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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4)
복음을 맡은 청지기,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
(참고: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요 14:6
I. 서론
오늘 설교는 지난 주일 설교와 연관이 조금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들으신 분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주제는 “영역 주권” 이었습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영역 주권은 교회 안이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들의 삶의 영역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밖의 (혹은 그리스도인의 가정 밖의) 세상은 불신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인데, 어떻게 그런 영역에까지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다룰 책은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입니다. 이 책이 우리가 방금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과학 이성과 다원주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인 이유, 그리고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전파. 이렇게 네 가지 소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첫째, 저자 소개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igin)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선교학자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선교에 관심이 있거나 기독교 서적을 읽어보신 분들은 여기저기서 언급이 되는 분이기 때문에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1909년 영국, 뉴캐슬에서 태어나서 캠브리지 대학을 다니던 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스코틀랜드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 받아 인도에서 30년 이상 선교사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뉴비긴 선교사님이 유명해진 이유는 인도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한 다음에 발생했습니다. 뉴비긴 선교사님이 인도에서 영국으로 선교 사역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영국 사회가 예전과 달라져 있었습니다.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한 나라가 선교를 다시 받아야 할 선교지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뉴비긴 선교사님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영국 사회가 “과학 이성,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과학 이성과 종교 다원주의
1) 과학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
영국 사회가 과학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했다는 것은 과학 이성이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학 이성의 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 구절이 과학 이성적 사고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뉴비긴 선교사님은 이에 대한 예로, 자신이 인도 선교사로 활동하던 초창기에 겪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선교사님은 매주 하루, 저녁 시간을 내어 동네에 있던 라마크리슈나(인도 종교 사상가) 포교원에서 운영하는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들과 함께 우파니샤드(고대 인도 철학 경전)와 복음서들을 공부했었습니다. 그 포교원의 특징은 수도원마다 큰 강당에다가 인류의 주요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예수님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초상화 앞에서 예배 의식이 거행되곤 했습니다. 해외 선교사가 보기에, 그것은 인도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는 표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힌두교 세계관에 끼워 맞추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도 우리 모두가 갇혀 있는 존재의 수레바퀴, 곧 카르마(업)와 삼사라(윤회)의 끝없는 순환에 걸려 있는 한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도의 힌두교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신앙의 틀 안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뉴비긴 선교사님은 이런 예를 들면서, 서구 사회가 과학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맞지 않는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이성에 맞지 않는 성경 말씀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Timothy Keller 목사님은 그의 책, <The Reason for God>에서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한국어로는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로 번역된 책입니다. 그 부분을 제가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말 속에 숨은 또 다른 전제는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기적의 가능성을 따지는 논의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모든 걸 지었다면, 원할 때마다 그 뜻대로 창조세계의 일부를 조금씩 바꾸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우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점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데,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신앙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논증을 통해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학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판단할 수 없고, 과학 이성으로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이것이 도리어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2) 종교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뉴비긴 선교사님은 다원주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영국이 다원적 사회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여러 인종적 배경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공적인 삶에 동참하고 있다. 다원주의 내에서도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 다원주의는 한 사회 안에서 다양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환영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 태도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화적 다원주의는 좋은 것입니다.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틀린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보고, 단조로운 사회를 더 풍요로운 사회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코로나 상황으로 우리 교회가 친교시간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전 친교 시간에 매주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 오신 교수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일 샐러드를 보면, 딸기, 포도, 블루베리 등 각종 과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과일을 먹을 때, 한 가지 과일만 먹는 것보다 영양가도 더 높고, 맛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적 다원주의에 이런 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다원주의는 어떨까요? 종교적 다원주의의 특징에 대한 뉴비긴 선교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다원주의 사회는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믿기 때문에, 복음이 ‘유일한 진리’일 수 없다. 글쎄 ‘너에게는 진리’일지 모르나, 만인에게 진리일 수는 없다. 만인에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교만이다. 그래서 여럿 가운데 하나의 의견으로만 받아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종교적 다원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의 복음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일까요?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가진 복음을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면, 정말 교만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대상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에게는 “왜 기독교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인가”하는 내용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분에게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참고로 하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후자에 중점을 두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질문에 대한 설명은 조금 나오고, 둘째 질문에 대한 설명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을 해드리고,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뉴비긴 선교사님의 설명을 위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 셋째, 기독교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인 이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 CS 루이스 교수님의 <순전한 기독교>를 기본적으로 추천해 드립니다. 이 두 권의 책은 제가 여러분에게 몇 차례 말씀을 드린 책이고, 웬만한 교회의 대학부에서는 신입생 때 읽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안 읽으신 분은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앞에서 잠깐 언급해 드린, Timothy Keller 목사님의 책, <The Reason for God>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서적을 조금 더 읽기를 원하시는 분은 같은 목사님의 책 <Encounters with Jesus>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어로는 <예수를 만나다>로 번역된 책인데, 켈러 목사님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뉴욕 하버드 클럽에서 한 강연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두 책에 있는 내용 중, “기독교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인 이유”와 관련된 내용을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켈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을 건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고, 내가 믿는 복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건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켈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면,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분이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쓸 게 뭐 있겠습니까? 