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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안녕하세요. 시청자, 청취자 여러분 <;나의 삶 나의 길>;의 조문배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기한 듯합니다.
때로는 온 우주를 품어 안을 것처럼 넓기도 하지만
때로는 바늘 구멍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편협하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열심히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 밭을 잘 다듬는 방법을 우리의 이웃을 위해 알려주시는 재가불가를 모셨습니다. 바로 한양국제특허법인의 김연수 대표변리사이신데요. 변리사 일을 하면서 피올라 마음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시도 한 김연수 대표님을 모시고 삶의 지혜와 함께 마음 다스림의 비법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고 듣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먼저 김연수 대표의 삶의 이력들을 아나운서 멘트로 듣겠습니다.
프로필.
김연수 한양국제특허법인 대표는 1956년 5월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7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김연수 변리사는 1976년 대학 재학 중 서옹 스님 문하에 출가했지만 1981년 불교법난 등으로 환속하고 대학에 복학했습니다.
김연수 변리사는 1983년 제 20회 변리사 시험에 합격해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고 84년 중앙 국제법률사무소로 자리를 옮긴 후 86년 김연수 특허사무소를 개업했습니다.
김연수 변리사는 1996년부터 98년까지 대한변리사회 총무이사를 역임했으며 산업자원부 산하 국제 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2000년 한양특허법인으로 전환해 활발하게 활동해온 김연수 변리사는 한국지식인 협회 선정‘신지식인 상’과 2006년 발명의 날 산자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김연수 변리사는 한양국제특허법인 대표 변리사를 비롯해 한국산업재산권협회 부회장, 거듭나기 마음학교 교장을 맡고 있습니다.
앵커
김연수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김연수 대표
네 안녕하세요.
Q. 대표님 주업이 무엇인가요?
앵커
이력서를 보면 김연수 대표님이 마음 수행을 하시는 분인지 변리사일을 하시는 분인지 좀 헷갈립니다.
정말 본인의 주업은 무엇입니까
김연수 대표
투잡이죠.
앵커
투잡이요? 누구나 좋아하는?
김연수 대표
그러니까 저는 물질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변리사를 하고 있고요.
또 정신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마음학교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Q. 변리사는 어떤 직업인가요?
앵커
변리사가 어떤 일을 주로 하는 겁니까?
김연수 대표
변리사라고 하는 것은 지적재산권, 특허, 상표, 실용신안, 디자인 이런 것들을 특허권을 얻어주기도 하고요.
한국의 특허청이라는 기관이 있죠.
또 외국에 대해서 그런 것을 권리 확보를 해주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에 관한 소송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최근에 삼성하고 애플하고 세계적인 일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도 변리사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죠.
앵커
현재 한양국제법인의 대표이신데 국내 특허법인 중에서 10위에 기록될 정도로 잘 알려진 법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연수 대표
10위 안에 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0위보다는 조금 위인 것 같고요.
작년 기준으로 매출이 100억 정도, 직원이 120명 가까이 됩니다.
앵커
그 많은 분들을 거느리시느라 힘드실 텐데 또 피올라 마음학교에 교장아니십니까?
김연수 대표
자칭 교장이지요.
Q. 피올라는 어떤 뜻인가요?
앵커
피올라라는 어떤 의미입니까?
김연수 대표
피어오른다.
앵커
아 피어오른다, 순 우리말이군요.
김연수 대표
네 그렇습니다.
Q. 언제 만들어진 학교인가요?
앵커
이게 언제 만들어진 학교입니까?
김연수 대표
제가 이것을 마음속에 구상한 것은 2004년부터이고요.
준비는 5년간 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2009년 만들었죠.
앵커
아 준비기간이 꽤 길었군요. 왜 그렇게 시간이 걸렸나요?
물론 특허법인 그것 때문에 바쁘시기도 하셨을 것 같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지만
김연수 대표
물론 그것도 있지만 정말 한 번 시작하면 시행착오 없이 잘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국에 좋다고 하는 수행단체를 다니면서 장단점 분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좀 좋은 점은 많이 배우기도 하고
부족한 점은 타산지석으로 삼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청각 교육을 해야겠다.
