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연구의 쟁점들 ② 서정주의 친일과 시정신 재론 / 이숭원 [49호] 2011년 03월 10일 (목)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
1. 발단
19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와 비평은 과학적 방법론을 갖추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러면서 문학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나의 현상을 일회적·독립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 이광수였다. 이광수가 보인 일제 강점기 말의 친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잠복되어 있던 어떤 요소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도출된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광수의 초기 논설과 문학작품에서 친일의 요인을 검출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그 후에 전개된 이광수 문학의 특성과 한계를 그의 친일과 연계시켜 보는 작업도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는 한 인간의 문학 활동을 총체적으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미 확인된 결과를 바탕으로 원인을 소급 해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선입견의 개입을 피하기 어렵다. 이러한 활동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요즘에는 이런 식의 논문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2000년 12월 24일 서정주가 세상을 떠난 후 추모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고은은 〈미당 담론〉(《창작과비평》 2001 여름호)을 발표하였다. 한때 문필가로 날리던 고은의 글답지 않게 이 글은 비문이 많고 논리적 구성도 갖추고 있지 않아서 글쓴이 자신의 의식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알려준다. 미당과의 “긴 벼랑 같은 결별”에도 불구하고 “육친적인 날들”을 보냈던 그의 내력이 무거운 짐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 글은 미당의 시와 삶에 대한 생각을 나열해 가고 있어서 ‘미당 담론’이라기보다는 ‘미당 상념’이라는 느낌을 준다. 상념의 흐름에서 도출되는 서정주에 대한 비판의 골자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자화상〉에는 강렬한 수사의 기법은 보이지만, 진정한 자기 성찰이나 회개의 아픔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실존적 고투를 떠난 추상의 언어이며 그것은 자신에 대한 “무오류성” “체질적인 자기합리화”로 나가게 한다. 이러한 속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다. 그의 시는 ‘나’라는 개인사에 집중하여 “혹심한 이기주의, 무리한 자아군림주의” 경향을 보인다.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본능적 공포감”이 있으며 이것은 “시대에 대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운 굴복”인 친일로 나타났고 전쟁 중에는 정신이상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시대에 맞서는 투혼으로서의 치열한 시정신”은 전적으로 부재했다. 그의 시에는 분명 “심금을 건드리는 음악적 명향성(鳴響性)”과 “노련한 언어 미각”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장점만을 “문학 유산으로 남기는 문학사적 결산은 시기상조”다. 지금은 미당 시의 시비를 가리고 옳고 그름에 따라 미당 시를 비판해야 할 단계다.
고은의 글에 대한 많은 비판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은 자신이 미당 타계 후의 일방적 미화의 논평을 의식했음인지 세상에는 그에 대한 ‘맹신’과 ‘규탄’이 있다고 양분한 것처럼, 규탄에 대한 또 하나의 규탄이 이어진 것이다. 어떤 하나의 현상에 대해 찬반양론이 생기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문학현상에 대해서는 ‘맹신’과 ‘규탄’만 있을 수는 없다. 대립의 분기점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이 얼마든지 도출될 수 있다.
황현산의 〈서정주 시세계〉(《창작과비평》 2001 겨울호)는 서정주 시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기묘하게 혼합된 이중의 시선을 지닌 글이다. 이 글의 서두에는 고은의 〈미당 담론〉에 대한 언급이 있고, 서정주에 대해 ‘한국문학을 대표할 만한 민족시인’이라는 평가와 ‘친일파,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대립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호기심을 유인하는 구절로 시작된 이 글은 “미당의 시세계는 책임 없이 아름답다.”는 말로 끝난다. 이 모호한 말은 서정주 시에 대한 필자 자신의 곤혹을 함축하는 기표다. 아름다운 것은 미당 시의 장점이요 무책임한 것은 단점이다. 이 둘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밝힌다면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미당론이 될 것이다.
