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40
박현령 시인
박현령 시인은 ‘어머님’의 작은 일상이나 행적도 그의 시에서는 크게 머물고 있으며 깊이 형상화하는 특성적인 화법이 상존한다. 이는 그의 단순한 관념에서 힉득한 함축이 아니라, ‘어머님’ 사후(死後)의 미미한 상황도 놓치지 않고 여과해서 달관이나 해탈의 관조자로서 고조된 애환이며 정감이며 동시에 인간이 공유한 ‘죽음’을 대칭으로 하여 저쪽(저승)과 현세(이승)의 절박한 교감이 순박한 어휘력을 동반하고 있다.
박현령(朴賢玲) 시인이 출간한 시집『신사모곡』에 대한 서평을 써서 1998년 10월호『심상』지에 게재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문협 행사때나 문협 사무실에서 였지만 그가 KBS라디오 PD로 활약할 당시 그가 진행하던 ‘내 마음의 시’에 내가 출연하면서 더욱 그와 친근하게 지냈다.
네가 예총에 근무할 때 부군인 허 규 선생이 한국연극협회 소속으로 예총회관을 자주 들렸고 허 규 선생이 국립극장장으로 재임하면서 박현령 시인은 문예진흥원과 예총에 발걸음이 잦았다.
박현령 시인은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8년『여원』지에 시 「산 위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대뷔하여 <여류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시집『상사초(相思抄)』『오소서 이 햇빛 속으로』『신사모곡』『地神님, 地神님』과 작품집『살아있음을 큰 소리로 외쳐라』『대청마루에 북을 두고』『생명강의』『내 마음의 시』 등 많은 저서를 가졌다.
그의 시세계는 새로운 서정을 위한 모색과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현대시가 담아야 할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 시를 위하여’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노력을 해온 우리나라 문학의 발전과 독자들의 저변확대를 위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자임하기도 해다.
이러한 문학적 공로가 인정되어 경희문학상과 윤동주문학상,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그리고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가 수여하는 저작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집 『地神님, 地神님』서문에서 ‘지난 수년간 나는 매스미디어의 한 코너에서 일해 오면서 메스미디어와 시와의 접속을 꽤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음악과 시를 접속, 청각매체인 라디오를 통해서 시의 특성을 보다 극대화시키고 시인의 가슴속에 담긴 메시지를 청취자의 귓가에 전달하려는 노력을 해왔다.’는 어조로 문학, 특히 시와의 독자들과의 공감 확대를 위해서 심형을 기우리고 있었다.
그는 5년간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거나 방송 작가로서 방송할 내용을 집필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우었다. 그는 이때 낭송(시인들이 자작시 한 편을 선별하면 박현령 시인이 간단한 주석을 붙이고 진행 아나운서나 성우가 해설을 하고 시인 본인이 직접 낭독하였음)된 작품들은 묶어서『내 마음의 시』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나는 매일 한 사람의 연인을, 수 많은 독자 앞에 내세우는 일을 해왔습니다. 시인은 시를 낭송하고 시를 해설하고 시작과정의 고뇌와 희열을 나누면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허공으로 흘러가버린 시인의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 모아 보는 일, 다시 시인의 육성을 떠올리게 하는 일을 하듯이 한 권의 애송시들을 묶었습니다.
이 책 ‘엮고나서’에서 그 경위를 ‘한 사람의 연인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위 같이 토로했다. 그동안 전파로 흘러 보냈던 시들을 한 자리에 모으니 훌륭한 한 권의 합동시집이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나는 그때 이 프로에 출연해서 나의 시「서울허수아비」를 낭독하고 배우 송승환 씨와 대담을 해서 내가 문단에 입문한 이후 최초로 방송매체에 나의 음성을 띄워 보냈다.
바람 부는 날은 풀잎을 닮아서 나의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하늬바람에도 온몸으로 웅성대던 어린 적 대숲으로 가보면 게딱지 초가지붕 위로 너울대던 저녁연기가 따스한 한 폭의 정경으로 채색되어 내가 자라서도 남아 있기를 염원하던 동심을 청솔밭에 묻어둔 채 시를 쓰는 일은 조그마한 향수에서 출발한다.
나는 이렇게 시를 쓰고 시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방송이 끝나자 바깥에서 지켜보던 박현령 시인의 ‘잘 했다’는 격려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이후 박현령 시인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부군과 함께 원서동 북촌마을에 옛집을 개축해서 ‘북촌창우극장’을 개설하고 많은 연극인들에게 공연장을 제공하고 공연예술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후 그의 부군인 허 규 선생이 타계하고 그를 기리는 ‘허 규 연극상’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우수 연극인들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어서 많은 연극인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는 다시 고인 허 규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허규의 마당놀이』를 발간하고 한국 예술문화계에 관심을 집중시킨 바가 있다.
마당극, 축제, 창극의 개척자인 허규의 놀이마당을 살펴보는 책.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관련 글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묶은 것이다. 허규가 생전에 힘을 기울이던 '배우술'과 '연출노트'를 찾아내어 한 파트로 묶고, 학자들이 집필한 '허규론'을 재수록하였다. 또한 그동안 그가 해온 작업들을 분석하고 정리한 언론인들의 글을 함께 담았다.
거기에는 위와 같이 마당극뿐만 아니라, 축제와 창극 등 우리 한국의 연희(演戱)를 총망라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배우술과 연출노트가 곁들여졌으며 사회 학자나 저명 인사들이 집필한 허규론을 수록해서 그의 생애와 연극인의 업적을 조망할 수 있는 교재의 역할을 지금도 연극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 내 혼을 적어넣는 빈 가계부 / 내 삶의 간이역 / 내 꿈밭의 한 이랑이랑을 / 잉크가 말라버린 헌 연필로 / 간추려 본다 / 아, 언제나 / 행복과 희망과 사랑은 적자 / 안개 속같이 혼탁한 미래 속에서도 / 살아서 현현해 오는 / 과거만이 흑자 투성이. / 오늘과 내일과 어제의 삶들은 / 밤낮 없이 광분하고 갈등하며 / 내 혼의 가계부, 그 속에 침몰하며 / 빨간 선을 뛰어넘어 / 까만 선을 뛰어넘어 / 내 꿈밭의 한 이랑 한 이랑을 / 춤추고 놀아나며 / 날 사로잡으려 한다.
그는 시집 『地神님, 地神님』에 수록된 작품「미학을 위하여 3」전문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내 꿈밭’에 관한 시적 진실을 그의 심연(深淵)에서 퍼올리고 있다. ‘나’에 대해서 현실과 이상이 교차하는 갈등과 고뇌를 화해시키는 적절한 해법을 탐색하는 그의 정서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 이게 한다.
그는 이처럼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곧 생멸(生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시세계를 확고하게 또는 명징(明澄)하게 구축하려는 열정을 이해하게 된다. ‘영혼이 육체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승에서 삶은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를 우리는 가끔 잊고 살고 있다. 이승에서 비록 증오하고 원수처럼 살아간다 해도 육체의 옷을 입고 교감하며 이 하늘 밑과 땅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일까’라는 지론을 그는 우리 후박들에게 오늘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