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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77. [역경의 열매] 홍은혜 (1-20) "천안함 실종자는 제 자식들" 매일 눈물 쏟으며 간절한 기도
눈물만 난다. 조금 전에도 한참 울었다. 눈만 뜨면 하나님만 찾게 된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차디찬 바닷속에 있을 우리 45명의 해군, 제 자식들 좀 살려주세요." 매일같이 얼마나 눈물을 쏟으며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내 가슴도 이렇게 먹먹한데 말이다. 그러나 그 가족들에게 더 늦기 전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사랑의 주님을 만나세요."
부디 빠른 시간 내에 수색작업이 완료되어 절규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조금이나마 시름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나이 올해로 아흔 네 살이다. 집 앞에 있는 해군중앙교회 원로권사로 매 주일 출석해 예배 드리고, 매주 금요일 새벽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리는 예비역 기독군인연합회 '고넬료회'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한다. 서예를 배워 성경말씀을 쓰고 그림도 그리며,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한다. 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를 전하라."
"아니 주님, 저는 나이가 많아 혼자 다니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제가 주님을 어찌 전합니까? 그런 말씀 하지도 마세요." 정말 이렇게라도 손사래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셨다. 그럼 주님을 어떤 식으로 전할까? 그때 기도 가운데 얻은 결론이 바로 문서(책)를 통해 이 세상에 믿음의 간증을 남겨보자는 것이었다.
2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남편 손원일 제독의 회고록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를 출간했다. 회고록 안에는 손 제독의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했다. 손 목사님은 정동제일교회 목회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셨던 독립운동가로서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늘 외치셨던 분이다. 아버지의 품성을 물려받은 남편도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의 열정을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그 회고록을 토대로 5개월여에 걸쳐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신앙고백서 '은혜의 항해'를 내놓았다.
이번엔 국민일보 독자들과 만난다. 주님은 또 어떤 모양으로 이 노구를 들어 사용하실까. 마지막 간증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 지면을 통해 더 큰 은혜를 함께 나누길 간절히 기대한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홍은혜 (1) "천안함 실종자는 제 자식들" 매일 눈물 쏟으며 간절한 기도
* [역경의 열매] 홍은혜 (2) 태어난 날 해갈의 단비… '은혜'로 작명
* [역경의 열매] 홍은혜 (3) 죽음 앞둔 여고단짝 위해 '작별의 찬송'
* [역경의 열매] 홍은혜 (4) 시아버지 손정도 목사, 복음화·독립·동포에 헌신
* [역경의 열매] 홍은혜 (5) 손정도 목사 시무교회서 성가대 활동
* [역경의 열매] 홍은혜 (6) 오전에 대학 졸업, 오후엔 결혼식 올려
* [역경의 열매] 홍은혜 (7) "없어선 안되는 걸레의 삶을 살아라"
* [역경의 열매] 홍은혜 (8) 해군 창설 즉시 해군병학교부터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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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17년 마산 출생, 이화여전 음악과 졸업, 39년 손원일 제독과 결혼, 6·25 전쟁 후 해군부인회장 활동, 83년 제15회 신사임당상 수상, 2003년 국제미술전람회 특선, 2009년 해군으로부터 공로패 수여, 2010년 '은혜의 항해'(토기장이) 출간, 해군중앙교회 원로권사
***[역경의 열매] 홍은혜 (2) 태어난 날 해갈의 단비… '은혜'로 작명
1917년 여름, 경남 마산은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갔다. 3개월 동안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삭의 몸으로 한 여인은 그들 틈에서 속삭이듯 기도했다.
"하나님, 비를 내려주셔서 농사를 잘 짓게 해주세요. 그리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해주세요."
8월 11일, 그 여인은 예쁜 딸을 출산했다. 그날 밤부터 반가운 빗소리도 들렸다. 여인은 남편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예요. 이 비도, 우리 아이도."
홍은혜. 나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독실한 믿음의 집안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종종 잠자는 내 머리 맡에서 찬송가 262장(통 196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부르시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새벽예배에 자주 가곤 했다. 약골이었던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한두 차례 꼭 심하게 병치레를 하곤 했다. 몸이 아파 새벽에 잠을 이룰 수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낫지 않을까?'란 생각에 새벽에 혼자 기도를 드렸다. 그럼 주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깨끗하게 치료해주셨다.
그렇게 기도 응답을 받은 뒤부터 나는 늘 기도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아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드렸다. 등교하기 전 먼저 교회에 들러 예배를 드렸다. 새벽제단을 매일같이 쌓다보니 어느새 내 몸과 마음은 건강해졌다.
당시 우리 가족이 다닌 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마산의 문창교회였다. 1901년 마산에는 아담슨 선교사와 로스 선교사가 각각 세운 교회가 있었다. 1903년 이 두 교회가 통합해 마산교회가 되었고, 1916∼19년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마산의 옛 이름인 문창을 사용해 문창교회가 된 것이다.
주 목사님은 31년 문창교회 5대 목회자로 부임하셨다. 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가셨으니까, 나는 15∼20세 때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창 믿음을 키웠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참 잘하셨다. 인근 유학생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우리 교회를 찾을 정도였다. 또 주 목사님은 찬송도 많이 부르셨다. 목사님 덕분에 나는 일찍부터 좋아하는 찬송을 가슴에 품었다.