너무 지금은 형이상학적인 것만 다루다보니까 굉장히 관념적이 되거든요. 수행이.
그런데 현대인들이 재미 없으면 잘 안해요.
앵커
그렇죠.
김연수 대표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서 시청각 교육 프로그램을 비주얼로 만들고 음악도 넣고
때로는 같이 동작도 하고 이런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좀 준비기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Q. 마음학교를 만든 이유는?
앵커
근데 누구나 먹고 사는 일에 바쁘지 않습니까?
특히 지금 쉰여덟 살이시니까 2004년이면 가장 자녀들 키우는 일도 있고 하시는 일도 번성했을 테니까 바빴을 텐데 돈도 안 되는 그런 일을 할 생각을 왜 하셨습니까?
김연수 대표
그것은 제가 살아온 삶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살아온 삶이 저는 어려서 굉장히 물질적인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그 사업을 이어받았다가 경험 부족으로 망하시고
어린 나이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친척집에 가서 살고 학교로 빚쟁이가 찾아오고
앵커
학교로까지요?
김연수 대표
네. 그리고 또 뭐 끼니를 굶듯이 굶는 것이 밥 먹듯이 하고 스트레이트를 4, 5일도 굶어본 적도 있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존재감이 살만한 가치가 없는 정말 불쌍하고도 고립된 존재라는 것을 제가 절절히 느껴봤죠.
제가 예민하던 시절에.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저한테 어려서부터 내면적으로 좀 특별한 체험들이 많았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똑같은 꿈을 2~3년 마다 주기적으로 꾸는데
그 꿈이 뭐냐면 쉽게 말하면 천당 지옥을 구경하는 꿈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인데 제가 아는 사람들이 나와요. 참 신기하죠.
그런 것들도 있었고 또 저희 아버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제 꿈에 어떤 산신령 같은 분이 나와서 아버님을 이제 내가 데려갔겠다,
그래서 제가 가족들한테 그런 말을 하니까 어린 애가 그런 말을 하니까 잘 믿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어쨌든 그 날, 그 시간에 돌아가셨고.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사람은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또 다른 세계 내지, 내면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고 공부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어려서부터 고민했어요.
그래서 학교 문제도,
결국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런 씨앗이 거기서부터 나온 것이죠.
앵커
그래서 그런 경험들을,
또 나름의 수행의 방법들을 우리 이웃을 통해서 늘 고민하고 삶의 우울증들에 걸려있는 분들을 위해 실천해야겠다고 시작하신 거군요.
김연수 대표
그렇습니다.
Q. 지금까지 몇 명의 학생을 가르쳤나요?
앵커
지금까지 몇 분이나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까?
김연수 대표
지금까지 와서 배우고 가신 분들이 3년 동안 약 한 500여명 되는 데요.
제가 불교 공부도 나름대로 오래도 했고
또 현재 한국의 불교공부 트렌드도 많이 생각해보고 있고
또 저를 찾아오는 분들이 굉장히 교육을 많이 받으신 분들이 많아요.
교수님들, 그리고 전문 의사라든가, 심리학자들도 오시고 그런데요.
그런 분들이 대부분 색즉시공에 입각한 공부 법에 집중하셨다고 오세요.
공통적으로 가진 마음의 습관들이 약간 허무주의, 내지는
현실기피주의 도피주의 모든 것에 대해서 삶이라는 게 허망한 것이다,
이런 기본 태도를 갖고 오시다보니까
자기 삶에 대해서 좀 적극성이 결여돼 있어요.
아시다시피 반야심경을 보면 색즉시공이나 공즉시색이나 똑같은 가치기준 아니겠어요.
그리고 저는 공즉시색으로 풀면 기가 막힌 삶의 철학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진장 열외장이 곧 공이거든요.
그 공에서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꽃피우는 것이
현대 불자들이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도 마음공부도 하는 비결이 아닌가,
그래서 저희 프로그램은 그런 관점에서 입각해서 짜여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연배 제한이 없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를 이루지만 어린 분들도 많아요. 삶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거니까.