황현산 글의 본문은 종결문만큼이나 이중적인데, 이 글에는 미당 팔순 기념 세미나(1994년 12월 3일)의 주제발표 논문인 〈서정주, 농경사회의 모더니즘〉(《한국문학연구》 17, 1995. 3)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전의 논문에서 서정주 시의 의의를 평가한 바 있어서인지 황현산은 서정주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은 하지 않았다. 서정주가 보들레르의 영향은 받았지만 근대적 속물성의 부정이라는 심연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 가족관계를 끌어들여 시인의 소명을 “사가화(私家化)”하고 “감정의 밀도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서정주의 시가 ‘나’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고은의 비판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출발한 서정주의 시가 해방 후 토착어와 민족정서의 폐쇄성에 갇혀 “무변화, 무갈등, 비집착”의 시학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식에는 정치적 과오 같은 것도 시적인 화법에 의해 결국 다 허용될 수 있다는 교묘한 “허용의 철학”이 내재해 있다고 지적하였다. “책임없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황현산의 글에서 정작 내 시선을 끄는 구절은 “두 번째 시집인 《귀촉도》(1948) 이후 미당은 일종의 개종을 했다.”는 대목이다. 보들레르적 방황에서 이탈하여 토착어에 바탕을 둔 순화된 민족정서를 노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서정주의 시세계가 책임 없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의 층을 거느리고 있다. 그만큼 오해의 소지가 많은 내용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 담긴 의미가 어떻게 굴절되는가 하는 것은 그 이후 전개된 서정주론의 경과를 보면 알 수 있다.
2. 전개
서정주에 대해 매우 치밀하고 깊이 있는 학위 논문을 쓴 사람은 최현식이다. 그의 성실한 자료 조사에 의해 서정주 시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서지적 정보가 보완되고 오류가 수정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세운 서정주 연구의 공덕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는 고은의 〈미당 담론〉이 발표되던 바로 그때 한국 실천문학 진영의 대표 문학지에 〈민족, 전통, 그리고 미―서정주의 중기문학을 중심으로〉(《실천문학》 2001 여름호)를 발표했다. 이 글은 ‘냉전적 반공체제와 한국문학의 명암’이라는 특별기획의 하나로 김동리, 조연현에 대한 평문과 함께 실린 것이다.
제목의 성격으로 볼 때 이 글은, 해방 이후 김동리의 민족문학론과 연결된 서정주의 시와 산문, 그에 이어진 신라정신과 풍류도에 대한 경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 《신라초》(1961)와 《동천》(1968)의 시세계 등을 검토하는 것이 그 개요가 될 것이고, 실제 내용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논의의 출발점에 전제로 내세운 것이 서정주의 친일 시론으로 알려진 〈시의 이야기〉(〈매일신보〉 1942. 7. 13-17)이다.