그때 내가 즐겨 불렀던 찬송은 '내 진정 사모하는'(찬송가 88장)이었다. 가끔 내가 이 찬송을 부르면 주위에서 "성악가 시켜도 되겠다"고 칭찬해줬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래서 가끔 예배 때 혼자 특송을 부르곤 했다. 어쩌면 그 시절부터 나는 음악가로의 꿈을 키웠는지 모른다.
아이다 맥피 선교사가 초대 교장을 맡았던 의신여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마산고등여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일제 시대였던 그때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한 반에 50명이 정원이었는데, 일본 학생이 45명, 한국 학생이 5명이었다. 나는 일본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특히 노래를 잘해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매년 독창회에 나가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인지 나를 '조선인'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랑스러운 단짝 구와하라 상을 만났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3) 죽음 앞둔 여고단짝 위해 '작별의 찬송'
구와하라는 서울에서 지내다가 몸이 아파 휴양차 마산으로 이사왔고,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됐다. 서로 마음이 통했던 우리는 고교시절 내내 붙어다녔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와서 우리 둘은 소풍 대신, 마산 바다 모래사장으로 놀러가곤 했다.
"은혜야! 너는 노래를 부르렴. 나는 네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릴게."
구와하라는 내가 불러주는 노래를 참 좋아했다. 특히 찬송가를 불러주면 흥얼흥얼 곧잘 따라부르곤 했다. 우리 둘의 우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마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마산에서 지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유학와 기숙사생활을 하게 됐다.
대학생이 된 어느날, 구와하라에게 "보고싶다"는 전화가 왔다. 힘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반가운 마음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앞섰다. 빨리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사이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내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하는 구와하라의 얼굴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지 마, 은혜야. 나 괜찮아.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고 싶어. 나를 위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해줄 수 있겠니?"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동무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애써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고 밝은 모습으로 찬송을 불렀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하나님께 구와하라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내가 가는 길에는 하얀 들국화가 많이 피어 있어. 친구야, 행복하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잘 있어, 은혜야."
그 말을 끝으로 구와하라는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눈을 감았다. 친구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펑펑 쏟아졌다. 그녀와 헤어진 뒤 나는 오히려 더 열심히 학교생활에 집중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이화(梨花)는 '맑고 고귀한 하얀 배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내가 머물렀던 기숙사는 진선미 관이었다. 학생 수는 모두 300명으로, 영문과 음악과 가사과 보육과 등 총 네 과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음악과에 진학했다.
교복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복장이었다. 교복으로 양복만 입다가 한복을 입으니 처음에는 참 어색했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졌다. 김활란 당시 총장님의 또렷한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화의 교문을 들어선 여러분은 오늘부터 기독교 정신 아래 진선미의 이화를 잘 익히고 배워서 장차 우리 한국 사회와 가정에 아름다운 이화의 향기를 펼치는 자랑스러운 여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입학생 중에는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님의 따님인 손인실 학생도 있었다. 김 총장님은 "손 목사님은 참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우리 앞날의 갈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도 큰 영향을 받게 해주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
문득 손인실이라는 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듣게 된 이름 '손정도'. 그분이 미래의 시아버지가 될 줄이야.
***[역경의 열매] 홍은혜 (4) 시아버지 손정도 목사, 복음화·독립·동포에 헌신
나는 시아버지 손정도(1872∼1931) 목사님을 한번도 뵌 적은 없다. 그러나 목사님께 감동을 받은 주변인들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손 목사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홍리로, 그 일대에서는 잘 알려진 명문가요 부농이었다. 완고한 유교적 집안에서 태어난 손 목사님은 23세 때 평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갔다가 조씨 성을 가진 목사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됐다. 조 목사님은 당시 시아버지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세계 각국의 문화를 밤새도록 들려줬고, 그날 밤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먼저 상투를 자르고 집안 대대로 모셔온 사당을 몽둥이로 다 부수었다고 한다. 이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고 결국 쫓겨난 손 목사님은 고학으로 숭실중,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시어머니는 기독교 병원 잡역부로 일하며 시아버지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시어머니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곤 했다. "부유하게 살던 예전의 삶보다 비록 당시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렸기에 그 삶이 더 감사하고 행복했어."
손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은혜로운 말씀과 뜨거운 애국심, 진심이 깃든 언행으로 부흥을 일궈냈다. 또 지역에선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다보니 일본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됐다. 한번은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 음모사건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혐의는 벗었으나 전남 진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목사님은 그곳에서도 복음과 나라 사랑의 감동을 전했다.
이후 서울 동대문교회, 정동교회에 부임한 손 목사님은 그때부터 청년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그분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청년이 3·1 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였다. 1918년 겨울, 목사님은 정동교회에서 시무한 지 3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듬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의정원 의장에 바로 손 목사님이 선출됐다. 목사님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을 당한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상하이에서 보살폈고, 여러 방면에서 독립활동을 지원했다.