앵커
대표님은 변리사가 아니가 정신과 의사, 심리치료사 이쪽이 본업이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연수 대표
사실은요.
정신과 이쪽에서 우울증 환자 치료 못하면 우리 쪽으로 보내는 분이 두 분 계세요.
밝히지는 못하지만.
앵커
학교라고 하니까 우리 청취자분들이나 시청자분들은
학교 건물을 갖고 정규교육 과정 이런 콘셉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꼭 그런 것은 아니죠?
한양특허법인 건물 내에 학교가 그냥 있는 거죠?
김연수 대표
네 이름이 학교고 학원이라고 하셔도 좋고.
저는 대안학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서 시작했다.
그냥 사설 교육기관이지 이름이 학교라고 해서 문교부 인가를 받고 그런 기관은 아닙니다.
Q. 어떤 분들이 찾아오나요?
앵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마음의 상처를 받고 치유 못해서 많이 방황하는 거 같아요.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많이 노력했지만 은퇴할 때 되니까
그런 마음의 공허함을 느끼는 거 같아요. 그런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죠?
김연수 대표
많이 찾아오시죠.
Q. 그 분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앵커
그런 분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김연수 대표
내 인생에서 내가 얻은 게 무엇이냐,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이런 것을 생각하죠.
앵커
자녀들을 출가시킬 때쯤 되고 회사에서 명예퇴직이나
이런 부분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네요.
젊은 분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거 같던데
김연수 대표
아 그럼요.
Q. 젊은 분들의 고민은 어떤 건가요?
앵커
그 분들은 어떤 고민이 있던가요?
김연수 대표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겁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해요.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내 인생을 이 힘든 세상에서.
그럴 때 저는 질문이 틀렸다.
어떻게가 아니고 니가 누구냐를 똑바로 봐야 한다. 항상 그 이야기를 합니다.
앵커
저도 강의를 들어보니까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 불교경전에 나오는 얘기를 잘 소화되어서 정제되어서 해주시는 거 같은데
그 수강생 안에는 기독교 신자도 계시고 가톨릭 신자도 계시는 거 같은데
그 분들이 특별히 이질감, 반발심 같은 것은 없습니까? 괜찮습니까?
김연수 대표
저희는 우선 종교적 용어를 가능하면 안 쓰고요. 그런 거부감을 덜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하나는 사실 모든 종교인들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원인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전제를 합니다.
혹시 이 안에 종교적인 용어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쓰는 것뿐입니다.
어떤 종교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Q. 어떻게 다들 알고 찾아오시는 건가요?
앵커
그 분들은 어떻게 해서 온 겁니까?
특별히 알리는 방법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입에서 입으로
김연수 대표
그렇죠. 주로 아내가 하면 남편을 데리고 오고 자식 데려오고 형제 데려오고 친구 데려오고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하니까 지금 4년 정도 됐는데 1년에 백 몇 십 명씩 오백 여명이 거처 갔습니다.
앵커
저는 수업 끝날 때쯤 해서 시험을 보더라고요.
김연수 대표
학교는 끝날 때 시험을 봐야죠. 졸업 시험. 선문답 시험.
앵커
그리고 자기가 공부를 했던 분들한테 자기 느낌, 소감을 얘기해주는 부분이 있던데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말씀 하실 때 표정이 굉장히 밝으시더라군요. 어
떤 말씀까지 나오시던가요?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있었나요?
김연수 대표
대체 가장 많이 반복하는 말이 전 참 바보 같이 살았군요.
앵커
유행가 가사 같은 말인데
김연수 대표
유행가 가사입니다.
그것 때문에 통과하시는 분도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내가 밥만 먹고 주변에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분별하며 살아왔나,
더 잘 살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는 거죠.
앵커
2004년도에 기획을 하셨지 않습니까? 2009년도에 학교 문을 여셨는데 이제 그럼 4년?
김연수 대표
4년 정도 됐습니다.