모든 걸 가름할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과연 죽음에서 부활했느냐의 여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혹은 믿을만한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뉴비긴 선교사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책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뉴비긴 선교사님은 세계 종교를 역사적 종교와 비역사적 종교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역사적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처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명시할 수 있는, 과거의 사건들에 기대고 있는 종교를 말한다. 비역사적 종교는 석가나 구루 나낙(인도의 종교가, 시크교 창시자)과 같은 창시자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과거의 특정한 사건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종교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는 석가가 그것을 발견해서 반포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불교도는 진리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만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면,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가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인 예수님께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분이 하신 말씀도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비역사적 종교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종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그 종교가 달라집니다. 유대교는 아직까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고,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선지자 즉,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믿어야 할까요?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부분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흥미롭습니다. 길, 진리, 생명 앞에 정관사 “헤 (ἡ)”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께(쉬운 말로, 천국에) 갈 수 없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반대되는 말은(쉬운 말로, 다른 종교 교리는)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쉬운 말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종교적 다원주의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역하셨던 존 던컨(John Duncan)이라는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기꾼이었거나, 망상에 빠져있었거나, 아니면 정말로 신이었거나, 셋 중의 하나다.” 이것을 던컨 목사님은 트릴레마 (trilemma)라고 불렀습니다. 3가지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예수님은 좋은 선생이거나 위대한 종교지도자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자기 주장이 참임이 증명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켈러 목사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건전한 이유 네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1) 최초 목격자들: “복음서들은 저마다 부활의 첫 증인들은 여성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다. 첫 목격자들이 모조리 여성들이었다고 주장해 봐야, 교회에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증언의 신뢰성만 떨어트릴 따름이다. 정말 그랬다는 것 말고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증인들이 여성이었다고 기술할 이유가 없다.”
2) 육체적 부활: “NT 라이트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비유대교 사상들을 두루 연구해,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세계관으로는 육신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어째서일까? 그리스-로마 사상 체계는 마음과 영혼은 선한 반면, 육신과 물질계는 연약하고 부패했으며 불결하다고 본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는 늘 엉망징창으로, 몸에서 해방되는 걸 구원으로 여겼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이들에게 부활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눈꼽만큼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현대 세계관으로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육체적 부활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조작하려고 했다면, 그런 내용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다는 것 말고는 기술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의 음모: “제자들이 예수님을 시신을 몰래 빼돌린 뒤, 남들한테는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상 모든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뒷받침할 뜻으로 이처럼 강력한 자기 희생을 감수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정말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제자들의 순교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예배함: “유대인들은 유일하고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다. 유대인들에게 인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신성모독이었다. 그런데도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을 헤아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어떤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팀 켈러 목사님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전파
이 부분은 오늘 우리가 참고하고 있는 책,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그리스도인의 책임, 그리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 전파.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 하나님의 방법
뉴비긴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선택의 교리만큼 심한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자를 선택하신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모세를 선택하셨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것이다. (Open Secret)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만 남겨 놓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을 의도했다면, 책을 쓰셨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수중에 코란과 같은 경전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이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할 한 공동체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가 그분이 남긴 유산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할 한 공동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책임
뉴비긴 목사님은 그의 책 <Open Secre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와 복음의 관계를 묘사하는 가장 일반적인 은유는 교회가 복음의 청지기라는 것이다.” 영어 원문에는 뉴비긴 선교사님이 “Stewardship”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Steward”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Steward와 Stewardess 를 만나게 됩니다. Steward 가 비행기 안에서 많은 일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의 주 업무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비행기 안이 좁고, 비행기가 흔들리기 때문에, Steward 나 Stewardess 가 항공사에서 준비한 음식을 승객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은 기본적으로 Steward를 위해 비행기에 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어야 하니까,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 음식을 사용하겠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 것입니다. 우리와 비행기를 타는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올랜도에서 런던으로 여행을 할 때, 우리가 비행기를 탄 목적은 런던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Steward 의 목적은 런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들을 섬기기 위해서 비행기를 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Steward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만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Steward 들이 비행기 안에 실은 음식을 자기들만 먹고,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로 안 되는 소리지요. 상상도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먼저 받은 복음을 잘 나누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만 간직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3)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전파
그렇다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을 맡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지 이 복음이 믿을만한 메시지로 들릴 수 있을까요? 뉴비긴 선교사님의 설명입니다. “나의 주장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대답이라는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을 따라 사는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믿을만한 내용임을 말해주는 단 하나뿐인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복음이 믿을만한 메시지인지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짜인데, 우리가 가짜이면, 우리를 때문에 예수님도 가짜로 인식되고 마는 것입니다. 올해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우리 자신을 뒤돌아 봅시다.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거하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우리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가려졌습니까?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보여 줄 수 있는가? 당신은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또한 당신은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황금틀이냐 아니면 평범한 나무틀이냐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그분이 관심이 있는 것은 당신이 비어 있는 틀이냐는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비울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자리하실 것이고, 그때에야 사람들은 당신을 볼 때,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대강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우리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가 다원주의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으려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비워서,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참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