21년 지린(吉林)으로 떠난 손 목사님은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오갈 데 없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줬다. 동포들의 억울한 사정을 도맡아 중국 관청에 출입해 변호도 해줬다. 지린 일대에 동포들이 함께 모여 살기를 원하자, 고향 강서군 땅들을 모두 팔아 지린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곳에 세운 길림기독교회는 바로 하나의 '이상촌'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대규모 농장을 통해 만주 한인들의 생활터전을 삼았을 뿐 아니라 이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곳에 바로 숭실중 동창이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김일성)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수첩에 손 목사님의 이름과 주소가 있는 것을 보고 온 것이다. 목사님의 보살핌을 받던 18세 김성주는 교회청년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후에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손 목사님을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할 정도로 존경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추운 겨울 만주 땅 지린에서 49세의 젊은 삶을 마감했다. 가족의 간호 한번 받지 못하고 외롭게 주님 품에 안겼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5) 손정도 목사 시무교회서 성가대 활동
본과 1학년부터 각 교회 성가대로 파송되는데, 나는 시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님께서 시무하셨던 정동교회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 시어머니와 남편 손원일 제독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만남을 연결해준 분이 사촌 언니였다.
당시 어머니는 장남인 원일씨가 결혼을 못해 사촌 언니에게 근심을 털어놓으셨다고 한다. 이에 언니는 나를 떠올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동교회에서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자며 어머니를 초대했다. 물론 나는 미래의 시어머니께서 며느릿감을 보기 위해 예배에 참석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가대석에 앉아 예배를 마친 뒤 저만치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촌 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 옆에 곱게 단장한 분이 활짝 웃으시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의아했지만 그땐 그냥 넘어갔다. 후에 어머니가 그날의 상황을 들려줬다.
"너를 보러 정동교회에 갔을 때, 네 얼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가대석에 앉아 있는 처녀들의 얼굴을 천천히 보고 있었지. 그런데 유난히 한 처녀가 내 눈에 들어온 거야. '저 아가씨라면 우리 원일이와 딱 어울릴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예배를 마친 뒤 바로 그 처녀가 내게 걸어오는 게 아니겠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니? 그 아가씨가 바로 너였단다."
그날 어머니는 사촌 언니에게 내가 마음에 쏙 든다며 당장 두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에 나와 함께 이화여전에 입학한 미래의 시누이 손인실이 다음 주일에 오빠인 원일씨와 함께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대학 입학식 날, 우연히 손정도 목사님과 그분의 딸인 인실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궁금했던 때였다. 그런 인실씨가 나에게 오빠를 정식으로 소개해준 것이다. 첫인상은 다소 무뚝뚝해 보였으나 준수한 용모와 굵직한 음성을 가진 모습에 믿음이 갔다. 아버지에게도 원일씨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자네 목소리는 100점 주겠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의 우렁찬 태도에 뿌듯해하셨다.
우리 두 사람은 이후 몇 차례 더 만남을 갖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반려자임을 서로 고백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미리부터 준비해 놓으셨다.
나를 바닷가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바다를 사랑하게 하셨고, 그러면서 바다 사나이를 만나기까지 많은 이들을 만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큰 오빠에게 다짐한 게 있었다. "바다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아. 결혼해서도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싶어"라고 말이다.
내 고향 마산의 바다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는 손 제독과 함께 진해의 바다를 한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았으니, 나의 간절한 소망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게 아닐까.
그러나 결혼은 그리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남편을 만날 때가 겨우 대학 1학년. 의외로 결혼이야기가 급진전됐다. 원일씨로부터 정식 프러포즈를 받은 뒤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깨닫게 됐다. 그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공부는 때가 있는 게 아니던가.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음악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6) 오전에 대학 졸업, 오후엔 결혼식 올려
결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음악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손원일씨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결혼보다 공부를 마치고 싶습니다. 졸업까지 3년을 기다려 주신다면, 약혼을 먼저 하겠습니다."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그런데 회신은 의외로 빨랐다. "그토록 공부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요. 당연히 기다리겠습니다."
졸업식 날이 곧 결혼식 날이었다. 1939년 3월 11일 오전 10시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그날 오후 2시 결혼했다. 그때 내 나이 22세, 남편은 30세였다.
신혼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궁핍하지도 않았다. 결혼 전부터 매형과 함께 서구 신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운영해온 남편은 사업가로 소질을 보였다. 서울 혜화동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문득문득 남편인 손정도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보이셨다. 따뜻한 식사를 하다가도, 잠을 주무시다가도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며 미안해하셨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김장을 끝내고 어머니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독립군들이 수시로 우리 집에 찾아왔단다. 그때마다 나는 큰 가마솥에 밥을 가득 지어 그들을 배불리 먹여 보냈지. 여비가 없는 사람들도 찾아왔어. 어떤 경우에도 손 목사님은 거절한 적이 없으셨단다. 얼마 안되는 생활비마저 다 남들에게 퍼주고 나면, 정작 우리 가족은 굶어야 했어."
