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일제치하에 태어나서 해방 전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치열했던 풍상을 온몸으로 겪어온 노인들.
격동기의 한복판에서 오롯이 모든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나이든 노인들의 한올 두올 엮어진 지혜와 경륜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자산이다.
쓰라린 시기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그 혹독한 난국을 우직스럽게 버텨온 내핍의 정신이 몸에 배인 울진 지역의 노인들.
격동의 근현대사를 울진 땅에서 관통해오면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보고 듣고 체험해온 노인들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울진 땅을 무대로 펼쳐졌던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 6.25전쟁 당시의 상황들은 일정 부분 울진군지 등에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손에 잡힐 듯이 육성으로 생생하게 재구성한 저술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울진군지 등의 저술 대부분은 기록과 숫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정치 이념과 당시의 정세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재단되어 있는 점 또한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은 지나간 시대를 일정 부분 왜곡하게 하기도 하고, 엄연히 현실적이었던 그때의 갖가지 시대 상황들을 금세 잊히고 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노인들의 기억을 하나 둘 끄집어내어 그 증언을 채록(採錄)하고 재구성하는 구술사(口述史)가 근래에 들어서 더욱 중요한 역사의 한 연구방법으로 인정받는 이유도 이것이다.
사람들이 지닌 기억의 힘은 과거 어느 때의 강렬했던 사건을 아주 오래도록 선명하게 저장하는 특징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울진 지역의 시대적 상황을 전해줄 노인들도 대부분 앞서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동안 역사 연구는 대체적으로 국가 전체의 역사 수준에서 이루어져 왔고, 지역사 또는 지방사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제는 육성으로 증언해줄 이들 조차 점점 사라지는 이 시대에 과거 지역 주민의 경험과 생활에 기반을 둔 구술 자료를 통해 예전 어느 때의 시대적 단편을, 그 질곡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 목격, 기억에 의존해서 재구성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늙어서 죽으려니까 자꾸 눈물이 나지요”·····울진면 화성리 꽃방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울진 지역의 근현대사를 육성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몇 명 남지 않은 노인인 남종술(南鍾述. 92세. 울진읍 읍내리)씨는 죽변면 화성리 꽃방마을(화방동, 花坊洞)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죽변면 화성리지만, 그때는 행정구역상 울진면 화성리였지요. 우리 집안은 아주 윗대부터 화성리를 터전으로 삼아 논밭전지를 일구고 살아왔습니다. 아버님은 ‘남’씨 성에 ‘이’자 ‘범’자를 사용했고, 북면 사계리에서 화성리 남씨 집안으로 시집오신 어머님은 ‘주’씨 성에 ‘화’자 ‘길’자를 썼지요. 부모님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저는 집안의 막내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제일 위가 ‘분이’ 큰누님인데 북면 주인리 전씨 집으로 시집을 갔어요. 다음이 ‘찬하’ 큰형님인데 화성리 꽃방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한학을 배워 한평생 선비로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이 ‘영술’이라는 둘째 형님인데, 세월을 잘못 만나서 그렇지, 시대를 제대로 만났으면 정말 큰일을 했을 분이지요. 형제자매 가운데 넷째인 ‘학술’ 형님은 죽변에서 조선소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필순’이라는 누님은 북면 덕구로 시집을 갔는데, 첫아기를 낳다가 그만 잘못돼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여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저지요. 제 어머니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서 얼굴도 몰라요.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늙어서 죽으려니까 자꾸 눈물이 납니다.”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남종술씨는 둘째 형님인 ‘영술’씨와 셋째 형님인 ‘학술’씨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다. “둘째 영술이 형님은 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한학을 배우러 서당에 다닌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정시대에 학교 다닌 사람들보다 일본말을 더 유창하게 했어요. 어릴 때 남의 집으로 머슴살이를 가서 고생을 하며 세경을 받아서 제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도와주었던 분도 둘째 형님이었지요. 셋째 학술이 형님은 영술이 형님이 소개를 시켜 주어서 일본인 기술자로부터 조선소 목수 기술을 배워 죽변에서 조선소를 운영했지요. 학술이 형님은 당시 죽변에 들어와서 조선소 기술자로 일하던 ‘마쓰바라’라는 일본인 기술자로부터 목수 기술을 배웠고, 후에 조선소를 인수해서 돈을 많이 벌었지요. 그때는 다 나무로 만든 배였으니까, 조선소에 일급 목수 기술자들이 여럿 있었지요. 조선소에서는 주로 작은 나무배를 만들고, 그 배에 작은 엔진을 얹어서 징어리(정어리)같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나무배에 작은 발동기 엔진을 얹은 그런 배를 ‘아이노꾸’라고 불렀지요. 아이노꾸 선은 징어리가 한창 잡힐 때 만선으로 들어오면 280관인가 300관인가 그 정도 실을 수 있었으니까, 아주 큰 배는 아니었지요.”
“어릴 때는 동네 사람들이 논둑에 나있는 쑥을 몰래 캐 갈까봐 하루 종일 논둑을 지키고는 했지요”·····“위쪽의 이삭을 잘라서 범벅을 해 먹는 보리를 작두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남종술씨의 어린 시절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먹고사는 일이 늘 힘겨울 때였다.
