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하노이가이드"입니다.
호이안은 베트남 중부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입니다다.
1세기부터 벌써 람압포(Lam Ap Pho)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7~10세기 향료무역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중국에서 인도로 가던 모든 배는 이곳에 기항해 물자를 보충받고 말라카
해협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해양 실크로드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는 신라승 혜초(慧超)도 이곳 호이안에 들렀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79년부터 베트남은 안남(安南)이란 이름으로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호이안에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것은 16~17세기입니다.
중국, 일본, 인도 사람은 물론이고, 서양 사람들의 식민지 정책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까지 이곳에서 교역했습니다.
이때는 비단과 향료 외에 도자기가 중요 교역품으로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이안은
18세기 말 응유엔 왕조 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802년 지아롱(Gia Long) 황제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우며 가까운 다낭항을 프랑스에 할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베트남 중부의 무역 주도권이 호이안에서 서서히 다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0년간 호이안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베트남의 중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관광과 문화도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호이안은 인구 12만의 작은 항구도시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1999년 호이안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유럽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베트남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호이안은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30km 길게 펼쳐져 있는 차이나 해변 끝인 투본 강 하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2세기에서10세기까지 약800년에 걸쳐서 중국과 인도를 잇는 해상항로에 주요 정박지였으며, 1,300년 역사의 참파왕국의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호이안은 15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서는 동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의 위치에 있었으며, 중국, 일본,동남아와 이슬람세계의 무역선이 드나들던 활발한 국제 무역항이었습니다.
특히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는 유럽, 미주, 페르시아권과 동북아시아를 이어주는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했었습니다.
그 시기에 마카오, 말라카와 함께 포르투칼, 네덜란드, 일본, 중국 등의 무역선들에게 매우 중요한 거점이였으며, 프랑스 식민시절에는 중부지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현재 호이안시의 구시가지에 보전되어 있는 유적들은 봄에 북동풍을 타고 이곳으로 와서 4개월 정도 거주하다, 여름에 남풍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원래의 주인들이였습니다.
지금은 발자취가 거의 사라지고 일본교만이 남아있지만, 16-17세기에는 일본인 집단거주지역이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약 천명의 일본인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또한 호이안은 베트남 중남부에서 중국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며, 현재의 오래된 건물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화교들의 회관으로 건축한 건축물이며, 지금도 여전히 중국계 베트남인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이안에 일본인들이 등장한 것은 대략 1560년경...13세기부터 동남아시아지역에서는 왜구의 출몰로 한국과 중국의 왕조들은 골머리를 앓았다합니다.
14세기에 조선과 명은 “왜구”문제를 이유로 일본과의 사무역을 엄금하고 일부 지정된 항구를 통해 조공무역만 제한적으로 허용했습니다.
특히, 명은 일본상선의 입항을 철저히 금지시키는 해금정책을 1371년부터 시행하였고, 이 해금정책은 1567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92년에 일으킨 조선침략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조선과 명으로부터 직접 조달할 수가 없는 어려움에 처하자 일본은 베트남의 호이안을 매개로 한 교역활동을 통해 필요로 하는 중국산 상품을 구입하였는데, 호이안 주변에서 산출됐던 품목은 황금, 계피, 침향, 기남, 백단향, 후추, 바다제비집, 사탕, 상아, 코뿔소뿔 등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상인들은 1567년 해금정책이 해제되면서 남해무역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베트남에 진출하였습니다.
중국상인들은 비단, 도자기등을 운반해와서 베트남산 소금, 계피, 황금 등을 사갔으며, 동남아 각 지역의 항구를 순회하면서 상품매매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7세기 중반 중국대륙에서 명-청교체가 일어나자, 청나라의 압박을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호이안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또한, “정성공”부자가 대만과 복건성 해안지역을 근거로 반청복명 운동을 지속함으로써, 호이안은 반청운동집단에게 식량과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특수를 누렸습니다.
호이안의 중국인들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공고한 결속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출신지 별로 “방”이나 “회관”같은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회관 [복건회관, 광조회관, 중화회관, 해남회관, 조주회관]
중국상인들의 역동적인 자취가 배어 있는 5개 회관의 건립 목적은 동향인의 이익보호였고, 상인들의 업무 연락과 협의라는 주기능 외에도 자선사업과 동향인에 대한 구제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강한 지역성과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회관들은 숙박,상품유치,업무협의,물가결정등 각종 상업활동의 중심센터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기업종의 보호신, 출신지 조사나 선현등을 제사 지내는 종교적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중화회관
“천후성모”를 모시기 위해 1741년에 건립되었으며, 오방회관이라고도 부른는데, “오방”이란 객가, 광동, 복건, 조주, 해남 등 5개의 상인집단을 일컫습니다.
공자와 1922년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자 “손문”을 모신 사당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13명의 열사를 그린 초상화도 봉안되어 있으며, 후원에 있는 건물의 벽에는 손문의 유언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해남회관
뜨득황제 때 해남도에서 건너온 108명의 상인들이 해적으로 오인되어 꽝남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해남해관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08명의 상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883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중앙제단에 108명의 상인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왼쪽에는 이 회관 건립자들, 오른쪽에는 재신인 “조공명”의 조상이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주회관
1845년에 광동성 조주 출신 중국인들에 건립되었습니다.
조주회관에서는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는 “복파장군”을 숭배하고 있고, 좌우로 재부와 행복을 관장하는 신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호이안에 있는 중국인들의 회관 중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관공사
“관공사” 또는 “관제묘”라고 불리며 중국인들에게 충절과 의리의 표상으로 존경을 받는 관우를 봉헌하기 위해 1653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쩐씨사당
1802년 황제의 사신으로서 중국으로 출발을 앞둔 시점에 선조들의 은덕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쩐 뚜 냑”이 약 200여년 전에 건축하였습니다.
떤끼고가옥/풍흥고가옥/호이안 역사문화박물관/무역도자기박물관...등