이 글은 일본 강점기 말 서정주의 친일 문건 목록 중 제일 처음에 놓이는 자료다. 일본군국주의의 동양문화론에 호응하여 국민시 운동에 관여했던 미요시 다츠지(三好達治)의 글에 영향을 받은 이 글은, 국민문학이나 동아공영권이라는 좋은 술어들에 호응하여 동양 전통의 계승과 보편성 지향에 관심을 갖고 동양의 고전을 섭렵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최현식은 이 글이 미요시 다츠지의 글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밝히면서도, 서정주 자신의 시정신도 담겨 있다고 보았다. 서정주는 시의 본질인 “언어의 문제”와 “민중의 양식”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해방 후 “민족의 발견에 새로운 기여를” 했으며, 무속 설화 등을 수용하여 민중의 양식을 창출하는 데 노력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글이 당시 동양문화론의 주장에 호응하는 단면을 보이면서도 서정주의 이후의 시적 성취를 예고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아울러 서정주의 글에 “그 악명 높은 국민문학 내지 국민시의 목적과 창작 방법을 나팔 부는 태도는 거의 없”고 미요시의 영향을 내세워 “미당의 친일을 과장되게 해석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단정하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 후 미당은 자기만의 독특한 어법과 사유를 통해 동양적 가치에 전혀 새로운 옷을 입히는 작업을 평생 지속함으로써 그 영향관계를 무색게 하는 언어의 성채를 구축했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여 미당 시의 가치를 최대로 인정하였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실천문학》의 친일문학 특집에 박수연의 〈근대 한국 서정시의 두 얼굴: 미당 문학에 대하여〉(《실천문학》 2002 봄호)가 발표되었다. 이 글은 서정주의 친일과 그가 남긴 문학과의 관련성을 살펴 서정주의 문학정신이 어떠한 기반 위에 놓인 것인가를 해명하려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서정주 친일 문건의 출발점에 놓인 〈시의 이야기〉를 검토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미요시 다츠지와 서정주의 이 글이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은 박수연이 먼저인데(〈절대적 긍정과 절대적 부정〉 《포에지》 2000 겨울호), 박수연은 이 사실을 최초로 밝혀 놓은 사람은 최현식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글이 최현식의 〈민족, 전통 그리고 미〉에 고무받은 바 크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박수연의 논지는 최현식과는 달리 서정주 시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서정주는 현실이나 현실에 대한 감정을 늘 추상의 상태로 표현하여 “현실을 내파”하지 못한 자기중심적 내면화의 길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의 저변에는 “미당의 친일 행위는 그의 친독재 행적과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것, 그 뿌리를 같이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즉 미당이 보여준 동일성의 세계는 “일본의 근대초극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동일자의 권력을 향한 그의 끝없는 구애”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수연과 유사한 논리가 조금 더 체계를 갖추고 전개된 것이 김재용의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친일문학―서정주의 친일문학에 대하여〉(《실천문학》 2002 여름호)이다. 이 글은 박수연보다 훨씬 정제된 어조로 단순명쾌하게 서정주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있다. 그 대체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서정주가 친일을 하게 된 시점은 1942년 2월 일본의 싱가포르 함락 이후이며, 그 자발적 친일의 첫 문건이 〈시의 이야기〉다. 서정주의 초기 시는 근대의 속물성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했는데 〈수대동시〉 이후 고향을 발견하여 시적 전환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일제에 의해 유포된 동양문화론에 관심을 갖게 하고 결국은 대동아공영론을 수용하여 친일 파시즘문학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로 볼 때 “전통의 세계와 정한에 대한 탐구”가 해방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제 말 친일문학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재용의 서술은 마치 삼단논법을 연상시킬 정도로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후 김재용의 논리에 옷을 입히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오성호는 〈시인의 길과 ‘국민’의 길―미당의 친일시에 대하여〉(《배달말》 32, 2003. 5)에서 서정주의 친일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됨으로써 식민지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로 상승하려는 은밀한 욕망”이 발현된 것이며, 해방 이후에도 이 태도는 그대로 이어져 “강압적인 대한민국 국민 창출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그가 내세운 신라정신이라는 것도 “내선일체론을 증명하기 위해 일제가 발견해 낸 신라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으로 이것 역시 국가의 절대성을 내세워 “국가주의적 동원을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논술하였다.
남기혁은 〈서정주의 동양 인식과 친일의 논리〉(《국제어문》 37, 2006. 8)에서 서정주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 “서구 지향적 미의식에서 벗어나 전통주의, 혹은 동양주의의 노선으로 전회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는 경우가 국민시론과 친일시 창작”이라고 하면서 여기서 보여준 “동양적 전통 회귀(전통주의)는 역사를 심미화하는 파시즘적 상상력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신라정신을 포함하여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였던 동양주의적·전통주의적 미의식의 부정적인 양상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김재용의 논리를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보강하면서 박수연, 오성호 주장의 거친 부분을 조정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박수연은 〈친일과 배타적 동양주의〉(《한국문학연구》 34, 2008. 6)에서 과거의 주장을 조금 더 논리화하여 미요시 다츠지와 최재서의 영향을 받은 서정주가 배타적 동양주의를 수립하여 친일문학으로 이어지는 맥락과 그것이 해방 후 친파시즘 행동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제시하였다.