남씨는 일제의 단속이 심해서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구(송기)조차 마음대로 벗겨 먹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왜 초근목피라는 말이 있잖아요? 말 그대로 풀과 나무껍질조차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없을 때였습니다. 우리 집은 서마지기짜리 논 두배미가 꽃방 마을 ‘떡장’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개골에 있는 논이다 보니 논둑이 다른 곳보다 많이 넓었어요. 봄이 되면 그 논둑에 쑥이 참 많이 올라오고는 했는데, 어릴 때는 동네 사람들이 그 논둑에 나있는 쑥을 캐 갈까봐 하루 종일 그 논둑의 쑥을 지키고는 했지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동네 사람들이 금세 그 논둑의 쑥을 다 파가고는 했으니까요. 그때는 봄철이면 쑥이 거의 주식이다시피 했어요. 밀을 방깐(디딜방앗간)에 가서 찧으면 좋은 가루는 국수나 수제비를 해먹고, 속에 밀지울(밀기울)은 논밭 둑에서 파온 쑥뿌리와 섞어서 절구에다 함께 찧고 나서 쑥범벅을 해먹었지요. 그래도 쑥은 먹기가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쑥은 부드러워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잘 넘어가고, 또 절대 배탈이 안 났어요. 일정시대에는 소나무는 손도 못 대게 해서, 봄에 소나무에 축축하게 단물이 올라도 소나무의 송구를 벗겨먹을 엄두도 못 냈습니다.”
남씨는 그 당시에는 농사도 잘 안돼서 논 한마지기에 나락 한포대만 거두어 들여도 소출이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때는 농사도 얼마나 안됐던지 논 한마지기에 나락 한포만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했지요. 한마지기에 여덟 말만 나와도 농사를 잘 지었다고 했으니... 밭농사도 마찬가지였지요. 밭에 보리라고 심어 놓아도, 보리를 벨 때 낫에 손을 베일까봐 겁날 만큼 키도 작고 알갱이도 몇 개 달리지 않았어요. 혹시 작두보리라고 들어봤나요? 봄에 보리가 필 때 보리 줄기의 아래쪽 씨굿은 것은 버리고, 보리줄기의 부드러운 위쪽만 잘라서 소죽 끓이는 가마솥에 볶아서 말립니다. 그 다음에 방깐에 가서 찧고 ‘얼개미(체)’로 거르지요. 그리고 밀지울과 섞어서 범벅을 해먹었어요. 그래도 보리는 부드러워서 먹기가 쉬운데, 밀은 그렇게 못해먹어요. 좁쌀지울도 질겨서 그렇게 범벅을 써서 못 먹고요. 그렇게 위쪽의 이삭을 잘라서 범벅을 해 먹는 보리를 작두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일정시대에는 어쩌다 쌀이 생기면 그것도 무조건 공출을 해가니까 늘 보리 짚가리 속에 숨겨두었다가 제사나 명절 때 조금씩 꺼내서 먹고는 했지요.”
남종술씨는 1922년에 창립된 울진 강습소가 3년 후인 1925년에 승격된 울진제동학교(蔚珍濟東學校)를 졸업했다. “화성리 꽃방동네가 지금이야 많이 변했지만, 일정시대만 하더라도 구학(구학문, 한문) 수준은 울진 지역에서도 최고였지요. 가까운 마을인 사계, 소곡, 호월리, 명도리는 물론이고 북면 신화리에서도 화성리 꽃방까지 한문을 배우러 다녔으니까요. 제가 제동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화성리에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 호월리를 비롯해서 이 동네 저 동네에 하나둘 학방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남자아이들의 경우 보통 7살이 되면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저도 7살에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우리 집 사는 형편이 글 값을 내면서 학방에 다닐 처지는 되지 못했고, 주로 큰형님에게서 천자문을 배웠지요.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없이 사는 집들은 맏이만 겨우 공부를 시키던 때라서 둘째형님과 셋째형님은 먹고 살기위해 일을 하느라고 천자문은 배우지도 못했어요. 저는 막내다 보니까 큰형님에게서 천자문이라도 배울 수 있었던 거지요. 12살에 제동학교 2학년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 제동학교는 인근에서 유일한 학교여서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원덕읍 호산에서도 여러 명이 제동학교에 다녔는데, 특히 두 부자가 나란히 제동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울진군도 강원도에 속해 있었지요. 화성리 꽃방에서 울진향교에 있던 제동학교까지 걸어 다녔는데, 바짝 말라서 부서지지 말라고 짚신을 가끔씩 물에 적셔가면서 그렇게 다녔습니다. 짚신은 힘이 없어서 자갈밭 길을 조그만 걸어 다녀도 쉽게 떨어져 나가고는 했어요. 그러니 자연히 짚신은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닐 때가 많았지요.”