당시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는 날품팔이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하나님은 우리가 퍼주면 퍼줄수록 더 많은 것들로 채워주셨다"며 감사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인 남편을 존경했다. "나는 고문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손 목사님을 보면서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밤에 목사님이 곤하게 주무시더니 갑자기 깨어 일어나시는 거야. 그러더니 급하게 온 방을 헤매시더구나. 깜짝 놀라 왜 그러시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일본 경찰이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를 가지고 내 얼굴과 몸을 지지니 너무 뜨거워서 깼소'라고 말씀하시더구나. 비록 꿈이지만 그건 현실이었어. 일본 경찰은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고 부젓가락으로 얼굴을 지지며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했지. 하지만 네 시아버지는 한 사람도 대지 않았어. 얼굴에 생긴 그 흉터가 의로운 훈장이란다."
남편인 원일씨도 일제에 고문을 당했다. 결혼 전 상하이에서 화물선 부선장으로 2년간 일한 뒤 잠깐 서울을 다니러 왔을 때,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뿌리째 뽑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두 달 동안 구둣발에 차이고, 몽둥이와 가죽 채찍에 맞았다. 물고문을 당하느라 머리카락을 수도 없이 잡혀 감옥에서 나올 땐 이미 머리카락이 다 뽑힌 상태였다.
남편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평생 협심증으로, 궂은 날씨에는 허리가 끊어져 나갈 정도로 통증을 느끼며 살았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7) "없어선 안되는 걸레의 삶을 살아라"
"걸레 같은 삶을 살아라."
생전 시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님이 남편 손원일 제독에게 강조하신 말씀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일일이 따를 수 없어 많은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남편은 유독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존경했다. 특히 그분이 해주신 세 가지 말씀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겼다.
첫째, 손 목사님은 걸레의 삶을 강조하셨다. "비단옷은 입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므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 목사님은 보이는 곳에서 칭송받는 '비단옷' 같은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걸레' 같은 삶을 강조하신 것이다. 실제로 손 목사님은 그렇게 살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한다."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 목사님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이리라. 목사님은 신앙과 애국운동의 균형을 이룬 삶을 사셨다. 셋째,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라." 목사님은 "언젠가 조국은 독립할 것이다. 그럼 그때는 과학사회, 산업사회가 될 것이니 각 분야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은 중국 중앙국립대학 항해과를 통해 훗날 해군 창설의 꿈을 키우게 됐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해군 분야의 최고 실력자가 된 셈이다.
손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세 가지 교훈은 오늘날 우리 세대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드러나지 않지만 희생하고 섬기는 삶,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임에 틀림없다.
남편은 상하이에서 처음 해군을 보았다고 한다. 수많은 외항선과 군함이 부두에 정착해 있어 그는 많은 배와 바다 사람들을 자연스레 볼 수 있었다. 특히 제복을 입은 늠름한 해군을 보면서 "바다에 미래가 있다.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해군이 되는 길을 수소문했지만 외국인으로서 중국 해군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다와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하고, 중앙국립대학에 들어갔다. 실제로 그곳에서 배운 과정들이 훗날 우리나라 해군 창설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항해과 3학년을 마치자 1년 동안 해상 실습을 위해 남편은 배를 타게 됐다. 실습이 끝날 무렵, 중국 해군에서는 해외에 파견할 항해사를 선발하고 있었다. 남편은 주저하지 않고 응시했고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다섯 명의 합격자 명단에 끼이게 되었다.
그는 중국 해군이 배정해준 대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미국 라인의 상선을 타게 됐다. 항로는 함부르크, 지중해, 수에즈 운하, 인도양, 싱가포르, 요코하마,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치는 길이었다. 선장을 비롯한 승선원이 모두 독일인이었기에 남편은 영어 중국어 외에 독일어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그 후 1만5000t급 람세스함으로 옮긴 남편은 인도양을 횡단하던 중 아버지 손 목사님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원양 항해사 생활을 3년간 했고, 나와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들어오기까지 2년간 더 연안여객 화물선의 항해사 겸 부선장으로서 배의 살림살이와 사무를 맡아 처리했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8) 해군 창설 즉시 해군병학교부터 설립
"바다에 뜻을 가진 애국 청년들이여, 모입시다!"
남편 손원일 제독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서야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꿈, 해군 창설에 앞장섰다. 그는 담벼락마다 광고문을 붙이고 다녔다. 70명이 모였다. 절대 '본적'을 쓰지 않았다. 지역별 파벌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그는 해군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도 도별 의식이나 친인척의 청탁을 배격해 공정하게 인사했다. 무엇보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주군대 육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1945년 11월 11일, 미국 군정관과의 여러 차례 협상 끝에 항무청 건물 사용 합의를 이뤄내고 태극기를 게양한 뒤 휘날리는 국기를 바라보며 해군 첫 입소식을 가졌다. 해군이라는 정식 명칭도 없던 시절, 손 제독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해군 창설 두 달 만인 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49년 1월 15일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를 설립, 초대 교장을 맡았다. 1기생으로 113명을 선발해 46년 2월 입교식을 가졌다.
남편에게 생도들은 자식이었다. 배도 없고, 보급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배움의 사명을 감당하는 1기생을 늘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8개월간의 학업을 마치고 실습을 위해 미군 측과 협의하여 구축함 한 척을 배정받아 그 함정에서 실습했다.