박정선의 〈파시즘과 리리시즘의 상관성 연구〉(《한국시학연구》 26, 2009. 11)는 친일문학을 다루면서도 과거의 논리적 재단과는 다른 섬세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일제 강점 말기 파시즘 체재하의 서정시를 분석하면서 친일문학의 길로 나아간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의 차이점을 분석하였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서정주는 “자신의 미학과 파시즘의 친연성을 발견”하여 친일문학의 길로 간 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주가 친일시를 쓰면서도 “이전의 미학적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은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다.
서정주는 “초기 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근원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 즉 영원한 것을 지향”했고 영원성 시학의 초기에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본 것도 성실한 관찰의 결과다. 서정주가 “동아공영론을 만나면서 완전히 동양으로 귀착하게” 된 것을 “동아공영론에서 후일 ‘영원성의 시학’으로 불린 자신의 초월미학의 역상(逆像)을 보았”다고 지적한 것도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서정주의 친일시 창작과 관련지어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이 예고하는 “파시즘적 황홀”(박현수 〈친일파시즘문학의 숭고 미학적 연구〉 《어문학》 104, 2009. 6)에서 그가 추구하던 영원성의 한 환각을 보았다는 설명을 보강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앞의 박수연, 김재용, 오성호, 남기혁의 주장과 유사한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한 분절점을 지니고 있다.
손진은은 〈문학교육과 제재 선정의 문제―서정주의 시를 중심으로〉(《우리말글》 33, 2005. 4)에서 서정주의 시가 교과서에서 제외되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서정주의 영원성에 대한 자각은 1930년대 동양문화론의 교섭도 있지만 그와 함께 〈수대동시〉 〈부활〉 〈귀촉도〉 등에 나타난 “순수시의 내밀한 진원지로서 고향의 재발견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최현식의 분석에 동의한다고 했다. 동양문화론 동조에 대해서도 서정주의 불확실한 모색에 동양문화론이 “세련된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을지 모른다는 최현식의 진단(《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 소명출판, 2003)에 기대어 당시의 동양주의가 자신의 논리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주장을 폈다.
박현수의 〈서정주와 미학적 기획으로서의 신라정신〉(《한국근대문학연구》 14, 2006. 10)은 서정주의 신라정신의 뿌리가 일본 강점기 말의 동양문화론에 있으며 그 친일 파시즘의 논리가 1950년대 이후의 시작에까지 이어진다는 주장을 본질적으로 비판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 박현수는 신라정신의 기원을 1950년대 초의 편지나 기타 자료들을 근거로 1950년대 이전으로 잡고 있으며, 이후 상세한 문헌 검토 작업을 거쳐 서정주의 신라정신 기획이 민족주의적 협애성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미학으로 완성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이 신라정신이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것임을” 《질마재 신화》(1975)가 보여주었다고 주장한 점, 이 기획이 서정주 단독의 것이라기보다는 김범부, 최남선, 신채호 등 거대한 사상사적 흐름과 연계된 작업이라고 밝힌 점 등은, 신라정신을 친일 파시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관점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그는 일제 파시즘과 신라정신 기획은 “원칙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 문제”이며, 이 둘을 동일선상에서 연결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단정하였다.