남종술씨는 울진제동학교(蔚珍濟東學校)를 16회로 졸업했다 |
16살에 제동학교 졸업·····‘고바야시(小林)’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죽변 회조점(回漕店)에 근무·····17살에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으로·····‘샤이꼬와’여관과‘미쓰이(三井)’야간 중학교
16살에 제동학교를 졸업한 남종술씨는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16살 되던 해 3월에 제동학교를 16회로 졸업했습니다. 영술이 둘째 형님은 구학도 하지 못했고, 따로 공부를 한일도 없는데 일본말을 아주 잘했어요. 어느 날 둘째형님이 저를 부르더니, ‘너는 어쨌든 한평생 지게나 지는 팔자를 면해야 하니 일본에 건너가서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더니 죽변에 있던 어느 회조점(回漕店)에 취직을 시켜 주었지요. 회조점은 배로 싣고 항구로 들어오는 화물을 취급하는 회사인데, 죽변에는 고바야시(小林)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조점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부산에서 그릇이나 고무신 같은 생필품을 싣고 원산까지 팔러 다니던 배가 4척이 있었습니다. 육로로는 교통이 하도 불편하니까 다들 생필품을 해상으로 날랐던 거지요. 일본 본토에서 생필품을 생산해서 부산으로 싣고 온 다음에 다시 배로 부산에서 원산까지 다니면서 항구마다 들러서 각 지역별로 생필품을 공급했던 겁니다. 그때는 후포항에도 큰 배가 정박하지 않았고, 영덕 축산항을 거치면 곧장 죽변항구에 배를 댔지요. 그런데 배가 워낙 커니까 항구 안으로는 못 들어오고, 먼 바다에 큰 배를 띄워놓고 작은 배로 물건을 항구 안까지 오가며 날랐습니다. 지금이야 엄청나게 큰 철선들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그 배가 얼마나 크게 보이든지... 작은 배로 항구 안까지 싣고 오는 운임이 그때 80원 이상 했으니까 회조점이 규모도 컸고 돈도 참 많이 벌었지요. 엄청난 화물 물량이 항구 안으로 옮겨져 왔어요. 저는 고바야시가 운영하던 죽변 회조점에 취직을 해서 운임을 계산하는 경리를 겸해 심부름도 하는 소사(小使)로 한 1년 정도 근무했지요.”
고바야시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죽변 회조점에서 1년여 동안 근무한 남종술씨는 17살이 되던 해에 일본 본토행 여권을 발급받아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죽변에서 회조점을 경영하던 고바야시 사장의 조카가 일본 규슈 하까다 지방에서 아주 큰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샤이꼬와’라는 그 여관은 규모가 얼마나 큰지, 여관에 딸린 기생만도 서른대여섯 명이나 됐어요. 지금도 서울에나 가면 그런 규모의 여관을 볼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그만한 규모의 여관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컸고, 지체가 높은 양반들도 수없이 들락거렸어요. 그 여관에서 낮에는 여관 심부름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밤에는 미쓰이(三井) 야간 중학교에 다녔지요. 3년제 미쓰이 야간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미쓰이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는 둘째형님도 여권을 만들어서 일본으로 건너왔지요. 그리고 한참 뒤에는 한국에 있던 둘째 형수님과 조카들까지 모두 다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아마 대동아전쟁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둘째형님이나 저나 일본에서 계속 살았을 겁니다.”
‘미쓰이 중학교’졸업 후‘미쓰이 주식회사’에 취직·····“첫 월급으로 63원을 받았는데, 당장 부자가 된 것 같았지요. 일은 힘들고 고됐지만 쌀 한가마니에 10원할 때였는데, 쌀 여섯 가마 이상을 첫 월급으로 받은 셈이었으니까요.”
남종술씨는 일본에서 미쓰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 주식회사에 취직을 해서 5년을 보내고, 일본 본토로 건너간 지 8년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온다. “미쓰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 주식회사에 다녔습니다. 미쓰이 중학교는 미쓰이라는 일본인이 사장인 미쓰이 주식회사에서 설립한 학교였지요. 그러니 미쓰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그 회사에 모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미쓰이 주식회사에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63원을 받았는데 당장 부자가 된 것 같았지요. 일은 힘들고 고됐지만 쌀 한가마니에 10원할 때였는데, 쌀 6가마 이상을 첫 월급으로 받은 셈이었으니까요. 삼정주식회사는 옷감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저는 천 견본을 가지고 다니면서 주문을 받아오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옷 만드는 천을 모두 다 국가에서 배급할 때였어요.”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중·일 전쟁 이후 미국이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자, 일본이 1941년 12월에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 일명 대동아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대동아전쟁이 터지면서 일본 정부에서 일본 내의 기업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삼정주식회사 본사가 일본 본토에서 서울로 이전해오게 됩니다. 그때 저도 한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이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서 많이 잊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니 일본말을 아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 삼정주식회사 본사에서 중국으로 파견 근무를 일년에 6개월씩 다녔지요. 중국 하얼빈, 신경, 봉천, 천진 등으로 파견을 다녔는데, 주로 대련에서 많이 근무했습니다. 양복기지 영업을 다니다보면 일본 사람들이 별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면서 양복기지 한 벌 얻을 수 없느냐고 사정해도, 양복기지가 여유가 없어서 항상 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중국으로 파견을 나가서 영업을 다닐 때는 마침 국방색 양복 기지가 새로 출시됐는데, 2미터 50센티만 주면 남자들 양복 한 벌이 나왔는데...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장사하는 데는 아주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 났어요. 항상 친절하고 다소곳하고, 그런 점은 정말 배울만한 점이지요. 삼정주식회사를 다니면서 정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을 6개월마다 오가면서 영업을 하는데, 중국 쪽은 기후와 물이 안 맞아서 피부에 뭔가가 툭툭 불거지고는 했어요. 그 흔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데군데 남아 있지요. 그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중국인을 더럽고 불결하다면서 거의 개 취급을 하다시피 했어요. 지금 시대가 변해서 개가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는 것은 그때 중국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 대접 받는 것이지요.”
