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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17차 /강화도 마니산/전등사 산행후기
1. 일 시 : 2011. 06. 12(일) / 6시 출발 - 9시 도착 /15시간
2. 장 소 : 마니산 / 전등사
3. 참여인원 : 45명
4. 이동코스 : 상주-북상주ic-중부내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인천-초지대교-함허동촌야영장-마니산국민관광단지-초지대교-인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북상주-무양청사
5. 테마여행 일정
◇등산소요시간 : 함허동천-마니산-참성대-상방리매표소 / 5.1km /3시간30분
◇문화탐방 : 전등사
◇별미탐방 : 황산도어촌 금강호 / 032>937-8009 / 010-9117-7780
지금 강화도는 꽃게와 벤뎅이 회가 제철이다. 그러나 일반 횟집에는 산악회에서 먹기에는 가격이 맞지 않아 여러군데를 수소문한 결과 선주들이 직접고기를 잡아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곳이 많다고 하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황산도 어촌에 어촌계장님을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전화를 한결과 자기집을 소개받았다. 도착해서도 신신당부를 하면서 맛있고 양은 푸짐하게 줄 것을 여러번 당부하여 식당에 입장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아주 훌륭했다.
맛있는 꽃게탕과 벤뎅이회로 강화의 별미를 너긋하게 즐기면서 하루를 마무리 할수 있었다. 세계10대 갯벌로 유명한 강화도의 넓은 갯벌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함을 느낄수있었다
6. 테마여행 후기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수천년간 호국의 성지역할을 수행하였다. 1970년 강화대교가 개통됨으로써 이제는 육지나 다름없는 섬으로 수 많은 고난의 사건을 뒤로 하고 다시 인천광역시의 일부로 조용히 머룰러 있다.
2002년 8월 제2강화대교도 개통되어 이제 교통 소통도 훨씬 원활해 졌다.
연간 200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번잡한 도시로 변하였다. 강화도는 물살이 빠르고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강화도가 고려시대에 몽고군이 전국토를 점령하고도 40년간이나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할 정도로 천연의 요새가 되었다.
강화도는 눈물의 섬이다. 고려 무인정권이 무너지면서 삼별초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자행하였고, 왕족과 권신의 유배지가 되어 충정왕과 창왕이 이곳으로 쫓겨와 살해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해남, 강진, 제주와 더불어 유배지로 유명하여 세조때의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등 많은 사람이 유배를 온 눈물의 주인공의 섬이다.
6.25남침이후 개성사람들이 몰려와 살게됨으로써 인삼이 유명해져 고려인삼하면 강화인삼을 말하는 것이 되었고, 화문석과 반닫이 또한 유명하다. 그 역사를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고려시대 강화도읍 시 왕실과 연관된 이분야의 장인들이 많이 정착하면서 그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볼수 도 있을 것이다.
등산초입은 함허동천의 야영장에서 시작을 하였다. 이야영장은 계곡을 중심으로 야영을 할수 있도록 되어있어 가족단위의 야영객이 많이 찾는모양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기도 구워먹고 숲속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함허동천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摩尼山:469.4m)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 켠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경기도 강화군에 남쪽 화도면에는 오랜 옛날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祭天(제천)의 聖火(성화)가 올려졌던 높이 468m의 마니산이 자리잡고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마니산이 어떤 산맥의 줄기도 이어받지 않고 독특하게 이루어진 산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산세가 아닌 고유의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렸다고 하며 국토의 중앙이자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한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산은 원래 摩利山(마리산) 또는 頭岳山(두악산)이라 했는데 이는(머리산)또는(거룩한 산)의 뜻이라고 하며 아직까지 이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중에 한 사람도 다치거나 불상사가 일어난 적이 없어 더욱 성역의 異蹟(이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산의 꼭대기에는 국조 단군께서 단군기원 51년(기원전2282년)에 민족 만대의 영화와 번영을 위해 친히 단을 쌓고 10월 상달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塹星壇(참성단)이 있다,
참성단은 고구려의 유리왕과 백제의비류왕 10년에도 왕이 친히 나와 제사를지냈으며 신라와 고려를 이어 조선 구한말까지 춘추로 제사를지냈었는데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과 함께 중단되었었다 지금은 전국체전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태양열이나 부싯돌로 점화하여 전국체전 대회장의 성화대까지 선수의 손에 의해 봉송 점화하고 있는 배달 겨래의 성지중의 하나다
강화도 남쪽에 우뚝 솟은, 마니산 정상(468m)의 참성단은 단군께서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백성들에게 삼신(三神)을 섬기는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의 아들 부루(夫婁)로 하여금 직접 쌓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단군이 이곳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해서 "제천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도(江都:江華)는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리(摩利) ·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옛부터 전해져 왔다. 또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桓雄)의 권속인 바, 결국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방(方)과 원(圓)은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난다는 철학을 바탕에 두고 설치된 것이라 여겨진다.