김춘식의 〈친일문학에 대한 ‘윤리’와 서정주 연구의 문제점〉(《한국문학연구》 34, 2008. 6)은 서정주 친일문학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친일이 그 후의 영원성 추구나 신라정신 지향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김춘식은 서정주를 옹호한 손진은의 논문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의 보강 자료로 삼았는데, 손진은이 참조한 최현식의 논문이나 위의 박현수의 논문에서 도움을 얻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김춘식은 다시 〈자족적인 ‘시의 왕국’과 ‘국민시인’의 상관성〉(《한국문학연구》 37, 2009. 12)에서 서정주의 초기 시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시의 이야기〉에서 거론한 서정주의 ‘국민시가’ 개념과 일본 강점 말기 총동원 체제를 전제로 한 ‘국민문학’의 개념과는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내적 의미로만 보면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논리는 서정주에 가해지는 친일동일화론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홍용희는 〈전통지향성의 시적 추구와 대동아공영권〉(《한국문학연구》 34, 2008. 6)에서 서정주가 초기의 병적 낭만주의나 서구적 상징주의에서 토속적 전통지향성으로 시적 전환을 하는데 여기에 “김범부의 ‘동방르네상스’의 사상적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신라정신과 영원성 추구가 친일 파시즘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통지향성이 “과거형의 신화적 시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정세 오판의 권력 미화가 반복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서정주의 일제 강점기 말 상황과 관련지어 친일적 문자 행위의 배면에 숨은 의미를 긍정적으로 고찰한 논문으로 김승구의 〈일제 강점기 말기 서정주의 자전적 기록에 나타난 행동의 논리와 상황〉(《대동문화연구》 65, 2009. 2)을 주목할 만하다. 김승구는 서정주의 자서전에 언급된 일제 강점기 말의 상황을 분석하여 그의 친일이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중압감”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최재서와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생활의 방편을 얻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동양 담론에 대한 정신적 승인”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정주의 〈거북이에게〉(《춘추》》 1942. 6)를 예로 들어 시인의 의지가 “현실에서 무력하게 좌절되는 참담함에서 비롯되는 설움”이 나타난 것을 분석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나 불멸 내지 영원의 형이상학에 안심입명(安心立命)하려는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고 여기서 “서정주 식의 영원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요컨대 김승구는 일제 말 “외재화된 순응의 몸짓 아래 가려져 있는 거부와 탈주의 몸짓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이 몸짓이 해방 후 그의 문학에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3. 논점과 탐색
여기까지 서정주의 일제 강점기 말 친일문학을 둘러싼 찬반양론을 돌아볼 때 부각되는 논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서정주의 초기 시가 서구적 경향에서 전통 지향으로 돌아설 때 친일적 동양문화론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과 서정주의 영원성 추구 및 신라정신 탐구가 동양문화론과 연결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서정주 문학에 대해 ‘맹신과 규탄’ ‘민족시인과 친일적 기회주의자’라는 이분법의 어느 한쪽에 서는 한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러한 도식적 이분법은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문학인의 섬세한 내면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시인이 남긴 자기 고백이라든가 논평 종류의 산문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리고 있어서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고 앞뒤가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일제 강점기 말이나 전시 상황 같은 어수선한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시인의 내면 풍경을 오히려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시 작품이다. 시에는 산문이라는 논리의 축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내면의 미묘한 엇갈림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서정주가 남긴 시작품이 유용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우선 서정주가 서구적 경향에서 이탈하여 토착어에 바탕을 둔 전통적 정서로 “개종”을 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겠다.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 은 1941년에 출판되었지만 1938년 가을에 출판을 기획한 것이어서 수록된 작품은 대부분 그의 이십 대 초반 2, 3년 사이에 창작된 것들이다. 여기에는 아직 완숙되지 못한 젊은 시인의 다층적인 체험과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화사집》 시편들이 일견 난해해 보이는 것은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시인의 의식에도 그 원인이 있다. 이 시들의 표면을 보면 서구적 방황과 자의식의 환멸이 주조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서구적 어법을 취한 이 시들의 여기저기에 토착적·전통적 이미지가 견고한 돌처럼 박혀 있다.