서울로 이전한 미쓰이(三井)주식회사 그만두고 고향 울진으로 내려와·····울진군청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식량계 차석으로 근무·····첫 월급으로 67원 받아·····“호리 이찌로라는 울진군청 내무과장은 직원들에게 아주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내무과장에게는 울진군수도 꼼짝을 못했어요.”
남종술씨는 일본에서 미쓰이 야간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미쓰이주식회사에 취직해서 5년여를 보내고, 대동아전쟁으로 인해 미쓰이주식회사 본사가 서울로 이전하고 난 다음에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1년 3개월 정도를 근무하다가 미쓰이 주식회사를 그만 두고 고향 울진으로 내려온다.
“일본 본토에서 대동아전쟁을 피해서 한국으로 나온 지 중국의 각 지점을 옮겨 다니면서 1년 3개월 정도 근무했지요. 그러다가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해서 사표를 낸 것이 아니라, 다들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한 때라서 양복기지 판매가 부진하면서 점점 회사 내 인원은 남아돌고, 그래서 그만 두게 되었지요.”
꽤나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던 삼정주식회사를 그만 둔 남씨는 울진군청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삼정주식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먹고 살려면 우선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요. 그래서 무작정 울진군청을 찾아갔어요. 군청을 찾아가서 내무과장에게 삼정중학교 졸업장을 보여 주니까 당장 내일부터 군청에 출근하라고 말하더군요. 그 당시는 전국적으로 각 지역의 군수와 직원들은 전부 다 한국 사람이고 내무과장만은 일본인이 임명될 때였지요. 일정시대였으니 당연히 일본인인 내무과장의 말 한마디는 군수보다 훨씬 힘이 있었습니다. 울진군청 내에서는 내무과장이 최고로 높았어요. 내무과장의 결정이 곧 울진군청의 최종적인 결정이었을 때니까요. ‘호리 이찌로’라는 울진군청 내무과장은 직원들에게 아주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내무과장에게는 울진군수도 꼼짝을 못했어요.”
삼정중학교를 포함해 근 10년여 삼정주식회사와의 인연을 뒤로 하고 고향 울진으로 내려온 남종술씨는 울진군청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식량계 차석으로 근무하게 된다. “일정시대에는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할 때였는데, 군청에 들어가서 식량계 차석으로 근무했지요. 당시에 한 사람당 쌀 한홉반에 부식으로 미역 쭐거리 등을 배급했어요. 미역 쭐거리는 군데군데 상해서 문드러지기도 하고 엉망이었지요. 식량계 차석으로 한달 근무하고 받은 첫 월급이 67원이었습니다. 식량계 차석으로 1년 8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내무과 행정계로 자리를 옮겼어요. 행정계에는 지난 4월에 작고한 울진읍 호월리의 장보균씨가 차석을 맡고 있었습니다. 장보균씨와 저는 동갑으로 제동학교도 함께 다녔었고, 평생 친구로 지냈지요. 장보균씨 부인은 나중에 알고 보니 집안 누님이 되기도 했고요. 장보균씨가 살아 있어서 제 옆에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니 말이 맞다’하면서 맞장구라고 쳐 주었을 텐데... 장보균씨는 집이 아주 잘 살았어요. 인근에서 천석꾼이라며 부러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 울진군청 행정계장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용운씨였습니다.”
남종술씨는 부인 신일순씨와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사진은 맏아들 용철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가족과 일가친척들 |
27살에 6살 연하의 신일순씨와 결혼·····“결혼할 때 말을 타고 원남 기양리까지 가서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3일 동안 처가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해가 바뀌어 이듬해 4월이 돼서야 우리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남종술씨는 27살의 나이에 6살 연하의 신일순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다. 남씨의 결혼은 중매결혼이기는 했지만,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중매결혼과는 조금 다른 극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삼정야간중학교를 졸업하고 시모노세키에 있던 삼정주식회사에 다닐 때 한국과 일본을 드나드는 배에 근무하던 특수형사인 ‘오가다’형사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 본토로 밀항선을 이용하여 돈 벌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저를 불러서 통역을 부탁하고는 하면서 친해졌지요. 어느 날인가 6명의 한국인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들어왔다가 그 형사에게 잡힌 겁니다. ‘오가다’형사에게서 연락이 와서 경찰서로 갔더니 6명이 잡혀 와서 취조를 받고 있는데, 알고 보니 울진 원남 갈면 사람 3명과 근남 굴구지 사람 3명이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본 본토까지 돛단배를 타고 왔다니 얼마나 대단한 모험을 한 겁니까? 타향 땅에서 고향 울진 사람을 만나고 보니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오가다’ 형사에게 고향 사람이니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요. 