참성단의 축조에는 우리 선조들의 천지관(天地觀) 사상 반영되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관념에 따라, 성소(聖所)인 윗단은 둥글게, 제사를 올리는 아랫단은 네모지게 쌓았던 것이다. 종각에 걸려 있으면서 강화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된 이 종은 조선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으로 현 우리나라 보물 제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참성단을 조성한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보수 또는 수축한 기록이 곳곳에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조선 인조 17년(1639년), 숙종 43년(1717년)에 단을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이곳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이 행하여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등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창건되었고 그때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이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으로 만든 등을 시주하면서 절 이름을 전할 ‘전(傳)’, 등잔 ‘등(燈)’ 자를 써서 전등사(傳燈寺)라 불렀다.
정화궁주는 왜 전등사에 옥등을 전했을까? 13세기 몽골군이 우리 나라를 침입했을 때, 고려 정부는 강화도에 임시 정부(1232-1270)를 세우고 그들과 싸우고자 했다. 이때의 강화도를 ‘서울 도(都)’ 자를 써서 강도(江都)라 한다. 즉 강화도가 이 나라의 임시 서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약 40년 후, 고려 정부는 몽골군에게 굴복하여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고려의 임금은 충렬왕, 왕비는 정화궁주였다. 그러나 충렬왕이 왕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원나라 공주(제국대장공주)와 다시 결혼하게 되어 고려의 임금이 원나라의 사위가 되고 원나라의 임금 세조는 고려 임금의 장인이 되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첫 번째 왕비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가 왕실로 들어오고 원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임금 때문에 정화궁주의 위치는 갑자기 변했다. 이제는 원나라 공주가 첫 번째 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정화궁주는 원나라 공주를 대할 때마다 아랫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나중에는 임금도 만나지 못하게끔 구석진 곳으로 자리가 옮겨지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때는 아무런 죄도 없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화궁주는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이때 한 궁녀가 말했다.
“왕비마마, 저희들은 마마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답답하게 궁궐에만 계시지 마시고 예전에 가 보았던 강화도의 진종사(전등사의 먼저 이름)에라도 한번 가 보시지요.”
정화궁주는 원나라 공주가 이 땅에 오기 전 충렬왕과 같이 강화도로 놀러가던 생각을 했다. 며칠 후 왕비는 몇 명의 궁녀를 데리고 강화도 진종사를 찾았다. 주지 스님이 맨발로 쫓아 나왔고 스님을 보는 순간 왕비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왕비마마,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스님들께서도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왕비와 궁녀들은 스님을 따라 부처님 앞에 두 손 모아 나지막한 소리로 예불을 드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예불이 계속되는 동안 왕비는 남편인 충렬왕과 원나라의 공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되었다. 그럴수록 왕비는 눈앞의 부처님을 향해 계속 절을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왕비의 마음이 차츰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이 절을 떠나면서 정화궁주는 스님을 찾았다. 그리고는
“스님, 앞으로 이곳을 저의 원당(願堂,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은 정성이니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옥으로 만든 등잔을 하나 내밀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진종사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정화궁주가 옥등을 전한 절이라 하여 전등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윤장대
중국 양나라의 부흡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만들어졌다고 한다. 부흡은 540년 송산에 쌍림사를 세우고 대장경 열람에 편리하도록 윤장을 고안했다고 하는데, 작은 책들을 한곳에 모두 꽂아 두고 책장을 돌려가며 찾기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 졌으나 후에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고 또한 복을 얻을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전경신앙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전경신앙은 이러한 윤장이나 경통에 경을 넣고 돌리면 경륜안에 있는 경을 무수 만억번 염송하는것과 같고 그 공덕이 불가사의하여 세세생생 쌓은 죄와 업장을 소멸시킬수 있고, 마귀의 장애, 몸과 마음의 병,기근, 원한등 8만4천의 업장을 소멸시킬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경정 신앙이 가장 성행하고 있는 곳이 티벳이다. 티벳은 불자들이 길을 걸을때나 쉴때에도 항상 경륜을 돌리는 모습을 볼수 있다. 사원 입구에서도 여러개의 경륜<마니차>이 설치되어 있다. 티벳사람들은 경통이 한바퀴 도는 것은 사람이 경을 한번 염송하는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다
티벳의 마니차(개인용)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웅전 내부의 글씨들 병인양요의 프랑스함대와 전쟁에 나가기전
병사들의 이름을 절에다 적어놓은 흔적이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박한 시간에 대웅전 기둥등에는 자기 이름을 써 넣었을 글씨다
벗겨진 단청 사이로 이름이 즐비하다. 그때 그 병사들의 마음은 어떠 하였을까?