우선 시집의 표제가 된 〈화사〉를 보아도, ‘사향 박하’가 나오고 ‘이브’가 나오고 ‘클레오파트라’가 나오지만, 거기에는 또 ‘꽃대님’이라는 전통적 소재가 나오고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라는 동양적 가문 의식이 나오고 ‘순네’라는 토속적 이름이 나온다.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저항적 거부감과 기독교적 원죄의 고통이 표출되는 한편 뱀을 쫓는 시골 아이들의 충동적 돌팔매질이라든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은밀히 통정하고 싶은 젊은이의 욕망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화사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자화상〉 역시 당시로서는 놀랍도록 참신하고 돌발적인 비유와 탈출에 대한 이중적 자의식이 드러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 농촌의 전형적인 폐쇄성과 가부장적 의식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시에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둥이’라는 소재도 농촌의 피폐상과 관련된 것이며, ‘파촉’이라는 지명도 동양적 유배지의 정한을 내포한 말이다. 난해성이 두드러진 ‘지귀도시(地歸道詩)’ 연작 네 편이 가장 서구적인 방법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거기에도 ‘파촉’ ‘시약시’ 같은 동양적 시어가 나오고 ‘석벽 야생의 석류꽃열매’라든가 ‘보리 누름’ 같은 농촌의 이미지가 제시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기법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서풍부〉에도 ‘오갈피 상나무’, ‘개가죽 방구’ ‘열두발 상무’ ‘퉁수 소리’ ‘자는 관세음’ 등 토착적 시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분명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 혼재된 양상으로”(박정선)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 《귀촉도》에 수록된 작품의 절반 이상이 1939년에서 1943년 사이에 창작된 것인데 이들 작품 역시 서양과 동양이 혼재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서정주의 시에서 고향의 발견으로 천거되는 〈수대동시〉는 어떠한 작품인가? 김재용은 이 시를 “근대의 속물성과 비극성”에서 벗어나 고향을 발견하는 “획기적” 변화의 시로 보고 그의 전통 탐구가 친일문학을 쓸 때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수대동시〉는 〈화사〉나 ‘지귀도시’ 연작과 비교해 보면 분명 이질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에 나오는 토착적 시어와 정서의 확대로 보면 그렇게 특이한 작품은 아니다. 여기에는 서정주 초기 시의 어법과 정서가 안정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高句麗에 사는 듯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고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
등잔불 벌서 키어 지는데……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 샤얄·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女子를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
여긔는 바로 十年전 옛날 초록 저고리 입었든 금女, 꽃각시 비녀하야 웃든 三月의 금女, 나와 둘이 있든곳.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금女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섭이 검은 금女 동생, 얻어선 새로 水帶洞 살리. ―〈수대동시〉 전문
이 시는 1938년 6월 《시건설》에 발표되었다. 시를 쓴 것은 그 이전일 것이다. 1935년에서 1937년에 이르는 시기에 서정주는 떠돌이처럼 살았다. 박한영 선사의 권유로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해인사로 가서 소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다시 서울로 와 불교전문학교를 휴학하고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고, 《시인부락》이 종간되자 또 제주도로 가서 몇 달을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이 지속되자 그의 부친은 아들을 불러들여 결혼을 권유했고 1938년 3월 27일 전라북도 정읍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러한 전기적 사실로 볼 때 〈수대동시〉는 서울에서의 떠돌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려는 그의 속마음을 표현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생활의 안정을 눈앞에 둔 시인은 자신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학교 교복은 진작 벗어 버렸고 양복과 중절모도 벗어 버리고 이제 흰 무명옷 입고 고향의 돌담으로 돌아가 친숙한 사투리를 쓰며 살아갈 날을 예감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고향에 사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는 것 같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도 싹튼다. 