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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이미지로 현실과 초현실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편들
근래 한국시의 다양한 현상 속에는 무겁고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迷路) 같은 언어에서 벗어나서 밝고 가벼운 언어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시편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응모된 시편들에서도 그런 경향의 시편들이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가벼운 이미지로 현실과 초현실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편들이 소통과 공감이라는 관점에서 주목되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유정남, 김현주, 성정숙 시편들이 선정되었다.
유정남의 시편들 중 「화실에 내리는 눈」은 젊은 시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미완성의 그림이 샤갈의 마음에 내리는 눈이 되기를 꿈꾸던 초현실적 환상이 싱그러운 시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이런 환상적인 언어감각이 「아버지의 자전거」에서는 현실 속 아버지의 죽음을 고물장수 리어카에 실려 가는 뼈대만 남은 자전거로 비유하고, 이를 새로운 삶으로 치환하여 "내 스케치북 속의 아버지가/무지개 바퀴를 굴리며 구름 너머 노을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는 상상의 이미지를 그려내어 무거운 현실을 밝고 가벼운 언어에 담아내고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시적 재능을 감지하게 한다. 「공단동의 밤」에서도 청년 실업이라는 현실문제가 "옷이 되지 못한 원닩"이라는 이미지로 비유되고 "출고 되지 못한 직조의 꿈"이라는 새로운 현실언어를 생성하고 있다. 현실과 초현실이 교직된 개성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유정남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펼쳐낼 시편들이 기대된다.
김현주의 시편들 중 「여름날의 수족관」은 여름날 수족관을 보며 수족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물고기의 "울타리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그려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은 이미지가 시인 자신의 꿈과 연관되는 비유로 읽혀져서 시인의 독특한 시적 상상력을 감지하게 한다. 「단풍」에서도 봄이 지나 "배롱나무 꽃이 사라진"것을 "나무의 성장통"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이 성숙해 가는 과정과 연결하여 "털어내고/ 놓아버려야/ 비로소 얻을 수 이다"는 메시지를 음미하게 한다. 「휴일 산책」에서는 "도시의 소음이 눈뜨기 전" 풀벌레, 비둘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진정한 삶의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무장이 해제된/몇몇 사람들의 민낯이/헐거워 반갑다"고 가식 속에 묻혀 사는 도시인들의 삶의 모습을 가벼운 시적 언어로 꿰뚫어 그려내고 있는 것이 소통과 공감이라는 관점에서 평가 되었다. 김현주 시인의 시편들이 기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정숙의 시편 중 「여」는 물 위에 드러나지 않고 물 속에 숨어있는 바위를 인간세상의 바다 속에 잠겨서 묵묵히 살아가는 참된 존재자의 모습에 비유하여 펼쳐내는 시적 상상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런 시적 상상이 「꽃물」에서도 봄꽃의 눈부신 색을 보며 터뜨리는 "저 땅 속 깊은 곳에/고운 빛깔의 샘이 있는지"라는 의문형의 구절이 참신한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이 지식과 관념에 의해 행동하고 생각하는 어른의 마음에서 벗어나서 천진하고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런 관점에서 시인의 소중한 본성을 인식하게 하는 시로 평가 되었다. 「나이테」는 "138억년 우주의 나이테가 내 안에 있다"는 첫 구절이 시의 공간을 우주로 확대하여 인간과 별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는 본질적으로 같은 원소로 되어 있다'는 화두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정숙 시인의 신선한 사유의 시 세계가 기대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은 최종심의에서 선외로 밀린 이경제의 시편을 아깝게 생각하면서 언어와 시상의 절제를 요망하였다는 말은 전한다. 이런 점 보완하여 다시 투고해주기 바란다.