프랑스군대를 격퇴한 기념비인 양헌수승전비가 동문쪽에 있다
그래서 전등사를 호국 사찰이라고 부르는게 당연하게 들린다
전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두 개의 범종이 있다. 대조루 옆 종루에 범종 하나가 걸려 있으며 명부전 옆에 있는 종각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중국 범종이 있다. 이 범종은 높이 약 164cm의 크기로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여 우리나라의 종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뤄진 종 고리가 있다. 또한 몸통 윗부분에는 돋을새김으로 8괘를 둘렀고 아랫부분에는 정사각형의 문양을 둘렀으며 그 사이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에는 이 종이 중국 송나라 철종 4년(1097년)에 주조된 것으로 중국 회주 숭명사의 종이었다고 적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범종을 송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물자가 부족하자 병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과 한국 전역에서 쇠로 만든 종이나 그릇 등을 닥치는 대로 강제 징발한다. 당초 이 종은 명문에 적힌 대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의 숭명사에 걸려 있던 범종이었다. 즉 이 범종도 중국에서 징발한 쇠붙이의 하나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를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해 우리나라 부평에 있는 군기창에 쌓아놓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 쇠붙이를 자기 나라로 실어 나르기 전에 전쟁에 패하고 만다. 그래서 광복 후 부평군기창에 방치돼 있던 이 범종을 전등사로 옮긴 것이다. 만약 전쟁이 조금만 길어졌더라도 이 범종 역시 용광로에 들어가 병기로 만들어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날씨가 너무나 더웠다. 운무가 끼여 조망은 좋지 않았지만 볼거리 있는 산행이였다. 강화도의 모든 것을 볼수는 없었지만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미리예약한 식당으로 이동하여 강화도의 별미를 맛보면서 하산주겸 이른 저녁시간을 가졌다. 쫄깃쫄깃한 회와는 다른 벤뎅이회, 잡자 말자 죽는다고 하여 벤뎅이라고 이름붙여진 고기와 꽃게탕 그리고 순무를 별미로 맛있게 먹고 마시면서 여행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요새는 더욱 자주 듭니다. 벌써 일년의 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음달은 계곡의 아름다움에 빠져볼까 하고 산행계획을 잡았습니다. 봉화와 삼척의 경계인 석계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낙동정맥으로 진행하다가 우리나라 오지중의 오지인 덕풍계곡으로 하산하여 6개의 아름다운 폭포를 감상하면서 계곡트레킹을 할려고 합니다. 산행후 울진후포로 이동하여 회좀 먹고 나옹화상의 생가를 견학한후 작가 이문열씨가 젊은날 바다를 보러 다녔던 창수령에서 젊은날의 초상에 나오는 창수령의 모습을 감상한후 영양을 거쳐 상주로 돌아오는 여행의 일정을 잡을까 합니다.
다음삼척으로 떠나는 여행에도 회원여러분의 많은 참석바랍니다.
첫댓글 6개의 폭포와 계곡 트레킹~ 기대 기대^^
이문열의 소설중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우리의 시작은 그것을 위하여 있었으리......'
란 글귀가 가슴에 남았는데 이문열의 창수령을
가본다고 하니 설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