보들레르를 청산하듯 서울여자도 청산하여 완전히 망각하고 허랑방탕한 시의 편력을 떠나 조상이 물려준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살아볼 생각을 한다. 선왕산과 장수강이 있는 고향을 생각하니 그곳을 떠났던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1929년 3월 서정주는 줄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입학했던 것이다. 서정주는 고향의 여자 친구로 ‘금녀’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머잖아 봄이 오면 금녀 동생을 아내로 얻어 수대동에서 새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희망 어린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서정주의 초기 시에 이렇게 긍정적이고 생활친화적인 시는 없다. 그 점에서 보면 이 시는 분명 이질적이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은 논외로 하고 향토적·전통적 소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1937년에서 1942년 사이에 발표된 〈앉은뱅이의 노래〉 〈엽서〉 〈풀밭에 누워서〉 〈맥하〉 〈밤이 깊으면〉 〈귀촉도〉 〈만주에서〉 〈멈둘레꽃〉 〈살구꽃 필 때〉 〈조금〉 〈거북이에게〉 등의 작품이 모두 향토성과 전통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귀촉도》의 끝부분에 실린 장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의 첫 구절은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로 시작한다. 《서정주시선》에는 이 시가 해방 전 시편으로 분류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말 생활과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서정주는 자주 고향을 생각했을 것이다. 고향은 현실에서 정말 할 수 없이 되었을 때 그가 붙들 수 있는 마지막 손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방황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 방향이 어디이고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진실하고 영원한 것을 찾는 작업일 것이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없고 진실하고 영원한 생에 대한 끝없는 탐색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젊은 서정주도 그런 영원의 세계에 대한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바다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서정주의 바다에 대한 갈망이 굴절·변모되어 간 과정을 〈서정주 시에 나타난 ‘바다’의 의미 변화〉(《한국시학연구》 29, 2010. 12)에서 검토해 보았다. 〈자화상〉 〈역여(逆旅)〉 〈바다〉 등의 시에 나타난 서정주의 절대에 대한 갈망은 해방 후의 작품인 〈추천사〉 〈꽃밭의 독백〉에 이어진다. 그러니까 서정주의 영원성에 대한 관심은 동양정신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초기 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수대동시〉에 잠시 표출된 긍정적 생활의 단면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 일제 강점기 서정주의 한글 시에서 긍정적 생활의 단면을 노래한 것은 이 시가 유일하다. 〈수대동시〉의 긍정적 측면은 해방 이후의 작품인 〈상리과원〉이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에 부분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수대동시〉는 서정주 시의 전환을 알려주는 작품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서정주의 시 중 매우 이질적인 작품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옳다. 일제 강점기 서정주의 시는 방황과 갈등, 고통과 번민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결혼 이후에도 그는 안정을 얻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이주하였다. 1940년 1월에 장남을 얻었는데, 그는 돈을 벌어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처자를 부모님께 맡겨 놓은 채 그해 가을에 혼자 떠나 버렸다. 그러니까 전기적 사실로 보면 〈수대동시〉의 희망은 시의 문맥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만주에 가서 쓴 시는 〈무제〉 〈멈둘레꽃〉 〈만주에서〉 등 세 편인데, 이 시편들은 하나같이 화자가 처한 공간의 가혹한 상황을 드러내면서 거기서 느끼는 질식할 것 같은 폐쇄감을 토로하고 있다. 〈멈둘레꽃〉은 저주받은 존재인 문둥이처럼 어딘가에 자빠져 있다가 소주처럼 공중에 기화해 사라지고 싶은 심사를 표현했다. 이 당시 그가 겪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노래한 작품이 〈조금〉(《춘추》 1941. 7)이다.
우리 그냥 뻘밭으로 기어다니며 거이색기 같은거나 잡어 먹으며 노오란 조금에 醉할것인가.
맞나기로 약속했든 정말의 바다ㅅ물이 턱밑에 바로 드러왔을땐 곱비가 안풀리여 가지못하고
불기둥처럼 서서 울다간 스스로히 생겨난 메누리 발톱.