-------------- 심사위원 : 신규호, 심상운(글), 정연덕, 손해일, 조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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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우수작품상 수상시인 <유정남> 작품 : 화실에 내리는 눈 / 아버지의 자전거 / 공단동의 밤
화실에 내리는 눈
내 스무 살의 열차는
사슴의 눈망울이 그리운 샤갈의 마을로 떠났지
세상을 겉돌며 나뭇잎으로 흔들리던 늦가을
밤의 폭우를 피해 찾아간 곳에서
젖은 머리칼의 형광등 아래 뼈만 남은 이젤을 세우고
밤을 데생했지
도화지 위에서 번번이 음영과 각을 놓치던 4B 연필이 그린
하얀 피부에 희미한 미소를 건네주던
석고상은 말이 없었지
어둠이 내리는 창가에서 별들도 샤갈의 마을을 꿈꿨지
연탄난로 위에서 보글거리던 물의 밀어들
노란 주전자가 수증기를 뿜어 유리창에 그리던 풍경화는 몽환적이었지만
나의 그림은 비에 젖어갔지
흐려지던 풍경을 잃고 비틀거리던 붓질이
캔버스 가득 몰아온 적란운
단 한 번의 어두운 눈빛으로 뇌우에 놀란 색채들은 빛을 잃어 흩어졌고
꽃들은 팔레트에 짜놓은 물감으로 굳어갔지
햇빛이 온 세상에 잠든 색을 깨우고 나면
젖은 화폭엔 무지개가 뜨고 꽃이 필까
계절이 다 가기 전 기차는 백색의 겨울 속으로 떠나고
내 손에 들린 미완의 그림 한 점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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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전거
명덕상회 짐자전거는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전거였다
석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연탄이나 쌀자루를 싣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그란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자랐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온 동네 아낙들의
왁자한 웃음이 몰려가
천장에 매달린 삼십 촉 백열등이 상점을 지키는 밤이면
아버지는 방바닥에 사탕을 늘어놓고
어린 딸에게 산수를 가르쳤다
가끔은 물감 향 번지는 스케치북 속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힘센 짐자전거가 때론 울기도 한다는 비밀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한 번 녹이 나기 시작한 체인은 자꾸만 궤도를 거부하고
바람의 소리로 일구어낸 집 문패 밑에서
빠르게 부식되어 갔다
사시사철 땀냄새를 굴리던 아버지는
연등 같은 꽃상여에 눕고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고물장수 리어카에 실려 쩔그렁거리는
풍경 속으로 떠났다
단발머리 교복 위에 단풍비가 내리던 날
자전거 페달을 밟으시던
내 스케치북 속의 아버지가
무지개 바퀴를 굴리며 구름 너머 노을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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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동의 밤
옷이 되지 못한 원단들이
어둠에 덮여 퇴적층처럼 쌓여 있다
철심이 드러난 천장에
가까스로 매달린 형광등이 물구나무를 섰다
문짝이 사라진 창고에는 가랑잎들이 들락거리고
칠이 벗겨진 시멘트 벽에 달라붙어 있던 작업수칙서는
수칙을 찢고 바람과 키득거린다
별을 새김하던 로고
반품 딱지가 붙은 박스 옆구리에 붉은 낙인이 찍히고
촘촘하던 방직의 시간이 해체된 기계들은
얼룩진 바닥에 고철의 머리를 처박고 있다
옷이 되어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다
날개를 디자인하여 몸에 달고 싶었다
푸른 날들을 아로새기며 감기던
색색의 실들이 빛을 잃고 누워 있다
단단한 퇴적의 계절 속으로 가라앉은 이력서들
실업의 지층에 갇혀 숨을 멈췄다
불 꺼진 고치 속으로 몸을 누인 실타레들은
헝클어진 채 잠들고
맘껏 펼쳐보지 못한 청춘의 빛바랜 원단들 위로
소멸의 시간처럼 내려앉은 먼지들
출고되지 못한 직조의 꿈들이 쌓인 창고 유리창마다
직녀성의 눈물이 이슬로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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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우수작품상 수상시인 <김현주> 작품 : 여름날의 수족관 / 단풍 / 휴일 산책
여름날의 수족관
수족관에 납작 엎드린 너
가두리에 가두어진 줄도 몰랐던 바보
놀라운 손놀림으로
언제 누구의 식탁에 꽃상여 타고 올라앉을지 모른다
능소화 한가로이 고운
미지근한 오후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혀 내민 개 한 마리
주인집 대문 지키고 있지만
너는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
울타리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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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배롱나무 꽃이 사라진 것은
어느 순간의 일어었다
아마도
쌀뜨물 받아
게딱지랑 숭덩숭덩 썰어 넣은 호박으로 맛을 낸 동태찌개가
식탁에 올라왔던 그 즈음이었으리라
아침밥 지으려 살 퍼오려고 나간
발코니 창으로
은행나무며 단풍나무며 느티나무 이파리가
