍼가 고장 나, 커피값을 결재하지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다음에 사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결재할 수 없음을 안타깝고 민망해하며 결국 지갑을 찢어 카드를 꺼냈다. 딸이 사준 애지중지하던 지갑을 찢으면서까지 남에게 신의를 지킨 여자는, 커피를 사기로 한 약속이 당연하다는 듯 담담했다. 그 후로 여자의 별명은 지갑을 찢은 여자가 됐다. 여자는 적잖은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행사든 모임이든 궂은일을 끝까지 남아 마무리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이 힘겨울 때, 여자의 기독교적 귀감을 보면 교회에 가서 같이 어울리면 마음에 평화를 얻을 것도 같았다.
여자의 수필은 그 나이에 쓸법한 신변잡기는 없다. 시사성과 오피니언적 메시지가 야무진, 묵직하고 고급한 글들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글에서 행주 냄새가 안 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단호함은 정답고 푸근한 여자의 가장 낯선 모습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일침을 가하는 따끔함이라니. 높은 목소리로 덤비는 내겐 항상 경이로운 여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자가 얼마 전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여자의 부재는 기댈 벽이 없어진 듯 정처 없었고, 안전벨트가 끊어진 듯 허허롭고 아득했다. 여자에 대한 내 노심초사에 나도 깜짝 놀랐다. 여자가 퇴원했을 때 쑥국을 같이 먹었다. 문득, 된장의 물리지 않는 담백함과 쑥의 향기가 꼭 여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나미란 프랑스어가 있다. 나의 다정한 벗이라는 뜻인데 나이와 상관없이 모나미의 관계는 언제나 유쾌하고 편안하다. 여자는 또 다른 나의 모나미가 분명하다.
첫댓글 그여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았네요 이름부터가 순박하고 소박하고 정감이 가는 여자....첫사랑 처럼 아련하고 그리운 여자 우울할때 기대고 싶은 여자...
언제부터 지갑을 찢은 여자가 되었나요 제목만 보면
한 성깔 하는 여자같은데 뒷통수를 한대 맞은거 같아요 ㅎㅎㅎ 화경씨는 항상 제목이 기발 합디다요
화경씨만의 독특한 언어로 담백하고 깔끔한 글 좋았습니다
제목이, 안 읽을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네요.
<된장의 물리지 않는 담백함과 쑥의 향기를 닮은 여자>라니. . . . .
이런 문장을 끌어내는 작가의 안목도 담백하고 쑥향이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