Q. 마음학교에 대해 자평해주시면?
앵커
그럼 당초에 계획했던 그런 목표대로 순항을 하고 있습니까? 자평을 한 번 해주세요.
김연수 대표
저는 그런 목표라는 게 없어요.
사람이 목표라는 게 있다면, 그 목표가 달성이 안 되면 지치기도 하고 또 어떤 상처를 만들기도 하는데 저는 그냥 시작했을 뿐이고 내가 어느 정도 해야겠다, 하는 게 특별히 없어요. 그
냥 500명의 교사를 만드는 것도 그냥 바람일 뿐이지 그냥 그게 목표다, 라고는 안 합니다.
앵커
그래도 8명의 교사가 배출되지 않았습니까?
500명까지 가려면 꽤 멀리 뛰어야 하는데
김연수 대표
아닙니다.
앵커
아닙니까?
김연수 대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8명이면 그 다음에는 16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32명 될 것이고 몇 년 지나고 나면 한 해 숫자가 나올 지도 모르죠.
앵커
복리로 계산을..
김연수 대표
저는 복리로 계산을 합니다.
Q. 피올라 학교를 통해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앵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피올라 학교를 통해서 원하는 게 뭡니까?
김연수 대표
한마디로 우리가 종교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꾸 차안과 피안을 나누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고
지금 현실은 이렇지만 미래에는, 이렇게 분별을 한단 말이죠,
사실 그게 하나가 되는 것이 이상적인 종교잖아요.
또 깨달음을 지향하는 생활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극락정토, 내가 살아가는 이곳이 천국화, 이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죠.
앵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극락이다.
김연수 대표
극락을 만들어야죠.
나 혼자 극락인데 너희들만 지옥 사는 구나 해봐야. 그것은 소승적인 깨달음이고요.
실제로 극락이구나 했으면 극락을 그런 에너지를 나로부터 시작을 해서 전체가 나눠 갖도록 해야죠.
실제로 느끼도록 해야죠.
그게 마음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살아있는 힘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Q. 젊은 시절에 많은 방황을 하셨다고 하던데?
앵커
우리 시청자나 청취자분들 방송을 이렇게 들으시고 보시면서 도대체 이 분 누구야, 하실 것 같아요.
외계인도 아니고 누구나 먹고 사는데 다 열심히 뛰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이 분은 특별한 전혀 다른 세계에서 또 마음의 공부를 하고 계시고
또 그런 부분을 나누고 계시는데 개인적인 삶의 이력들을 또 여쭤보겠습니다.
앞서도 좀 언급을 하셨는데 젊은 시절에 방황을 많이 하셨죠?
김연수 대표
엄청 했죠.
앵커
어느 정도였습니까?
김연수 대표
남들은 대학 열심히 다니고 졸업해서 취직해야 할 때
저는 들어가자마자 다른 것 보고 여기저기 철학과 가서 듣고 수강하고 휴학하고
여기저기 팔도유람도 하고
또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둬서 절간에도 다녀보고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불교도 접하고요.
좌우지간 대학생 시절에 학원도 친구하고 차려서 학원 사장도 해보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Q. 언제부터 그런 고민을 하셨나요?
앵커
방황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습니까?
보통 남성들은 중고등학교 때 사춘기를 거치면서 내가 지금 뭐지,
뭘하는 거지, 하면서 방황심도 생기고 하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삶의 고민, 고뇌를 했습니까?
김연수 대표
그것은 사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때 제가 10살이었는데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앵커
조숙하시네요.
김연수 대표
어린 나이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까지는 뭐 아버님이 근엄하신 분이시라서 돌아가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크게 나한테 상처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보다는 이웃사람들이나 친척들의 시선이 굉장히 저를 불쌍하게 보는 거에요.
앵커
그렇죠. 10살 아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어떻게 크나, 걱정하죠.
김연수 대표
그렇죠. 그런 시선들이 정말 나는 불쌍하구나 큰 일 난 사람이구나 이런 마음이 많이 들었죠.
Q. 종교생활도 열심히 하셨다고 하던데?
앵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숙해졌을 텐데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셨다고요.
