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35장 신을 향한 길 위에 비친 섬광
미르다드가 말했다.
“ 이 밤의 정적 속에서 미르다드는, 신을 향한 그대들의 길 위에 섬광을 뿌리고 싶다.
논쟁을 피하라. ‘진실’은 공리(公理)다. ‘진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논쟁과 증명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조만간 증명과 논쟁에 의해 타파되기 마련이다.
어떤 것을 증명하는 일은 그 대립물을 논박하는 것이다. 신에게는 어떠한 대립물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신을 증명한다거나 논할 수 있겠는가?
‘진실’의 샘이 되기 위해서 혀는 결코 도리깨나 독이빨, 풍향계, 곡예사, 혹은 썩은 음식이나 먹는 동물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말하라.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으라.
언어는 공간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수많은 항구에 정박하는 교통수단이다. 언어와 함께 무엇을 실을지 주의를 기울이라. 언어는 자기 길을 가다가 마지막에는 그대의 문 앞에 짐을 내겨놓을 테니.
집에서 쓰나 싸리비와 같은 것이 마음에서 자기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대의 마음을 잘 청소하라.
말끔히 청소된 마음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과 사물에 의해 살아가듯이,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도 그대에 의해 살아간다. 그대가 독을 마시고 싶지 않거든, 남에게 좋은 음식이 되라.
다음에 디딜 발걸음이 불안할 때는 가만히 그대로 서 있으라.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당신을 싫어한다. 그것을 좋아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렇게 할 때 그대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제거된다.
가장 견디기 힘들게 성가신 일은 사물을 성가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하라. 모든 것을 갖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갖지 않든지, 중간의 선택은 있을 수 없다.
걸림돌은 어떤 것이라도 경고다. 그 경고를 잘 해독하라. 그리하면 걸림돌은 지표가 된다.
직선은 곡선의 형제다. 한쪽은 가까운 길이고, 또 한쪽은 돌아가는 길이다. 곡선에 대해 강한 인내심을 가지라.
인내는 ‘신념’에 의지할 때는 건강하다. ‘신념’을 동반하지 않을 때는 마비(痲痹)이다.
존재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아는 것 -인간의 생을 순회하는 주요 단계가 이렇게 질서 잡혀 있음을 보아라.
칭찬을 주는 것과 받는 일에 주의하라. 설령 그 칭찬이 더없이 진실하고 가치있는 것일지라도, 아첨하는 자의 숨겨진 의도에 대해서는 입도 귀도 닫아버려라.
준다는 것을 의식하는 한 그대는 주는 것 모두를 빌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 자기 것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에게 준 것은 실제로는 그 사람한테서 맡아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대들의 것 -그리고 그대들만의 것-은 설령 누가 바란다 해도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균형을 유지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스스로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고, 스스로를 측량하는 저울이 되리라.
빈곤함도 부유함도 없다. 있다면 사물을 쓰는 법이 있다.
참으로 가난한 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잘못 쓰는 자이다. 참으로 풍부한 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잘 사용하는 자이다.
곰팡내 나는 빵껍질조차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일 수 있다. 황금이 쌓인 창고라도 구제할 길 없는 빈곤일 수 있다.
수많은 갈래길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망설일 필요가 없다. 신을 찾는 마음에게는 모든 길이 신과 통해있다.
온갖 형상을 취하는 ‘생명’에게 외경스런 마음으로 다가가라.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속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는 진리가 숨겨져 있다.
‘생명’의 모든 작품에는 의미가 있다. ‘생명’은 쓸모없는 사소한 일로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다.
사물은 ‘자연’의 작업장에서 생긴 것이므로, ‘자연’의 마음이 담긴 배려와 최고의 정성이 담긴 예술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물은 적어도 그대들이 경의를 표할 만한 것이 아니던가?
어떠한 인간도 무시하지 말라. 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쪽이 낫다. 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작은 신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의 작은 신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작은 신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구로 인도하는 유일한 조타수를 무시하는 자가 어떻게 자신의 항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아래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위를 올려다 보라. 위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라.
오른 만큼 내려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균형을 잃고 말 것이다.
오늘 그대들은 제자이다. 내일 그대들은 교사이다. 좋은 교사가 되려면 좋은 제자여야 한다.
세상에 있는 악(惡)의 잡초를 베어내려고 하지 말라. 잡초라도 좋은 비료가 될 수 있으니까.
잘못 사용한 열정은 그 열정을 가진 자를 죽이는 일이 너무나 잦다.
높고 당당한 나무만이 숲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숲에는 밑에서 사는 관목이나 덩굴도 늘 필요하다.
위선은 은폐된 상태로 행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은. 그러나 위선을 영구히 유지할 수는 없다. 또 위선을 완전히 없애는 일도 불가능하다.
음습한 정욕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번식한다. 그 번식을 막고 싶으면 정욕에 자유의 빛을 주라.
천 명의 위선자 중 단 한 명이라도 정직한 사람으로 감화시킬 수 있다면, 그때 그대의 성공은 실로 위대하다.
신호의 횃불을 높이 올리라.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소리지르며 달려가지 말라. 빛이 필요한 자를 빛으로 초대할 필요는 없다.