광조회관
광동출신 상인들에 의해 1885년 건립되었습니다.
“광조회관”이라 쓰여진 현판이 걸린 정문을 들어서면 앞마당에 하늘로 힘차게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한 조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른편 벽에는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맺는 장면이, 왼편 벽에는 관우가 유비의 두 부인을 수레에 모시고 가는 장면이 각각 부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상인집단도 강한 결속과 의리가 생명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원래는 공자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으나, 후에 불상을 모신 불교사원으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징한궁”이란 현판이 걸린 본전에는 뱃사람들이 좋은 날씨와 안전운행을 비는 대상인 “천후성모”와 상인들의 재신으로 “제백성군”이라 불리는 “조공명”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당 한 가운데 관우상이 있고, 좌우에
흰말과 붉은 말이 있다. 붉은 말이 그 유명한 적토마입니다.







복건회관
현재 복건회관이 있던 자리에 1692년 호이안에 거주하는 베트남 사람들에 의해 초가지붕을 가진 “금산사”란 절이 세워졌었습니다.
이 사찰은 1759년 호이안에 터를 잡은 복건성 출신 상인들에게 팔렸는데, 상인들은 금산사를 재단장하여 “복건회관”이란 현판을 달았습니다.
정문에서 계속 들어가면 “금산사”란 현판이 걸린 삼관문을 지나 “정성단결”이란 현판을 볼 수 있는데 고향을 떠나와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강한 단결력을 나타내주는 글귀입니다.
뱃사람들의 수호신인 “천후성모”는 “천비낭낭” 천상성모“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데, 산동반도에서부터 중국의 해안지대, 대만, 동남아지역 등 바다뱃길이 닿는 광범위한 지역에 ”천후성모“를 모신 사당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복건회관에 안치되어 있는 배 모형은 천후성모의 사당에 고기잡이 배 모형을 바침으로써 앞으로 얻게 될 이익이나 이미 얻은 이익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후성모”를 모신 방 입구 양쪽에 그녀를 시종하는 붉은 색 피부의 순풍이(예민한 청력)와 천리안(뛰어난 시력)이 서있고, 중앙 홀에는 천후성모가 등불 빛을 받으며 가라앉는 배를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반청복명”의 기치를 걸고 청나라에 대항해서 싸웠던 6명의 장군들이 그려져 있는데, 명청교체기에 복건성은 “반청복명”운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였습니다.
복건성은 정성공이 대만과 함께 반청정권을 수립했던 근거지역이기도 합니다.








일본교
길이 18m, 너비3m로 다리가 먼저 건축되고 약 반세기 후에 부속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일명 “래원교”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호이안의 로고 디자인에 사용될 정도로 명실상부한 호이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화폐 20,000동 뒷면 그림)
1593년 또는 1637년이라 단언한 것도 있으나 사실은 정확한 건축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리에서 절로 연결되는 문 위에 “래원교” 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절 안에는 도교신인 “북방진무대제“가 모셔져 있습니다.
진무대제는 북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현무대제“라고도 칭하며, 청룡,백호,주작과 함께 사방을 수호하는 신입니다.
진무는 본래 현무라고 썼는데, 송황실에 조현랑이란 이름의 시조가 있었기 때문에 “현”자를 쓸 수가 없어 진무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잘 구경하셨나요?
베트남여행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글과 사진을 올리고 있습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