김연수 대표
고등학교 때는 제가, 휘문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기독교반 반장도 하고요.
ccc라고 기독교 청년회, 주로 대학생들이 하지만 거기도 쫓아다니고요.
고등학생 때에 무슨 ccc 강당에서 전국 고등학생 노래 경연대회도
제가 주최를 하고 그때는 정말 기독교에 폭 빠져서 살았어요.
앵커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컸었나보네요.
김연수 대표
그렇죠. 왜냐하면 어머님은 너무 그때만 하더라도 좀 얌전하시고 강인하신 면이 나중에는 생겼지만
처음에는 그러셨고 그러니까 종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앵커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에 빠져있느라고 대학 재수하셨죠?
김연수 대표
네
앵커
휘문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굉장히 잘 하셨던 걸로 제가 얘기를 들었는데
김연수 대표
그냥 조금 하는 수준이었고 그때 그것보다도 안동민 선생이라고 심령학자,
그 때 당시에는 유명했어요.
쫓아다니고 그리고 유석형 박사님이라고 내과의사이신데
그 분은 기공에 아주 전문가이신데 그 분 따라서 안 가본 데가 없고 좌우지간 친구들이 김도사라고 했습니다.
앵커
그렇게 고등학생 생활을 하다가 재수를 하셨고
대학의 전공을 뭐로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하셨을 것이고
거기에서 결단적인 결정을 내려서 미술공부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김연수 대표
네
Q. 미술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앵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주변에서는 상대나 법대를 가기를 원했을 텐데
김연수 대표
네 그렇죠. 근데 저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은사님 중에 한 분이
휘문 고등학교의 미술선생님 이셨던 이상욱 선생님이신데 그 분이 나중에 홍대 교수를 하셨어요.
그 분 때문에 제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앵커
아 네.
김연수 대표
그리고 그 분하고 서울대 미학과에 송영방 교수님이라고 계신데
그 분도 휘문고등학교 선배님이신데 그 두 분 영향이 아주 지대했죠.
앵커
근데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셨나봐요.
김연수 대표
제가 어려서부터 좀 사생대회 나가서 제가 1, 2등을 못하면 그게 이상한 대회였고요.
지금도 그런 게 있는데 저는 이렇게 어떤 아름다운 자연이나 색상을 보면 거기에서 어떤 에너지를 느껴요.
심지어는 소리도 느낍니다.
그래서 남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남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는 거에요.
그 다음부터는 그런 얘기를 안 하죠.
앵커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김연수 대표
어려서부터는 그런 게 참 저한테는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만물이 살아서 저한테 이야기를 걸고 보이지 않는 손을 저한테 건네주고
앵커
그런 예술적 끼가 자연스럽게 종교심으로 발현되면서
양쪽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김연수 대표
그럴 지도 모르죠.
앵커
자연을 특별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연수 대표
제가 지금 와서 보면 마음공부라는 게 가슴으로 하는 거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굉장히 머리로 하는 분들이 계세요.
머리로 하면 사람이 만든 언어 관습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근데 이 깨달음의 세계 내지 마음공부의 세계는
우리가 사람이기 이 전에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거든요.
근데 사람이 만든 마음자리를 가지고 놀기만 하지
그 자리 이전으로는 가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저는 가슴으로 느끼고 본인이 자꾸 변화를 시키고 변화를 하면 본인이 살아나고 느끼는 것들이 많아져요.
그러면 마음자리가 올 날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꾸 머리로만 찾으니까 힘든 거죠
앵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표님 아침시간에 우리 청취자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소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연수 대표
제가 좋아하는 노래는 팝송으로 치면 Nat King Cole의 스마일, 그런 노래를 좋아합니다.
앵커
네 Nat King Cole의 스마일을 듣고 계속해서 얘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노래
Nat King Cole- smile
앵커
서울대 미대를 수석 입학할 정도로 촉망받던 미술학도가
그림을 그리면서 또 방황을 하셨던 거 같은데 대학 다닐 때.
김연수 대표
저는 대학을 들어가면 시간문제지 다 교수가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저희 시대는 워낙에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데모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요.
