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성소와 임마누엘 / 3) 성소의 문(門) : 하늘가는 유일한 문 - 예수 그리스도
죄인이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 면전으로 나아가는 길에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것은 문이다. 그것은 성소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에는 이것 외에 첫째 칸 성소로 들어가는 문과 둘째 칸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 등 세 개의 문이 있다. 성소를 두르고 있는 흰 세마포 휘장은 죄(俗)와 거룩(聖)을 구별하는 표이다.
아무도 이 휘장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죄인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그것은 죄인을 보호하는 휘장이었다. 죄인에게 있어 이 휘장은 하나의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완전한 회복, 곧 완전한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시기까지는 이 보호막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들의 속죄 봉사를 통하여서 하나님 면전으로 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떤 면에서 휘장이 가로 막고 있는 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완전한 회복은 잠재적인 것이다. 그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전히 제거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의미의 임마누엘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하나님 면전을 향하는 그 길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단계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10:7, 9). 또한 “내가 진실로 진실로(헬라어로 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10:1)라고 하였다.
다시 여기서 그의 신적 존재를 나타내는 유명한 구절, “나는 문이다” 에도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성소 문 앞에서 ‘이리로 들어와서 살라’고 초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성소를 두르고 있는 휘장은 다 흰 세마포이다.
그러나 성소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문은 특별히 네 가지의 색깔(청색, 홍색, 자색, 그리고 흰색)로 짜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성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는 그 네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마치 사복음서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종으로,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그리고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각각 그리고 있다.
이 네 색깔도 마찬가지다. 청색은 예수님의 신성을, 홍색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고난을, 자색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고 흰색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문어귀에 서서 우리를 성소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것과 같다.
그 초청에 응하여 들어가기만 하면 다음의 성경 말씀처럼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문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장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있을까?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나는 길이요.” 여기서도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가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7:9절)”이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11절).
이 두 구절에서도 ‘에고 에이미’가 사용되었다. 흔히 지도자들은 목자로 비유되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목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한 것이었다. 그들은 “절도며 강도”였으며(1절), 그들의 특징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들이었다(1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였다(2절).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시23편에 잘 나타나 있고, 요한복음 10장에서도 그 특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3절). ⑵ 목자는 양의 앞에서 인도한다(4절). ⑶ 양은 타인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5절). ⑷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1절).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목자는 문자 그대로 양의 문이었다. 그 당시, 양들이 양 우리로 들어올 때 목자는 양의 형편을 하나하나 살피고 상처 난 양에게는 기름을 바르고 양이 다 들어왔는지를 알기 위해 양의 수를 세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양이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한 목자는 이제 문을 닫고 자기 숙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숙소는 바로 양이 있는 ‘우리’의 문이다. 목자는 문 한가운데서 가로질러 눕는다. 그의 발은 문 이쪽, 그의 머리는 문 저쪽으로 가로질러 누우므로 목자는 문자 그대로 양의 문이 된다.
도둑이든 강도이든, 그리고 맹수이든 양을 훔치거나 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자를 넘어가야 한다. 목자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문을 지킨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15절). 성소 입구 문의 네 가지 색깔은 각각 예수님의 네 가지 특성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사명을 일깨우신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는 문 아닌 문으로, 길 아닌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로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왜냐하면 오직 길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이다. 이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불러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 구원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저 우리 밖에 있다. 그 사명이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날마다 양의 문으로 통과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성소의 문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문이요, 길이 되신다. 구원과 영생은 이 문밖에 없다. 이 길밖에 없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오직 구원의 문은 예수님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