그들을 직접 가르쳤던 미군 교관은 "한국의 해군 생도들이 대단하다. 수십년 동안 배운 공부를 수개월 만에 터득하고 실습에서도 어느 해군 못지않은 능력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그러면 손 제독은 마치 자식 자랑하듯 생도들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생도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든 상황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누구 하나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참아주고 따라와 주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희생정신을 가진 그들이 앞으로 후배 해군들을 위해 든든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해군이 발전하는 데 희망의 싹을 틔울 것입니다."
46년 가을, 마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생도들이 마산으로 행진을 하게 됐다. 일본 군복을 고쳐 짝짝이로 입은 생도, 티셔츠를 군데군데 기워서 입은 생도, 때가 덕지덕지 묻은 한복 저고리에 구멍 난 고무신을 신거나 사이즈가 큰 미군 구두를 끌고 가는 생도 등 그 모습이 다양했다. 지금의 신사 해군을 떠올리면 그저 안쓰러울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이라는 자부심만큼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 대통령은 악조건을 무릅쓰고 해군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손 제독과 해군 모두의 노고를 치하했고, 꼭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한 '해·육·공' 중 가장 먼저 손 제독을 불러 대장으로 승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손 제독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해군의 계급은 배의 수에 따라 그 함정의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해군은 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대장으로 지명하시면 온 세계 해군들이 웃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해군이 많은 수의 함정을 갖게 되면 그때 대장 계급을 받겠습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해군의 발전을 더 소중하게 여긴 남편 손 제독은 진정 해군의 아버지였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9) 남편과 함께 '바다로 가자' 작사·작곡
나에게도 해군은 자식 같았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부른 노랫소리를 들었다. 일본 군가에 한국 가사를 붙여 대한민국 해군이 부르고 있었다. 남편 손원일 제독도 "저건 아니야. 우리가 고쳐야지"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남편은 해군이 부를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직접 가사를 썼고, 내가 곡을 붙였다. 그렇게 나온 노래가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의 '바다로 가자'이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또 이은상 시인이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 해군사관학교 교가도 완성했다. 한 달 동안 매달려 탄생한 작품이다. 이밖에 '해방행진곡' '대한의 아들' '해사 1기생가' '해사 5기생가' '해사 16기생가' '해군부인회가' 등을 작곡했다.
남편의 귀가시간은 언제나 한밤중이었다. 가족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남편은 틈틈이 자녀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아이들이 꼭 간직해야 할 마음을 되짚어주곤 했다.
어느 겨울날, 일찍 들어온 남편이 두 아들을 불렀다. 여섯 살 명원이와 네 살 동원이의 옷을 모두 벗긴 뒤 뜨끈한 아랫목에 앉혔다. 남편은 일제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날씨가 궂은 날엔 늘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그렇게 아랫목에 몸을 누였다. "너희 둘 중에 방바닥에 더 오래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잘 익은 연시를 주겠다."
아이들은 금세 뜨거워진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버텼다. 잠시 후 남편은 "마당으로 나가 100을 세고 들어오너라"고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식히려고 추운 마당으로 뛰쳐나온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노심초사했다.
어느 새 100을 세고 다시 아랫목으로 뛰어 들어간 아이들 앞에 연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남편은 꽁꽁 얼어붙은 아이들의 손과 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실 때 가끔 일본 경찰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쳤어. 그런데 경찰이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면, 이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거야. 사실 할아버지는 속옷 차림으로 집 뒤쪽으로 도망쳐 눈 속에서 몇 시간씩 숨어 계셨다는구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평생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사셨어. 지금 너희가 따뜻한 방 안에서 입고 있는 옷 한 벌, 연시 한 개가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말아야 해."
우리 부부에겐 가슴에 묻은 딸도 있다. 이름은 영자. 둘째 명원이가 태어나던 해 여름 밤, 갓 태어난 명원이만 모기장에서 재운 게 화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영자의 몸 여기저기에 모기 물린 자국들이 보였고, 온 몸은 불덩이였다. 병원에선 단순한 감기라고 했다. 약을 먹여도 열이 내리지 않았고, 결국 영자는 열병의 악화로 소아마비가 되고 말았다.
몸은 불편했지만 영자는 밝게 자랐다. 그러나 독일대사 시절, 그만 물놀이 사고로 영자와 이별하고 말았다. 1959년 7월 19일, 영자의 나이 19세였다. 소중한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얼마나 울었는지…. "영자야, 엄마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역경의 열매] 홍은혜 (10) 손 제독, 전 해군과 인천상륙작전 참가
손원일 제독은 전투함의 필요성을 느끼고 해군 자체적으로 모금을 실시했다. 해군들은 월급의 일부를 떼어 성금을 내고 해군 부인들은 삯바느질을 했다. 그렇게 모은 6만 달러를 들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배를 사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감복한 이 대통령은 정부 돈을 더 보태 12만 달러로 중고 함정 '백두산함'과 세 척의 배를 사줬다. 백두산함은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란민을 실어 날랐다.