그 저희 세대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그 때 당시에 보니까 집안에 돈이 없으면 프랑스나 미국 유학을 못 가면 또 못 하는 거더라고요.
제가 현실을 몰랐던거죠.
Q. 불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앵커
좌절을 많이 느끼셨군요. 그
러면서 어떤 계기로 불교와 인연이 되셨나요? 대학 다닐 때?
김연수 대표
휴학하고 친구들 따라서 놀러 다닐 때 제가 정릉에 삼정사라고 정수장 근처에 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 절에 친구가 공부한다고 해서 놀러 갔다가 발우공양을 하게 되었어요.
발우공양을 하니까 스님하고 있다가 그래 너 뭐 하는 얘냐,
친구 따라 와서 같이 밥 먹으면서 불교 얘기를 저한테 해주셨는데
그 때 굉장히 제가 과거에 겪었던 체험들,
그런 것 하고 일맥상통하는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제가 내면적으로 깜짝 놀랐어요.
불교라는 게 저는 그 전에는 현실에서 상처를 많이 입고 허무주의에 빠진 분들이 가는 현실도피의 장소,
이런 식으로 혼자 착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굉장히 심오한 게 있더라고요.
좀 알아봐야 겠다. 또 그 다음에 제가 스님 문하에 연수 스님이라는 분을 만났어요.
이 분이 저하고 이름이 같습니다.
앵커
그러네요
김연수 대표
그 분은 서울 농대 4학년에 다니다가 출가를 하셨어요.
저보다 나이가 4, 5년 위인데 서울 다른 절에서 만났는데
같이 밤 새워서 불교 얘기, 기독교 얘기, 영적인 것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까
너무 뭐라고 할 까. 저한테는 그렇게 도움이 되고 삶의 멘토였어요.
그래서 자연히 친해지고 쫓아다니고 그랬죠. 사람은 멘터가 있어야 영적으로 크는 거 같아요.
Q. 어떤 계기로 출가를 하셨나요?
앵커
어떤 계기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까?
김연수 대표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게 영적인 공부인데
내가 무슨 돈을 벌어서 돈을 잘 벌어서 뭐하고
우리 아버지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해야 할 문제가 깨달음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이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으니까 그것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되었죠.
앵커
출가를 단행했군요.
김연수 대표
참 그 때가 78년도 였던 거 같은데 1월이었던 거 같은데 해남 대흥사에 눈이 엄청 내렸어요.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데 그 길을 연수 스님과 둘이, 그
때는 광주에서 해남까지 가려면 비포장이었기 때문에 버스가 대 여섯 이상 걸렸어요.
거기에 눈이 왔으니 점심 먹고 출발했는데 어둑할 때 들어갔거든요.
그 눈길을 밝고 천년고찰을 들어갔는데
성우 스님이 학 같이 고고하게 등잔도 없이 촛불 켜놓고 있는데
제가 그것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삶의 한 순간이 아름다웠어요.
앵커
말씀을 그림을 그리듯하시네요.
김연수 대표
그러니까 미술학도 아니겠어요?
그 아름다운 영상이 제 가슴에 그냥 나도 일부분이 되고 싶다. 그 자리에서 결정이 됐죠.
Q. 행자스님으로는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앵커
그 자리에서. 절에서는 행자스님으로서는 어땠습니까?
김연수 대표
동국선원에서 스님이 내려오시면 같이 있지만 서울 올라가시면 저 혼자 있는 거죠.
그리고 철밥통 같은 것을 가지고 스님 진지를 제가 날랐죠.
그것을 들고 모시고 식사 드시게 하고 맛있는 거 너 먹으라고 내어주시면
그것도 옆방에서 얻어먹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와 손주, 아주 아기자기하게 재미났게 보냈습니다.
Q. 환속하신 이유는?
앵커
행자스님 생활을 2년 정도 하고 환속을 하셨는데 그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연수 대표
그때 성우 스님을 감싸고 안 좋은 일도 있었고 불교 법난도 있었고
앵커
10.27법난.
