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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주를 앙모하는 자 394장 ♬. 사40:27-31
이사야 40장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 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의 말씀과 딤후4:7-8절까지의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의 찬송은 작시자 뿐 아니라 작곡자 모두다 알리어지지 않은 익명의 찬송가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의 찬송은 1절과 4절에서 ' 독수리의 날개 치며 하늘을 올라감 같은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2절에서는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다니는 목자'의 간절한 모습이, 3절에서는 '마지막 천성 문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성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의 삶은 394장 찬송에 기록되어 있듯이 「날마다 주를 앙모하므로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름같이 그 힘이 넘치며, 또 하늘 위로 올라가서 땅 아래를 장악하듯, 주님을 앙모하는 자들은 날마다 힘찬 믿음의 삶을 통해 세상을 용기 있게 정복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
여기서 '앙모하다.'의 뜻은 '믿고 바란다.' '섬긴다'의 뜻으로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비록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어려우며, 근심과 걱정으로 둘러진 쳐 있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갈망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철을 따라 고운 옷을 입혀주시며, 푸른 들 맑은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과 힘을 주시며, 낙망한 자들에게는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이 주님을 앙모하며 감사함 속에 늘 찬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늘 승리와 환희의 기쁨이 넘치도록 은혜 가운데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 주를 앙모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하며, 그들이 누리는 축복은 무엇인가?를 찬송가의 가사를 통하여 함께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
♣ 주를 앙모하며 사는 자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일까요? ♣
첫째: 용기있게 앞으로 걸어가며 사는 자들입니다.(2절)
2절) 주를 앙모하는 자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길을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 다니며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
신앙생활이란 제자리걸음인 담보상태도 안되며, 뒤로 물러나는 후퇴도 안되고 오직 전진만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앞으로 나가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마귀들과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우리는 주님의 군사답게 절대로 뒤로 물러서거나 타협을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원수마귀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시기에 주를 향한 믿음과 말씀을 가지고 나가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험한 알프스의 눈 구덩이를 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혹한과 함께 눈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쳐 알프스 산을 넘으려는 나폴레옹 군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어야만 했습니다. 군마(軍馬)가 얼어죽고 많은 군사가 동상을 입으며 쓰러져 갔습니다. 이 상태로는 알프스 산을 넘어보기도 전에 눈 속에 파묻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각 부대의 참모장들이 나폴레옹 황제에게 다음에 다시 출전하는 것으로 하고 이번에는 돌아가자고 황제에게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참모들을 꾸짖으며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내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저 알프스의 눈덩이만 보지말고 저 산 넘어 로마 성을 보지 못하느냐."고 외치면서 계속 전진(前進)의 나팔을 불때 모든 군사들은 용기 백배하여 알프스를 넘어 대 로마제국을 점령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앙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폴레옹의 군대가 로마 성을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 승리한 것처럼 믿음의 성도들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나두고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돌아다니며 찾고 찾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얼마나 험난하고 악한 세대인지 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고 중도 포기하지말고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뜨겁게 증거하는 늘찬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시온성을 기억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담대히 걸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면류관을 얻기까지 힘차게 앞으로 달려가는 자들입니다.(3절)
3절) 주를 앙모하는 자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천성 문을 향하여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
'걸어간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서행을 뜻하고 '달려간다'는 말은 '빨리 질주하는 것을 가르킴니다. 달음박질에도 단거리와 장거리 그리고 마라톤이 있습니다. 저는 키가 적다보니 초등학교 때는 단거리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라톤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마라톤은 키와 그렇게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신앙생활을 성경에서는 운동경기로 비유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2절에서도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역설하였으며 고린도전서 9장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스톤 마라톤이나 동아 마라톤 등 여러 마라톤 경기를 관람해보면 출발할 때의 참가선수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46.5㎞의 마라톤 경기를 완주하고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우승자의 영광을 누리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우리는 8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황영조 선수를 기억합니다. 그는 영광의 금메달과 아울러 월계수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흥분된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이 같은 월계관도 금메달도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주님으로부터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하늘의 상급을 받기 원하는 자들은 삶에 일어나는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을 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 용기 있게 앞으로 달려나가야 합니다.
"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 길에 장애를 두려 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나가세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401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셋째: 독수리의 날개치며 오름과 같이 위로 올라가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1,4절)
1절)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모든 싸움 이기고 근심 걱정 벗은 후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
4절)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은혜 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 보리라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름같이 그 신앙이 주님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올라가는 신앙을 표현함에 있어 그 많은 비유나 동물 중에서 왜 유독 독수리로 표현을 한 것일까요? 독수리가 다른 동물과 남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도 땅에 있는 조그만 물체까지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선구 안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마24:28)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땅 위에 움직이는 쥐와 고양이 족제비등 작은 물체까지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들도 무엇이 악한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영안이 필요합니다.
둘째: 독수리들은 깎아지른 벼랑에다 집을 짓고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렘49:16)
독수리가 거저 '하늘의 제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덩치만 크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낭떨어지기에서 떨어지는 훈련을 통하여 고도의 비행술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러한 맹훈련을 이기지 못한 독수리들은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맙니다. 독수리들은 거처를 휴양림과 같은 낮은 평지나 울창한 삼림 속에 만들지 않고 험한 계곡이나 벼랑 같은 곳에 집을 짓고 삽니다. 그만큼 계곡은 위험하지만 먹을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 독수리들은 한번 목표물을 정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정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는 독수리가 실제로 비행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매'라는 놈이 비행하는 것은 보았습니다. '매'는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고는 그 먹이를 포획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먹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쥐가 다른 곳으로 숨어 들어가서 안 보여도 그곳 주위를 공중에서 몇 번이고 선회하면서 그 목표물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시 나타나면 정확하게 그 목표물을 포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제왕'이 독수리가 '매'에게 뒤질 리는 없을 것입니다. 독수리 역시 한번 목표물을 정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정복하고 마는 맹수의 특징을 그대로 지녔습니다.
넷째: 독수리들은 절대 썩은 고기나 남이 잡아놓은 먹이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엄격한 자기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을 침범하거나 또 남이 잡아놓은 먹이에 함께 달려들어 뜯어먹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 위를 선회하면서 먹을 것을 늘 부지런히 찾습니다.
이처럼 독수리는 훌륭한 선구안과 강인한 용기를 기를 수 있도록 낭떨어지기나 벼랑에다 집을 짓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먹이를 보면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서 잡는 집념, 그리고 살아있는 동물만을 잡아먹는 맹수로서의 품위와 기치를 지니고 있는 놈으로 '하늘의 제왕'이라는 명예도 함께 같고 있습니다. 특히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채 가지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세차고 빠르고 힘이 있는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독수리처럼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믿음의 선구안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낼 수 있는 용기와 목표를 가지고 하늘을 향해 무섭게 치솟듯 날마다 믿음이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를 만든 작시자가 살아있었다면 우리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 세상의 여러 고초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인생들아! 공연히 땅만 바라보며, 하늘만 바라보며 하소연하거나 투정하지말고 ,독수리같이 마라톤 선수와 같이. 나폴레옹의 군대와 같이 푯대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나아가라! 그리하면 이사야 40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너희가 나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면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리라, 너를 도와주리라,"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속에 여러 가지 절망되고 낙심되는 일이 많더라도 푯대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가 우리와 함께 하사 영원토록 붙들어 주시고 승리케 해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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