인천상륙작전에 전 해군이 참여했다. 손 제독은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중요한 회의가 있어 며칠 나갔다 올 테니 아이들을 부탁해요"라고 짧게 인사했다. 그런데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부여잡은 말씀이 시편 23편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나라를 세워 달라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젊은이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며칠 뒤 남편은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당시 미국의 작전 계획은 '서울 입성이 지연되면 서울 일대를 폭격한다'는 것이었소. 만일 그렇게 되면 서울에 남아 있는 국민들은 어찌 되겠소? 이를 저지하려고 맥아더 장군에게 '내가 직접 형편을 살펴보고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던 것이오."
그 길에 미국 선교사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연락장교 소위, 부관이 동행했다. 서울역에서 파고다 공원으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펑' 하고 포탄이 터졌다. 또 북한군의 총탄이 날아왔다. 선교사를 비롯해 소위와 부관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남편만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그는 "아마 하나님께서 좀 더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나를 살려주신 것 같아"라며 "동료들에게 빚 진 마음으로 살아야겠어"라고 다짐했다.
결국 손 제독은 해병대와 함께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다. 남편은 전쟁의 큰 상처를 입은 서울을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다. 땅굴, 다락에서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서울 하늘 아래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나왔다. 남편은 국군 최고지휘관 자격으로 포고령을 발표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모든 시민은 안심하고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라. 그리고 공산군에 협력한 사람이라도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죽이지 마라."
이 짧은 문구는 생명의 소리였다. 진짜 공산군은 벌써 도망갔을 테니, 살기 위해 잠시 공산군에 협력한 남아 있는 자들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때쯤 공산군을 도운 부역자 400명을 인수받고 빠른 시일 내로 이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들을 몰래 배 수리하는 공장에 합숙시키고 일거리를 제공했다. 상부의 계속된 처형 지시에도 그는 "죽여도 내가 죽일 테니 걱정 말라"며 강하게 말했다. 남편은 부역자들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공산군에 잠시 협력했을 뿐,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은 순차적으로 그들을 살려 보냈다.
사람을 사랑하는 손 제독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1) 상이군인·유가족 도우려 부인회 조직
한국전쟁 이후 해군 병원은 환자들로 차고 넘쳤다. 해군 부인들과 함께 전쟁에서 다친 이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해군부인회를 만들었고, 나는 회장을 맡았다. 수시로 부인들과 모여 아픈 해군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 매주 수요일 목사님을 모시고 병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불 베개 옷 등을 세탁해주고, 위로편지도 써줬다.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밥도 먹여주고, 대소변도 치웠다.
"이걸로 이를 닦아 입안이 너무 아파요. 죽기 전에 치약으로 이 한번 닦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아픈 병사들이 굵은 소금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해군부인회에서 치약과 칫솔 각각 500개를 구입해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들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해군부인회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아픈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봤다.
그렇게 돌봄 사역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물질로 도울 방법도 찾았다. 구호금을 모으기로 하고, 집집마다 방문해 "전쟁에서 상처 입은 환자들을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쟁 뒤라 하루 종일 모금활동을 해도 200원을 넘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차라리 우리가 스스로 돕고 살자." 해군 부인들과 함께 작업복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직접 삯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었다. 우리의 이 같은 뜻이 해군본부에 전해져 간이 건물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그곳에 미군의 도움으로 재봉틀 50대를 설치했다.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자 돈도 모였다.
그 수익금으로 상이군인들의 자활을 도왔다. 진해에 세운 기술지도소를 후원해 상이군인들이 각종 기술을 배워 사회로 진출, 기술자로서 제2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했다.
전쟁 미망인들도 보살폈다. 어린 자녀들을 홀로 키워야 하는 그들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태선씨를 찾아갔다. "전쟁 미망인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저를 믿고 땅 2만평만 주십시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마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리라. 6개월 뒤 시장님은 "용두동에 2만평 땅이 있으니 직접 보고 쓰십시오"라고 허락했다.
그때는 제대로 된 건설회사가 없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미망인 400명이 일할 수 있는 규모의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식당, 목욕탕, 교회를 지었다. 해군부인회에서 작업복을 만들던 경험을 살려 미망인들에게도 그 일을 가르쳤다. 또 미국대사 부인을 통해 미군부대 매점(PX)에 미망인들이 만든 수예품을 팔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 미망인들이 직접 만든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목도리 등을 PX를 통해 팔았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힘겨운 생활고에 시달리던 미망인들의 그늘진 얼굴에 어느새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여러 손길들을 붙여주셨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일이 합력해 선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에 갖고 있던 그 열정 그대로다. 드디어 천안함 함미가 사고 발생 20일 만에 인양됐고, 지금껏 그렇게 기도하며 찾던 내 아들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귀환하지 못한 수병들도 있다. 어서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그 옛날, 해군 병원을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던 때처럼 당장 유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런데 그게 마음뿐이어서 더 애가 탈 뿐이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2) 손 제독 국방장관 취임 후 군목제도 신설
"이제 해군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보오."