양복지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니 귀한 양복감 한벌을 주고 밀항 사건을 무마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제가 일본으로 건너가고 1년 후에 뒤따라 들어왔던 둘째형님이 시모노세키항구에서 바다 밑을 파서 건너편에 있던 모지를 연결하는 수중 지하 전철공사장의 한 구간을 맡아서 공사하는 업자로 있었어요. 울진에서 밀항해온 6명을 둘째형님의 공사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도 했지요. 대동아전쟁이 나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올 때는 그 사람들의 배표도 제가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종술씨가 일본 삼정주식회사에 다니면서 이따금 밀항한 한국 사람들의 통역을 해줄 당시에 만났던 6명 가운데 한사람이 남씨의 부인 신일순씨의 사촌오빠가 된다. “대동아전쟁 당시에 삼정주식회사 본사가 서울로 옮겨오고, 저도 서울로 와서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밀항 사건을 무마해주었던 6명 가운데 서너 사람은 서울까지 직접 찾아오기도 했어요. 그 중 근남 굴구지에 살던 임선욱이라는 사람이 원남 기양리에 사는 사촌여동생을 저에게 소개시켜 준거지요. 임선욱이라는 사람은 울진소방서 앞쪽에 사는 한학자 임무승씨의 사촌형이기도 합니다. 굴구지가 터전이던 임씨 집안이 저의 처가가 된 것이지요. 그때 제가 27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나이가 꽉 찬 노총각이었어요. 임선욱씨가 장차 처가가 될 집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색시가 될 사람 얼굴이나 한번 보여 달라고 하는데도, 처가 될 사람이 계속 피해서 끝끝내 얼굴도 자세히 뜯어보지 못하고 결혼한 셈입니다. 그때 처될 사람이 21살이었으니 그 사람도 이미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는데, 하도 얼굴을 피하니까 처음에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도 했었어요. 어쨌든 노총각 노처녀가 만났으니 서둘러 음력 9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당시에 ‘신’씨 성에 ‘정’자 ‘만’자를 쓰는 장인어른이 원남면장이었는데, 북면면장도 지냈지요. 결혼할 때 말을 타고 원남 기양리까지 가서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3일 동안 처가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해가 바뀌어 이듬해 4월이 돼서야 신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달이 지난 다음에는 퇴상이라고 해서 신부와 함께 처가에 가서 5일 동안 묵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7월 달에 퇴상이라고 구리재를 걸어 넘어서 처갓집으로 가는데, 아이고 얼마나 덥고 뜨겁든지... 처는 제가 71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올해로 21년째 나네요.”
27살의 나이에 21살의 신일순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남종술씨는 아래로 4남매를 두었다. 용철(남. 65세. 포항시. 공무원 퇴직), 경숙(여. 60세. 서울시), 용대(남. 55세. 서울시. 공무원), 용활(남. 49세. 울진읍. 공무원)씨가 그들이다.
“해방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울진군 부회장을 맡고 있던 주진철씨가 하는 말이‘야, 니가 군청에 계속 근무해봐야 과장밖에 더 되겠나? 울진에서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인재도 너밖에 없으니 군청을 관두고 나와서 우리와 함께 국민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더라고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소속되어 울진 지역의 사회, 국민운동을 한 남종술씨는 1956년 국민회중앙총본부 이승만총재의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 | 해방 후까지 울진군청을 다니던 남종술씨는 17년여 만에 사표를 제출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울진 지역의 사회, 국민운동을 하게 된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에 결성된 우익 계열의 범정당 정치 단체로, 줄여서 독립촉성국민회, 독촉국민회, 독촉, 국민회, 대촉국 등으로도 불렸다. “1945년 해방이 되기 직전에는 일제의 주민 공출이 대단했어요. 해방이 되고 나서는 일정시대에 군청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해코지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달아나고 대부분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해방 후에 군청에 출근하니 함께 근무하던 동료 공무원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자리마다 텅 비어있다시피 했어요. 그래도 저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주민들에게 별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해방 후에도 계속 근무할 수 있었지요. 예를 들자면 일정시대 말기에는 해마다 봄철이면 냇가 한쪽에서 개를 잡아놓고 삼사일씩 골패(骨牌)나 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어울려 놀고는 했습니다. 노름인 골패를 하는 사람들도 그때는 군청 공무원들이 단속을 했어요. 저는 그런 현장을 발견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여기는 뭐하는데, 이렇게 골패나 하고 그러니껴?’하면서 소리치면, 대부분 알아서들 골패를 하는 계모임 자리가 흩어지고는 했지요. 제가 그렇게 처신한 것은 삼촌의 영향이 컸습니다. 