아아 우리 그냥 팍팍하여 땀흘리며 조금의 오름ㅅ길에 해와같이 저무를뿐 다시는 다시는 맞나지못하리라. ―〈조금〉 전문
첫 연은 우리의 삶의 단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간조(干潮)의 뻘밭을 기어 다니며 게 새끼 같은 것이나 주워 먹는 누추하고 비속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비속한 것이 삶인데 우리는 “노오란 조금에 취하여”, 다시 말해 생이 안겨주는 잠깐의 쾌락에 마비되어 나날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노오란 조금”이란 표현은 황혼 무렵의 색조를 나타내는 동시에 간조의 뻘밭에서 얻는 수확의 야릇한 즐거움을 환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수확의 실제 내용물이 “게 새끼”라는 점에서 삶의 덧없음을 환기하기도 한다.
둘째 연은 어떤 절대의 세계, 영원의 세계를 동경했지만, 정작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 사연을 드러냈다. “정말의 바닷물”은 《춘추》에는 “참말의 바닷물”로 되어 있다. ‘그렇게 기다리던 바닷물이 정말로 들어왔을 때’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소망하던 영원의 세계가 만조의 바다처럼 바로 우리의 턱밑에까지 바로 들어온 그 절정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영원의 세계로 가지 못한 이유는 현실의 고삐가 풀리지 않아서이다. 우리를 잡아매고 있는 현실의 끈은 그렇게 집요하게 이상으로의 탈출을 제어하고 있다. 그 고삐는 남이 매어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서 현실의 삶에 스스로 매어둔 것이기도 하다.
셋째 연은 영원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더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자신이 쳐 놓은 현실의 고삐 때문에 가지 못한 것이지만 영원의 세계에 대한 갈망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본능적 욕망인지 모른다. 이상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처절한 몸부림을 “불기둥처럼 서서 울다간”이라고 표현했다. 기둥처럼 높이 치솟는 불길로 처절한 마음의 양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메누리 발톱”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했다. 며느리발톱은 새나 말 같은 짐승의 발 뒤쪽에 돋아난 작은 돌기를 뜻한다. 영원의 세계로 가고 싶어서 발돋움을 하고 기다리다가 며느리발톱까지 생겨났다는 뜻이다.
넷째 연은 다시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삶이란 이렇게 진정한 만남의 기회를 놓치고 지낼 수밖에 없는 실추와 비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허망하고 가련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가슴에 쓰라린 회한을 안고 “그냥 팍팍하여 땀 흘리며” 해가 지듯 저무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시의 결구는 절대 영원의 세계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탄식으로 끝나고 있지만 그다음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불기둥처럼 서서 울던 그 간절함이 쉽게 삭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지상적 한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위상을 이렇게 담담히 드러낸 시가 20대 중반의 나이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시기 서정주의 시는 바로 이런 실존적 고민을 안고 방황하는 가운데 창작되었다. 이것은 서구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전환을 했다거나 동양적인 것에서 안정을 얻었다거나 하는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 창작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다.
1942년까지의 시에는 토속적·전통적 요소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신라정신에 해당하는 단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끝없이 방황하고 고민할 뿐 영원의 세계에 안착하여 위안을 얻는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신라정신의 영원성에 대한 암시라도 받았다면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주의 신라정신은 해방 전의 토속적·전통적 경향과 영원성에 대한 탐구가 해방 이후 서정주의 새로운 모색에 의해 결합하면서 하나의 시정신으로 완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이것을 앞에서 제기한 두 가지 논점과 관련해서 답하면 이렇다. 서정주의 초기 시는 서구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 지향으로 돌아섰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친일적 동양문화론이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없다. 서정주의 신라정신 탐구는 해방 전 시의 토속성과 영원성 추구가 해방 후 그의 자발적인 모색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완성된 것으로 역시 동양문화론과는 관련이 없다.
이숭원 문학평론가. 1986년 《한국문학》 신인상(평론)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영랑을 만나다》 《교과서 시 정본 해설》 《백석을 만나다》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세속의 성전》 《감성의 파문》 《폐허 속의 축복》 등이 있음.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