김연수 대표
네 저로써는 그 안에 말하기가 뭐한 그런 체험도 있고 해서 떠나고 싶었던 거죠.
Q.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는 어땠나요?
앵커
그래서 환속을 해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텐데 어머님 표정이 어땠습니까?
김연수 대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어머니가 몇 년 만에 뵀는데
그때는 어머니한테 달랑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나갔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반쪽이 되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죠.
환속을 한 후에는 복학을 할 것이냐,
아니면 어떤 고시를 봐서 공무원 시험이라든지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가.
그래서 그것을 하던 중에 친척 분이 변리사 시험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분이 특허청에 공무원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이것을 내가 한 1, 2년 만 시간을 가지고 해보고 아니면 복학을 해보겠다.
그래서 아는 교수님들한테 부탁도 해보고 그래서 시간을 더 벌어놓고 공부를 했는데 다행히 빨리 붙었어요.
83년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복학을 한다 하다가 돈벌이 잘 되는데 그냥 못하게 되었죠.
앵커
변리사로서 계속 생활을 하신 거군요.
김연수 대표
네 그렇습니다.
Q. 학습에 특별한 재능이 있으신가요?
앵커
학습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으신가 봅니다.
변리사도 수석으로 합격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김연수 대표
저는 남들보다 집중력이 좀 좋아요.
지금도 집중하면 남들보다 굉장히 빨리 외워요.
앵커
네, 환속하지 않고 그때 스님을 계속 하셨으면 한국의 대표적인 스님이 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김연수 대표
그건 모르겠습니다.
앵커
물론 가정이지만 그런 방황을 거쳐서 생활인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서 에너지를 쓰시고 계신데
김연수 대표
변리사가 되고 나서 사실 남보다 어떤 이공계 쪽인 전문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대학을 마친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면 초급대를 졸업한 정도의 학력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2, 3년 기간 동안은 정말 고 3때 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하루에 12, 3시간씩 공부를 했어요.
변리사로서 나의 어떤 위상을 잡고 차별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단 변리사 시험을 수석 합격을 하니까
김앤장 같이 큰 법무법인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받아주었고 그런 데서 좀 있다가 얼마 안 있다가 제가 개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월급쟁이를 하면 인생을 안락하게 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마음공부를 못하겠더라고요.
앵커
내 시간을 쓸 수가 없다.
김연수 대표
네
앵커
결국은 그렇게 물질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마음공부의 끈을 놓지는 않으셨군요.
김연수 대표
네 자유롭고 싶었고 마음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Q. 어떻게 마음공부를 계속하셨나요?
앵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마음공부를 계속 하셨습니까?
김연수 대표
사실은 변리사를 개업하고 나서는 거의 한 10년간은 못했죠.
정말 어머니한테 잘 하고 그리고 처자식을 잘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때는 변리사가 참 모자랐어요.
제가 합격할 때 3명 합격했어요.
변리사 수가 모자랐기 때문에 개업하는 것도 쉬웠고 돈벌이도 쉬웠죠.
점점 많아져서 요즘은 굉장히 많이 뽑지만.
그래서 40정도 되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들이 점점 일어나죠.
그래서 제가 36살인가, 7살 그때부터는 하루에 한 시간씩 참선을 시작했어요,
예전에 젊었을 때도 참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이제 또 위빠사나도 하고 그러면서 여기 저기 수행단체, 사실 우리나라 절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그런 공부를 시키기는 하지만
그게 스님들에 비하면 공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재가자는 뭐 따라가기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컨센서스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좌절을 가져오는 거에요.
어떻게 이 현실과 마음공부를 병행할 것인가.
이게 저한테는 정말 큰 문제였어요,
그래서 해결책으로 외국 명상서적도 많이 보고
심지어 제가 번역도 하고
그리고 여기저기 좋다는 수행단체를 찾아다녀보고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를 했습니다.
Q. 독자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언제부터?
앵커
40대 열심히 수행단체를 찾아다니고 마음공부를 할 곳도 찾아보고
그러면서 이것도 내가 독자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부터였습니까?