삼촌은 항상 지역 사람들과 원수를 지면서까지 공무원 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해주고는 했어요. 해방 후에도 군청에 잘 근무하고 있는데, 당시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울진군 부회장을 맡고 있던 주진철씨가 하는 말이 ‘야, 니가 군청에 계속 근무해봐야 과장밖에 더 되겠나? 울진에서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인재도 너밖에 없으니 군청을 관두고 나와서 우리와 함께 국민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 울진에서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 나중에 도의원이라도 한번 출마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면서요. 주진철씨는 외가 쪽 친척이기도 하지요. 뒤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죽변에 살던 죽포장(竹圃丈, 전영직)이 ‘남종술이가 쓸 만한 것 같으니 가서 설득해서 잘 해줘라’고 했던 것 같았어요. 죽포장은 당시에 촉성국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거의 이름만 걸고 있었고 실질적인 일은 모두 주진철씨가 했지요. 일정시대에 군청에 근무하면서도 주민들을 고발하지 않고 나름대로는 인심도 잃지 않고 살았으니, 저를 앞장 세워서 일을 시키면 욕먹을 일은 없겠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17년여 울진군청에 근무하던 남종술씨는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이던 주진철씨의 권유로 군청에 사표를 제출하고 나온 다음에 촉성회의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다고 전해준다. “정부수립 이전에 국민화합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촉성회가 만들어졌잖아요? 촉성회 회장이면 지금으로 얘기하면 국회의원 같은 거였지요.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 6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자동으로 촉성회 회원이 되었어요. 나중에는 60세 이상만으로는 국민 화합이 어렵다고 해서 전국적으로 60세 이하의 주민들로 청년단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좌익이 75퍼센트나 됐는데, 그 좌익과 대립하려고 청년단을 만들었던 거지요. 각 시군별 촉성회 회장들이 서울 명동에 있던 촉성회 사무실에 모여서 이승만 박사를 추대했습니다. 울진군은 죽포장이 촉성회 회장을 맡았고, 북쪽 부회장은 주진철씨가, 남쪽 부회장은 울진군수도 몇 년 했던 김수근씨가 각각 맡았습니다. 저는 촉성회 총무를 맡아서 윗분들 심부름을 주로 했지요. 아마도 나중에 도의원이라도 하려면 미리부터 이곳저곳 얼굴이라도 익혀두어야 한다면서 총무를 맡겼던 것 같습니다. 산해 전영경(山海 田永璟) 선생도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마음에 안 들고, 저에게 맡겨 놓으면 마무리가 잘되어 안심이 되니 늘 저를 찾았지요. 역시 저도 그 어른 심부름을 하면서 손해 본 것이 전혀 없고요. 그런데 정작 끝까지 도의원은 출마조차 해보지 못했지요. 그때는 선거법도 혼란스러울 때라서 곳곳에서 돈 선거가 난무했는데, 도의원 출마하는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지 알지 못했어요. 울진 지역에서는 장성업씨가 초대 도의원을 지냈지요. 선거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1978년에는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한 일도 있었는데 낙선했지요. 선거법이 물러 터졌던 때인데, 상대 후보들은 자루에 돈을 넣고 다니는데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선거 운동하러 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지요.”
“산해장(山海丈)의 심부름으로 애국지사들의 재판 관련 기록을 찾으러 서울로 올라갔어요. 서울에서 사흘밤, 청주까지 비행기로 내려가서 하룻밤, 다음날 부산까지 비행기로 내려가서 이틀 밤을 묵고 울진으로 되돌아왔지요.”
남종술씨는 산해장(山海丈)의 중요한 심부름을 4번 다녔었다며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산해장의 부탁을 받고 서울까지 중요한 심부름을 네 번 다녔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먼저 울진군지를 만들 당시의 심부름으로 서울 남산도서관에 올라간 일이 있지요. 최초의 울진군지는 우리 집안의 형님인 남석화씨가 만들었어요. 남석화씨가 예전에 울진군이 삼화면 이었을 당시에 삼화면장을 하면서 군지를 만들었던 거지요. 1914년 지방제가 개정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울진군은 평해군과 별개의 행정단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14년에 하나의 군으로 통합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산해장이 울진군지를 만든 지 오래돼서 울진군지를 다시 만들어야 하니, 서울로 올라가서 울진군이 삼화면 이었을 때의 군지를 찾아서 베껴오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서울로 올라가서 묻고 물어서 남산도서관을 찾아갔어요. 3층에 가서 채 10장도 안 되는 삼화면지를 찾아 베껴서 울진으로 내려왔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한 1년 뒤에 울진군지를 만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돈이 없을 때라서 군지를 여러 권 찍지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교통편도 참 불편했었지요. 당시에 강원여객이 춘천서 횡성과 묵호를 거쳐서 울진까지 오고는 했는데, 목탄을 때서 움직이는 버스다보니 도중에 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중간에서 같잖아지기가 일쑤였지요.”