1953년 6월 44세에 남편 손원일 제독은 국방부 장관에 취임했다. 몇 차례 대통령의 권면에도 "아직 해군에서 할 일이 많다"며 고사했었다. 7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해군을 떠나던 날, 그는 아무 말 없이 군복을 벗었다. '해군의 아버지'에서 이제 전 군의 아버지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지게 됐다. 남북 간에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다시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사력을 더욱 확장할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남편은 전쟁을 겪으면서 정신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깨달았다. 그는 "전쟁은 확실히 총으로 싸우지만 마지막 승리는 강한 정신력으로 얻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군목제도의 필요성을 실감한 그는 해군 내에 '정훈'을 두고 교화과를 설치해 군목의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국방장관에 오른 뒤 대통령에게 군목제도를 건의했고, 전 군에서 바로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군목제도는 군대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증거였다.
전쟁 직후라 국방장관의 집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남편이 바빠 찾아오는 사람을 일일이 만날 수 없자, 아내인 내가 직접 나섰다. 사연도 참 다양했다.
"온통 폐허가 되어버렸어요. 제 집을 찾아주세요" "돈을 벌어야 하니 취직을 시켜주세요" "병원비가 부족합니다. 도와주세요" "먹을 것이 없으니 돈을 좀 주십시오"….
처음 3개월간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애썼다. 더 높은 분들을 찾아가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끝없이 계속되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다보니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점차 짜증이 났다.
어느 날 부인회에서 급히 나를 찾았다. 한 말단 사병이 행패를 부리고 민간에 손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병에게 이름과 군대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었는지, 또 몇 살인지를 물어보았다. 사병은 20세이고, 군인으로는 6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엄하게 물었다.
"20년 동안 가정에서 잘 키워주셨으면 군대에서도 좋은 군인으로서 착실하게 지낼 수 있지 않습니까?"
단호한 어조로 마치 상사가 얘기하듯, 군대의 책임을 다하라고 강조했다. 그의 반응이 누그러졌고 이내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게 정리된 것 같으나 내 속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저런 일로 불려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럴 때마다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게 마음 아팠다.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여보, 나는 국방장관 아내 될 자격이 없나 봐요. 우리 그 일 그만둡시다."
그러자 남편은 바스락거리며 주머니에서 봉투 여덟 장을 꺼내보였다.
"내가 벌써 여덟 번 사표를 썼다오. 그걸 이렇게 가지고 다닙니다. 장관이 되기도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은 더 어렵더군요. 우리 조금만 더 참아봅시다."
남편의 말에 이내 눈물이 났다. 그날 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저 소원이 하나 있어요. 제가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성내지 않게 해주세요.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주세요."
***[역경의 열매] 홍은혜 (13) 서독대사 부인시절 '한국의 밤' 대성황
1957년 5월 손원일 제독은 서독 대사를 제안받았다. 외국 상선을 타던 항해사 시절 2년간 독일을 드나든 적이 있어 남편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 제의를 수락했다.
독일에 도착한 첫날, 남편은 원양 항해사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독일 거리를 다니는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지. 어찌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던지. 검은 머리에 황색 피부인 내가 그들 눈에는 신기했던 모양이야."
"지금은 시간이 흘렀으니 그 정도는 아니겠죠?"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인데, 적어도 같은 사람으로는 대해주겠지."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라 독일 신문, 잡지에는 온통 깡통 든 코흘리개 한국 고아들의 사진으로 가득 찼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불쌍한 아이들 모습을 신문 등으로 보듯이 말이다.
한국은 고아들의 나라이고, 가난하고 문화가 없는 후진국이며, 한국에서 잘사는 사람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항변하고 싶었다. "지금은 전쟁 직후라 좀 가난한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달래기 위한 혼잣말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국제부인회 회장이 한국을 소개하는 '한국의 밤' 행사를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부터 한 달여 동안 한국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도록 밤새워 머리를 굴렸다. 요즘 같으면 전문적인 예술단체에 맡겨 행사를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나와 유학생들, 주변의 한국인들이 직접 기획하고 공연 프로그램을 짰다.
1시간 남짓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배경은 한국의 대청마루를 그려 붙였다. 서독 대통령 부인, 장관 부인, 외교관 부인 등 300여명이 행사를 보기 위해 참석했다.
서투른 독일 말을 줄줄이 외워 5분간 행사를 소개했다. 이어 정월 초하룻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모습, 곱게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의 동요 열창, 고구려 백제 신라 때의 여성 의복 패션쇼, 소년 소녀가 봄나물 캐는 율동, 전통 결혼식, 춘향전의 '사랑가' 듀엣, '밀양아리랑' 합창 등을 선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모두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었나요?"라며 놀라워했다. 이후 독일 신문에 '한국의 밤'에 대한 소식이 연일 세 차례나 실렸다. 학생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으로는 완전무결한 행사였고, "아름답다"고 격찬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행사 이후 이곳저곳에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대부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는 점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독일에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들이 많았다. 그런 자리에는 늘 각국의 대사 부부들이 초청받아 참석했다. 그런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게 노래였다. 대사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자기 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한번은 러시아 대사 차례가 되었는데, 자신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음악을 전공한 내가 그를 대신해 러시아 민요를 불렀다. 이어 한국 가곡을 불렀다. 모두들 감격했다. 한국의 멋을 알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늘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4) "기술 배워 국가에 도움을 주거라"
서독 대사 시절, 성탄절이면 인근 나라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모이면 150명 정도 됐다. 유학생들은 평소에도 자주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부모처럼 생각했다. 유학생들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건 김치였다. 한번은 광복절 기념일에 재독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그들에게 맛난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미리 김치를 담가 대사관 뒤뜰 서늘한 곳에 보관해뒀다. 기념일 당일 독일인 도우미를 불러 일찌감치 대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저녁에 상을 차리기 위해 김칫독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치가 있어야 할 곳에 쓰레기를 담은 봉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독일인 도우미가 그곳을 청소하던 중 하도 퀴퀴한 냄새가 나 김칫독을 열어봤고, 당연히 버리는 것인 줄 알고 쓰레기로 채웠다는 것이다.