곱게 물든 모습으로 들어와 있었다
털어내고
놓아버려야
비로소 덛을 수 있는
나무의 성장통을
그저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간단하고 만만하고
미안한 일이다
이제 너랑 같이 나도 익어가야겠다
그래서
겨울을 나고
그래야
봄을 또 만날 수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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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산책
도시의 소음이 눈뜨기 전
풀벌레는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주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비둘기 소리도 구우구우 느긋하게 들렸다
어느 집 부엌에서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지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허기를 부른다
무장이 해제된
몇 몇 사람들의 민낯이
헐거워 반갑다
골목 사이사이를
기분 좋은 바람이랑 같이 다녔다
태풍이 빗겨간 곳에서
모과가 노랗고 단단하게 여물어가고 있었다
마음을 부려놓고 돌아오는 길
내가 사는 동네의 하늘은
기가 막히게 깨끗했다
초가을 아침 선물이다
티라미슈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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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우수작품상 수상시인 <성정숙> 작품 : 여 / 꽃물 / 나이테
여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 이름이었다
오래 전 사진을 뒤지다가 마주친 명사
--물속에 잠긴 바위
그의 위치는 결코 그의 선택이 아니었겠지
우리 모두의 좌표처럼
대수롭잖게 산등성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흔들리던 땅세서 솟아났는지 그 기원도 희미하지만
이제 그것은 의미가 없다
차가운 물살 저 아래
몸은 닳고 깎이면서
꼼짝할 수 없는 침잠
목메이던 오열고 가라앉히고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길고 긴 물결의 매질 속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덩이에 더하여
그만의 사리(舍利)가 영글어 갔다
몸 닳은 향기가 피어나고
여, 나는 이제 그를 내 속에서 만난다
거친 파도에 부대끼며 잠 못 드는 밤
내 안 어디에선가 말없이 떠오르는 피난처
언제부터인가 내가 기대온 은자(隱者)
그는 이제 내게 해인(海印)을 내비친다
물 위에 내려앉은 별빛과 달무늬의 초대에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저 먼 바닥에서 빙긋 웃고 있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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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물
저 땅 깊은 곳에
고운 빛깔의 샘이 있는지
봄꽃의 눈부신 색들은
어디서 왔을까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 속에서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인가
봄켵이 돌아오면
꽃망울 터뜨릴 채비하느라
개나리 뿌리는 싯노란 물을 찾아내고
목련 뿌리는 하얀색 물을 길어 올리는지
저 시커먼 흙덩이 밑에서
샘이 아무리 꽁꽁 숨어 있어도
꽃나무 뿌리는 색색가지 꽃물을 끌어내는
은밀한 재주가 있나 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연분홍을 훔쳐낸 사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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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천문학자*가
138억년 우주의 나이테가 내 안에 있다네
내가 만들어지기에는 그토록 오랜 시간의 준비가 있었다는 말인가
공해로 찌든 밤하늘 별을 다시 쳐다본다
이 지구의 70억명 인구 속에서
나 혼자인 것같이 느끼는 수많은 시간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나 겨우 기억하는
좁디좁은 내 반경
근시안의 세계에 웅크린 내게
더 멀리 더 넓게 뻗어가 보라
별은 말한다
내 몸을 만든 물질은 혈연 너머
피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간을 거슬러
수많은 별들의 생멸(生滅)에까지 이른다네
어떤 것도 함부로 생겨나지 않았고
이 몸이 저 우주에 맞닿아 있다고
우리가 지구에 체류하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138억년 앞에서 부스러기 밖에 아닌 것 같지만
내 속에 모든 나이테를 공유하는 것은
그 긴 시간의 유물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겠지
작은 몸뚱이에 깃든
태초의 울림을 감싸 안는다
이 목숨만이 아니라
조약돌 하나의 의미도 달라진다
삶의 색깔이 다르게 다가온다
*홍승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2016년 3월 중잉일보 기사)
첫댓글 유정남 시인 김현주 시인 성정숙 시인
세 분의 등단을 축하드리며 시문학 한 가족 되심을 환영합니다.
좋은 작품으로 활동 많이 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