울진군지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을 삼화면지를 찾으러 서울 남산도서관까지 산해장의 심부름을 다녀온 일 이외에, 남종술씨는 박정희대통령 당시에 서울고등법원까지 올라가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기록을 찾으러 다녔던 일을 들려준다. “어느 날 산해장이 울진 출신 애국지사 11명의 명단을 주면서 서울고등법원에 올라가서 재판과 관련한 기록들을 찾아 달라고 하더군요. 박정희대통령 때 5개월 이상을 감옥살이 한 애국지사들의 재판 기록을 제출하면 보상과 함께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비석을 세우는 데는 80만원이라는 돈이 지원됐어요. 산해장의 부탁을 받고 서울고등법원에 올라갔더니, 마침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어제 누군가 유관순 열사의 관련 기록을 보여 달라고 하고서는 기록 가운데 1장을 찢어가서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저는 마침 사돈인 안동용이라는 사람이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하고 있어서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관련기록을 찾아보라면서 책을 내미는데, 책이 얼마나 두껍고 옛날 책인지 저는 하루에 한 장도 제대로 살피면서 읽어 내려가기가 힘들었어요. 그런 애로사항을 얘기하니까 안동용 사돈이 문서를 잘 찾는다면서 어떤 사람을 한명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 돈 3천원을 주고 소개받은 그 사람을 통해서 애국지사들의 관련기록을 다 찾았습니다. 그때 돈 3천원이면 지금은 30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을 텐데,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어찌나 빨리 문서를 뒤적이며 관련 기록들을 찾아내는지 귀신같았어요. 서울에서 이틀 밤을 묵고 난 다음에 3일째 되던 날 정작 산해장의 재판 관련기록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안동용 사돈이 저를 동아일보 사옥으로 데리고 갔어요. 동아일보 자료실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안동용 사돈이 고등법원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출입이 가능했던 거지요. 자료실 창고에 들어가서 산해장 기록을 어렵게 찾아서 복사를 했지요. 그리고 다음날은 청주에 내려가서 또 다른 애국지사 한분의 기록을 찾고, 부산 구덕도서관까지 내려가서 나머지 애국지사들의 기록을 찾아서 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사흘밤, 청주까지 비행기로 내려가서 하룻밤, 다음날 부산까지 비행기로 내려가서 이틀 밤을 묵고 울진으로 되돌아왔지요. 울진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 시간이 지나서 온정면의 삼사, 죽한 비석을 비롯해서 애국지사인 백운(白雲) 주진수(朱鎭洙)선생과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의 비를 세우는데도 총무를 맡아서 열심히 쫓아다니고 그랬어요. 황만영 선생 비석은 황씨 집안에서 돈을 모아서 세웠는데, 북쪽 추진위원장이 산해장이었고, 남쪽 추진위원장이 기성면의 안동용씨였습니다. 저도 그때 총무를 맡아서 쫓아다니며 돈도 3원을 냈었지요. 울진군에 세워져 있는 애국지사의 비는 산해장을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 다 그분이 앞장서서 일을 추진했으니까요.”
남종술씨는 제2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사진은 1978년 5월 12일 울진극장 앞에서 열린 후보자 합동연설회 |
“산해장은 이웃 사람들의 신임이 두터워서 필요한 돈을 잘 마련하기도 했고, 제가 어디로 심부름을 다니면서 여비가 부족하다고 말하면 왜 돈이 부족한지를 따져 묻지도 않고 필요하다는 돈을 금방 보내주고는 했지요. 한번 믿음을 준 사람이면 이유를 묻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는 심지가 굳은 분이었습니다.”
1978년 제2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할 당시의 남종술씨 | 남종술씨는 애국지사인 산해장과 관련되는 얘기를 하면서, 산해장은 이웃의 신임이 두터워서 각종 경비 등의 돈이 필요하면 금세 어딘가에서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는 했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울진 지역 주민들의 신임이 두터웠고, 한번 선택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그런 인물이었다고도 전해준다. “산해장은 특별한 분이었어요. 삼화군지를 찾으러 서울로 올라갔을 때 5천원을 차비로 주었는데, 당장 가진 돈이 없다면서 어디로 나가더니 금방 돈을 만들어서 저에게 건네주었지요. 산해장은 신기한 것이 심부름을 시키면서 여비를 주더라도 당신 수중에 돈이 없으니까 어디로 나가서 빌려주는데, 금방 빌려주고는 했어요. 그만큼 주위 사람들이 산해장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애국지사들의 명단을 찾으러 서울, 청주, 부산을 돌아다닐 때도 청주에서 여비가 떨어져서 산해장에게 돈이 떨어졌다고 연락을 했더니, 금방 추가되는 여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때는 우체국을 통해서 돈을 주고받았지요. 산해장은 이웃 사람들의 신임이 두터워서 필요한 돈은 잘 마련하기도 했고, 제가 어디로 심부름을 다니면서 여비가 부족하다고 말하면 왜 돈이 부족한지를 따져 묻지도 않고 필요하다는 돈을 금방 보내주고는 했지요. 한번 믿음을 준 사람이면 이유를 묻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는 심지가 굳은 분이었습니다. 산해장은 말수가 적었어요. 항상 몸으로 움직이면서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런 면은 가까이에서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저에게 큰 모범이 되었지요. 또한 산해장은 원리원칙이 있는 분이었지요. 죽변면에 죽포 전영직선생의 비석을 세울 때의 얘기인데, 다들 애국지사라고 하자는데 산해장만은 반대했습니다. 죽포장이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자금으로 그 당시 산지 한 마리 값인 3원의 자금을 댔는데, 애국지사는 과하고 그냥 지사라고 부르는 게 적합하다는 것이었지요. 산해 전영경선생과 죽포 전영직 선생은 집안이고 형제뻘인데, 보통사람들은 오히려 남들이 높여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을 법도 한데, 산해장만은 끝까지 지사로 하자고 주장했고 결국 지사라는 호칭을 붙여서 비석을 세웠습니다. 주변 사람들이나 후세들이 비웃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 집안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격에 어울리지 않게 호칭을 높여가면서 비석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산해장의 원리원칙이 이긴 거지요. 비석에 들어갈 문구 하나 제대로 기록해 놓지 못한다면 후대의 사가들이 오늘날 비석을 세운 우리들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6.25전쟁이 일어나든 해에 지금 명성목욕탕 부근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맏아들이 여섯 살이었고, 큰딸이 삼치레만이었을 때였지요. 처가 베 홑이불로 딸을 등에 업고, 저는 아들 손을 잡고 걸리다가 업어주다 하면서 피난을 떠났어요.”
남종술씨는 33세 되던 해에 6.25 전쟁을 겪는다.