김연수 대표
제가 어떤 수행단체를 굉장히 오래 다녔는데 한 5년 다닌 곳이 있었어요.
5, 6년을 다녔는데 거기서 저를 인가도 해주고
교사 자격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수 있는 권리도 주고
그런 데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이제 그렇다면 다른 수행단체들이 최고라고 내세우는 어떤 깨달음의 기준,
이런 것들을 내가 충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보니까
우선은 선문답이 머리로 대충은 알겠는데 안 풀리더라고요.
스스로 충실하게 풀어보면.
그러니까 이게 내가 혹시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가. 하는 점이 자꾸 반성이 되고
그러면서 독자적인 공부를 계속 시작하고 제가 나름대로 이제 어떤 깨어남이 있었어요.
아 마음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앵커
그때가 몇 살 때죠?
김연수 대표
그때가 2002년입니다.
앵커
우연히 선원에서 하신 겁니까? 수행하시다가
김연수 대표
수행 단체에서 수행을 하다가 이것 가지고 안 되겠다고 해서 혼자 산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을 보면서 이게 햇살이 아니고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몸 전체가 햇살과 한 마음이 되면서 이게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보았죠.
앵커
불교도 이제는 새롭게 바뀌었으면 하는 그런 자각도 하셨을 텐데
김연수 대표
속가에 재가자인 제가 외람될 수도 있는데
제가 저를 찾아오는 많은 수행자분들이 재가 수행자분들이죠.
그런 분들이 보면 대부분이 마음이라는 게 습관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게 업습입니다.
자꾸 되풀이 되는 어딘가 집을 짓고 되풀이되는 무엇이 있어요.
그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색즉시공이에요.
한국 불교 재가자들의 색즉시공에 너무 세뇌가 되어있어요.
그래서 즉심즉불, 이런 얘기를 참 많이 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공, 색 이런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거든요.
이것은 빈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니고 자기가 쓰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이 와서는
대개 현실을 도피하거나 어려운 문제, 가족 간의 갈등, 마음의 상처,
이런 것들을 굉장히 오랜 세월 30년 참선하신 분들도 그런 것들을 어쩔 수 없어 해요.
가족 간의 상처, 자녀와의 대화 불통.
또 어떤 회사에서의 상사와 동료와의 불통, 그런 것을 굉장히 어려워해요.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 말씀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공부는 하면 한 만큼 그 공부가 삶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야지
이게 공부 따로, 삶 따로라면 이것은 관념적인 공부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서 니 마음에서 끝없이 힘을 끌어내고 그 힘을 끌어내되 거기에 머물지 말라.
그러면 끄집어내는 그 가운데서 마음이 무엇인지 깨치게 돼요.
근데 오히려 색즉시공을 오히려 열심히 하다보면
공상이나 법상을 자꾸 만들어서 자기가 수행자 상을 자꾸 만들어요.
저는 현대인들한테 맞는 수행법은
오히려 공즉시색이 현대인들의 어떤 물질생활의 바쁨, 기질, 마음의 없음.
이런 것을 녹이고 변화시키기에는 오히려 더 나은 게 아닌가 해요.
그래서 거기에 입각한 수행체계를 만든 것이죠.
Q.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앵커
피올라 학교의 강의 체계도 거기에 맞추어져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피올라 학교를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마음 학교도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계획을 좀 여쭙게 싶습니다.
김연수 대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할 뿐이에요.
그냥 할뿐인데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저희 학교를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과
소통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저한테는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고
그 분들이 저한테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내 삶이 변했다,
이것들이 점점 퍼지게 하는 것이 저의 목표이고 그게 계획입니다.
앵커
할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지속적으로 소통 공간을 만들어내겠다,
하는 게 의지가 아닌가 싶고 계획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연수 대표 네 감사합니다.
앵커
네 한 시간여 동안 김연수 대표님과 말씀을 나누어보았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담아놓은 경전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마음자리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런 마음의 원리를 김 대표께서는 잘 소화해서 우리 대중에게 잘 설명해주고 계신데요.
그런 마음공부의 결실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내놓는 김 대표님께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인연 이야기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