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제131차 강원도 답사 2010년 8월 28일(맑음 뒤 약간의 비)
07시00 익산시청 앞 출발→김밥으로 아침식사→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청령포→동강 래프팅 →동강생태정보센터→영월에서 불고기로 저녁식사→시간 관계로 관풍헌은 취소→창 펜션 숙박→8월 29일 08시 다슬기탕 아침식사→고씨굴→김삿갓 유적지와 무덤→점심 곤드레밥→김삿갓문학관→조선민화박물관→장릉 →갑자기 폭우관계로 선돌은 돌아보지 못하고 답사를 마쳤다. 모든 회원님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익산에 도착 생선탕으로 저녁을 나누고 9월 답사에 다시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참석자 33명.
선암마을[仙巖─]. 한반도 지형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韓半島面) 옹정리에 있는 강변마을. 서강(西江)의 샛강인 평창강(平昌江) 끝머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를 꼭 빼닮은 절벽지역인 한반도지형이 있어 유명해졌다. 선암마을에는 고려 때 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한때는 역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평창강은 길지 않지만 유로연장(流路延長)이 220km가 될 만큼 심하게 곡류하며, 주천강(酒泉江)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치면서 동고서저(東高西低) 경사까지 한반도를 닮은 특이한 구조의 절벽지역을 만들어냈다.
오간재 전망대에서 남산재 쪽을 바라보면, 한반도를 빼닮은 절벽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오간재는 이 절벽지역을 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알린 이종만의 이름을 따서 종만봉이라고도 부른다. 절벽지역은 동쪽으로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고 서쪽에는 서해처럼 넓은 모래사장도 있으며, 동쪽으로는 울릉도와 독도를 닮은 듯한 작은 바위도 있다.
영월 청령포[寧越淸泠浦] 명승 제50호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있는 명승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있다. 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관음송(천연기념물 349)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은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청령포 관음송[淸泠浦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
나무의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이다. 지상 1.2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져 동서로 약간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각각 3.3m, 2.95m이며, 수관 폭은 동서 23.3m, 남북 20m이며,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지역인 영월군 남면의 강 가운데 고립된 작은 섬의 소나무숲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나무는 조선조 단종(端宗:1441∼57)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소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걸터앉아서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강[東江] 래프팅 길이 약65㎞
강원도 정선군과 영월군 영월읍 일대를 흐르는 강.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1,563m)에서 발원하는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를 흐르는 조양강(朝陽江)이 합류하여 흐르는 동강은 완택산(完澤山:916m)과 곰봉(1,015m) 사이의 산간지대를 감입곡류하며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下松里)에서 서강(西江) 만나 남한강 상류로 흘러든다.
유역은 4억 5000만 년 전에 융기되어 형성된 석회암층 지역으로, 약 2억 년 전에 단층운동과 습곡운동의 영향으로 현재의 지형이 형성되었고, 현재도 하천운동으로 인한 퇴적작용과 침식작용 등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또 동강 유역에는 지표운동과 지하수·석회수의 용식작용 등으로 인해 많은 동굴이 형성되었는데, 2002년 현재까지 보고된 동굴만도 256개나 된다. 그 가운데 백룡동굴(白龍洞窟)은 천연기념물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험이 없으시다면 안전한 동강에서 래프팅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심한 급류가 없어서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으며 특히나 동강 주변으로는 차로 다닐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을 많이 지나가게 된다. 자연 그대로의 경치가 매우 좋다. 어른이나 아이들이 즐길만한 여울이 있으니 가족단위로 가면 동강이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동강생태정보센터
영월 고씨굴[寧越高氏窟] 천연기념물 제219호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金-面) 진별리(津別里)에 있는 석회암 동굴.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48만 762㎡, 길이 약 6km의 동굴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 싸운 고씨(高氏) 가족들이 한때 그곳에 피신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굴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약 4억 년 전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굴 안에는 4개의 호수를 비롯하여 3개의 폭포, 10개의 광장 등이 있으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종유석·석순·석주들이 조화있게 배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동굴 안의 기온은 항상 16℃를 유지하며, 박쥐·흰새우·흰지네 등 동굴동물이 서식하고 그 밖에 신속(新屬) 1, 신종(新種) 7, 신아종(新亞種) 7의 동물이 새로 판명되었다.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1807년 ~ 1863년)은 조선 후기의 풍자·방랑 시인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가문인 김안근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5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원래 咸興 中軍(함흥군관)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 되었다. 신임지에 와서 몇 달 동안 어수선한 일을 대충 정돈하고 겨우 한가한 틈을 얻어 숨을 돌리고 그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글도 짓고 술도 마시며 수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돌연히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술에 취해 있는 防禦使(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안비막개(眼鼻莫開)로 항복하라 다그치니 갑자기 이런 지경을 당해서 얼떨결에 항복을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가문이 몰락되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함에 따라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가문에서 종노릇을 하던 사람의 집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3형제를 키워냈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가 나오자 그는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 형식의 내용을 쓴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자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 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유랑 도중 집 안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그 때의 시제(詩題)가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 였는데, 그는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백 번을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하는 시를 쓰게 된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체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아들 익균을 만나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그 곳에서 죽었는데 아들 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그 곳에서 안장되었다.
김삿갓 묘[金炳淵 墓]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이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으로 김삿갓이라는 속칭으로 더 잘 알려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묘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마을에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 잡고 있는 김삿갓묘는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이다. 작은 봉분을 갖춘 묘 앞으로는 자연석으로 만든 상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역 앞에는 시비(詩碑)가 서 있다. 김삿갓묘 아래쪽 평지에는 2003년 10월 개관한 난고김삿갓문학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는 김병연의 생가터가 있다.
김삿갓문학관
조선민화박물관
영월 깊은 산속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민화는 조선시대 서민 생활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밴 민속화다. ‘작자 미상’의 그림, 낙관 없는 그림, 격이 낮은 그림, 창의성이 부족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홀대받던 그림들이다” 조선민화박물관 오석환(55) 관장은 공무원 출신이란다. 민화에 반해 25년 가까운 세월을 민화와 함께 살아왔다. 작자 미상에 낙관도 없이 20년 동안 사재 털어 모아 조선민화박물관은 2000년 7월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사립 민화 전문 박물관이다. 소장하고 있는 3500여 점 중 150~170여 점을 해마다 두 차례씩 교체해 상설 전시한다. 박물관엔 5명의 해설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무덤이다.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 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