남종술씨는 울진향교 장의로도 활동했다. 1969년 울진향교 석전추향제 | “6.25전쟁이 일어나든 해에 지금 명성목욕탕 부근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맏아들이 여섯 살이었고, 큰딸이 삼치레(삼칠일)만이었을 때였지요. 처가 베 홑이불로 딸을 등에 업고, 저는 아들 손을 잡고 걸리다가 업어주다 하면서 피난을 떠났어요. 첫날 평해까지 걸어가서 이틀 밤을 묵고 나니까 평해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난리였어요. 그래서 다음날 영해까지 다시 걸어 내려갔습니다. 오후 1시쯤에 영해에 도착했는데, 동네 부인회에서 피난민들에게 주먹밥 하나씩을 주는데 꿀맛처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같이 신발이나 좋았으면 먼 길을 걷기라도 편했을 텐데... 울진군청에 근무할 때 ‘찌까다비’라고 하는 신발을 나누어 주었는데, 신발이 금방 닳아버려서 거의 맨발로 걷다시피 했어요. 영해에 도착해서는 변전소 가까운 곳에서 그날 밤을 자고, 이튿날 다시 걸어서 포항까지 내려갔어요. 목적지는 대구에 살고 있던 사촌 처남 집이었지요. 포항에서 대구로 올라가려는데 포항에서 군인들이 길을 막고 보내주지를 않더라고요. 그때 대한청년단 단증을 보이고 군인들에게 기차표를 얻어서 화물을 싣는 ‘고빼 기차’를 타고 대구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대한청년단 단증은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대구 사촌 처남 집에서 한 스무날 조금 넘게 있었어요. 사촌 처남은 대구에서 자전차방을 했는데 아주 잘 살았어요. 저는 그냥 놀고 있을 수 없으니, 대구에 있으면서 하루 일당 60전을 받으면서 기차 철로 놓는 곳에서 일했지요. 쌀 한되 값이 10전 할 때였으니 대단한 돈이었지요. 그러다가 대구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하면서 다시 고빼 기차를 얻어 타고 영천까지 내려와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영천에서는 자다가 목이 말라서 근처 ‘봇도랑’에 엎드려서 물을 아주 맛있게 배불리 마셨는데, 이튿날 일어나서 보니 기름도 둥둥 떠다니고 평소 같으면 전혀 입에도 대지 않을 물이었어요. 그런데 전쟁 와중에는 그렇게 오염된 물을 마셔도 배탈도 안 나고, 또 아무리 오래 걸어도 발도 부르트지 않고 그랬습니다. 사람이란 되게 용을 쓰면 병도 안 걸린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그랬어요. 경주로 내려오니 경주역전 다리 밑에 피난민들이 꽉 차 있었지요. 피난민 배급 보리쌀을 얻어서 대구에서 가지고 내려온 냄비에 보리밥을 했는데 반찬이 있어야 밥을 먹지요. 뭐니 뭐니 해도 보리밥에는 고추장이 제일인데, 경주 사람들은 이미 부산으로 대부분 피난을 떠나고 없었어요. 무작정 사람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갔는데 박기종이라고 문패가 걸려있는 집을 찾아 들어 갔습니다. 그 집에서 고추장과 된장에 절여 만든 콩잎 장아찌를 얻어서 나왔지요. 콩잎 장아찌는 경주에 피난 가서 난생 처음 먹어 보았어요. 전쟁 중이라 장독대 간수를 잘 못해서 그런지 콩잎 장아찌에서는 손가락만한 벌거지가 나오기도 했는데, 다들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냥 툭툭 털고는 먹기에 바빴지요. 경주에서 엿새를 보낸 후에 다시 경주와 울산 접경지인 외동 구어마을이라는 곳을 찾아 갔어요. 그때 종씨가 좋다는 것을 알았지요. 구어마을에는 우리 남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열집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전에 울진에서 구어마을로 내려간 남가더라고요. 구어마을의 남교채라는 양반집에서 한달 하고도 열이레정도 있다가 8월 15일에 국군이 북진한다고 해서 다시 걸어서 울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포탄을 맞아서 집이 한쪽으로 넘어가 있더라고요. 일본에서 가져온 짐과 책, 양복 10여벌을 서너개의 고리짝 안에 담아 두었었는데 그때 다 없어졌지요. 고서적과 일본과 중국에 머물면서 찍었던 사진들도 다 없어졌어요. 을밀대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참 아쉬운 것들 뿐이지요.”
“없이 살았던 세상에 태어난 것도 모자라서 대동아전쟁과 6.25전쟁까지 고스란히 겪었으니, 우리들이 참 못된 세상에 태어난 거지.”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남종술씨다.
울진 지역의 근현대사를 언급할 때 우선적으로 이름 석자가 거명되는 몇 안 되는 어른.
이 시대에 지역에서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의 행복과 때로는 상처 입었던 순간들을 치유하고 놓아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과거를 과감하게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어른으로 살아지는 것일까?
어쩌면 떠올리기 싫은 과거와 만나 화해함으로써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남종술 어른은 담담하게 육성으로 전해 주었다.
얼마쯤 불완전했던 과거조차 긴 세월동안 가슴속에 온전히 묻어온 어른의 기억에 더 이상 판타지(fantasy)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