어리석은 자에겐 어리석음이 집이듯이, 현명한 자에겐 현명함이 집이다. 현명한 자의 짐을 거들어 주고, 어리석은 자는 그대로 놔두라.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를 그대들보다 능숙하게 가르칠 수 있다.
그대들은 종종 자신의 길이 통행 불능이고 음울하며 동행자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지를 갖고 계속 걸어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동행자를 발견하리라.
자취 없는 공간 속에서 아직껏 발걸음이 닿지 않은 길은 없다. 발자취가 극히 드문 곳은 곳곳마다 험하고 고독하지만 길은 바르고 안전하다.
길잡이는 길을 묻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길을 가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대들이 길잡이임을 명심하라.
잘 인도하기 위해서는 잘 인도받아야 한다. 그대들의 길잡이에게 부탁하라.
많은 사람이 그대들에게 ‘길을 가르쳐 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바라노니, 우리를 그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자는 극소수일 것이다. 너무나 극소수일 것이다.
극복을 향한 길에서는 그 소수가 다수보다 중요하다.
기어가라, 걸을 수 없는 곳이라면. 걸으라, 뛸 수 없는 곳이라면. 달리라, 날 수 없는 곳이라면. 날으라, 온 우주를 자기 안으로 가져와 정지시킬 수 없는 곳이라면.
그대들의 안내를 따르려고 악전고투하는 자가 걸려 넘어지면 그대들이 일어나도록 도와 줘야 할 것이다. 한 번, 두 번, 아니 백 번이라도 그들이 일어나도록 도와 주라. 그대 자신도 예전엔 갓난아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가 더 이상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도와주라.
그대들이 기름부음을 받아 신성해지는 꿈을 꾸듯이, 그대들의 마음과 정신이 ‘용서’라는 기름으로 신성해지도록 하라.
생(牲)은 하나의 열병이다. 그 열병의 강도나 종류는 저마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망상 속에 있다. ‘성스러운 이해’의 열매인 ‘성스러운 자유’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행복하다.
인간의 열병은 변할 수 있다. 전쟁의 열병이 평화의 열병으로 바뀔 수도 있다. 부를 축척하는 열병이 사랑을 축적하는 열병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대들이 실천하고 가르침을 구하는 영(靈)이 행하는 연금술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죽어가는 자에겐 ‘생’을, 살아 있는 자에겐 ‘죽음’을 설교하라. 그렇지만 극복을 갈망하는 자에겐 이 두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설교하라.
‘소유하는 것’과 ‘소유당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대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을 소유한다. 그대들이 증오하는 것은 그대들을 소유한다. 소유당하는 것을 피하라.
시간과 공간의 허공에서는 하나 이상의 행성이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다. 이 지구는 그 행성 중에서 가장 젊고 원기왕성한 아기이다.
정지해 있는 운동 -얼마나 멋진 역설인가! 그러나 이것이 신의 세계에서의 운동이다.
평등하지 못한 것이 어떻게 평등해지는지를 알고 싶다면, 손가락을 보라.
‘우연한 기회’는 현명한 자에겐 장난감이다. 어리석은 자는 ‘우연한 기회’의 장난감이다.
어떤 것에도 불평하지 말라. 불평은 불평하는 자에겐 재앙이 된다. 불평을 채찍질하는 것은 재앙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불평을 이해하면, 그 불평은 충실한 하인이 된다.
사냥꾼이 사슴을 겨냥해 쏘았지만 사슴를 맞추지 못하고, 대신 그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산토끼를 잡는 일이 흔히 있다. 현명한 사냥꾼은 그러한 경우 ‘내가 정말 겨누고 있었던 것은 사슴이 아니라 산토끼였다. 나는 내가 노렸던 사냥감을 얻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잘 겨냥하라. 그리하면 어떤 결과든 좋은 결과가 된다.
그대들에게 오는 것은 그대들 것이다. 오는 것이 늦어진다면 기다릴 가치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만약 그대가 목표로 한 것이 그대를 노리고 있다면 결코 그것을 놓치지 말라.
빗나간 겨냥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겨냥이다. 그대들 마음이 어떤 실망도 받지 않도록 하라.
실망이란 연약한 마음에 의해 올려진 연이다. 그 연은 이루지 못한 희망의 썩은 살로 양육된다.
하나의 희망이 실현될 때는 다른 많은 희망이 유산되고 만다. 만약 마음을 무덤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면, 그대 마음을 희망과 억지로 연결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
물고기가 낳은 백 개의 알 중, 자라서 물고기가 되는 것은 하나가 될까 말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아 있는 아흔아홉 개의 알이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식별력 있는 동시에 무차별이다. 그대들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그대들의 마음과 정신을 심을 때는 식별력 있으면서도 무차별적으로 하라.
어떠한 노동에 대해서도 보수를 구해선 안 된다. 노동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노동 자체가 충분한 보수이다.
‘창조의 언어’ 와 ‘완전한 균형’을 명심하라. ‘성스러운 이해’를 통해 ‘완전한 균형’에 도달할 때에만, 그대들은 극복자가 되고 그대들의 손이 신의 손과 협력하여 일한다.
그대들이 ‘성스러운 이해’의 평화와 정적으로 하여금 이 밤의 평화와 정적을 압도시킬 때까지, 이 밤의 평화와 정적이 그대들 속에 울려 퍼지기를.
이렇게 나는 노아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