일단 쓰레기봉투들을 치우고, 맨 위에 있던 김치들을 걷어냈다. 그리고 밑에 깔린 김치 한 조각을 먹어보았다. 맛도 좋고 신선했다. 유학생들에게 대접해도 괜찮겠다 싶어 그 김치를 먹음직스럽게 잘라 내놓았다. 그날 저녁,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속에서 우리 부부와 유학생들은 너무나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남편 손원일 제독이 한국에 있을 때는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서독 대사 시절에는 틈틈이 가족과 함께했다. 하루는 속도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을 달린 적이 있다. 그때 손 제독은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부러워하며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명원아, 네가 우리나라에 이런 거 만들어라."
명원은 "이런 길을 만들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당연히 토목이지. 토목공학과!"라고 대답했다. 사실 명원의 꿈은 해군이었다. 그런 얘기를 했을 때, 남편은 "해군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많으니, 너는 기술을 배워 국가에 도움을 주거라"고 말했다. 결국 명원이는 그 이후 해군에 대해선 함구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은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또 남편은 아이들에게 18세 때까지만 지원해주겠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았듯,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독립심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말이 씨앗이 된 것일까.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의 하야와 함께 갑작스레 대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손 제독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두 아들(명원 동원)에게 용돈을 보낼 수 없게 됐다.
남편은 짧은 편지를 두 아들에게 보냈다. "이제부터는 아비가 돈을 대줄 수 없으니 너희 둘이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가기 바란다." 그때 명원의 나이 19세, 동원은 17세였다.
두 아들은 캘리포니아의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 일을 했다. 명원은 벽돌과 목재를 나르다 살이 찢겨 큰 상처를 입었고, 동원 역시 착암기로 바위를 뚫다가 튀어나온 불똥으로 목과 가슴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아이들은 힘들 때면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님의 자손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분들도 계신데, 이 정도의 일은 일도 아니다."
명원은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쌍용자동차 등의 중역을 거쳤고, 동원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시 건축부에 시니어 프로젝트 매니저로 있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5) 노산, 손 제독에 '수향'이란 아호 지어줘
남편 손원일 제독은 1972년 한국홍보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홍보협회장과 반공연맹 이사장을 겸임하며 분주하게 보내던 어느 날, 충무공사상연구소 이사장이던 노산 이은상 시인을 만나 점심식사를 했다. 남편은 그때 노산으로부터 '수향(水鄕)'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당신은 우리나라 해군의 아버지이자 충무공 이순신의 진정한 후예야. 그래서 수향이야. 물이 고향이야." 남편은 '수향'이라는 호를 참 좋아했다.
그는 수향처럼 물 흐르듯 인생을 즐겼다. 하지만 74년 초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해 음식을 절제해도 일주일만 지나면 얼굴과 손이 퉁퉁 부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피를 걸러내는 투석 치료를 받았다.
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좀 더 좋은 의료시설을 갖춘 미국 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함이다. 메릴랜드 주에 있는 베데스다 해군병원으로 갔다. 종합검사를 마친 미 해군병원 의사는 앞으로 6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미국에서 6개월간 투석 치료를 받고 귀국했다.
하지만 남편의 투병생활은 고통스러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투석을 해서 몸속의 불순물과 부기를 빼냈다. 투석 후에는 안색이 좋아지고 체중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만 며칠이 지나면 또다시 온몸이 부었다.
76년 1월 해군사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투석 날짜와 시간을 잘 조정해 나갔다. 그 행사가 손 제독이 참석한 해군에서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반갑게 물었다.
"오랜만에 해군을 보니 어땠어요?"
"아무 것도 없었던 30년 전이 생각나더군. 이제는 모든 게 다 갖춰진 모습이야. 무엇보다 믿음직한 생도들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까지 확 트이는 것 같아."
집에서 치료를 받던 손 제독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육군 군의관 한 명과 간호장교 한 명을 지원해 줬다. 그렇게 1년간 투석 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육군 군의관에게 말했다.
"언짢게 듣지 말고 병원장에게 한번 말씀드려 주시게. 해군에도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많을 테니 해군으로 바꿔줄 수 있는지 말이야."
바로 다음주부터 손 제독이 원한 대로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해군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해군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처음 치료를 위해 온 날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주사 한 방을 맞더라도 해군에게 맞으면 내 마음이 편해."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투석 치료를 5일에 한 번, 나중에는 3일에 한 번씩 받았다. 투석이 끝나면 잠시 외출을 하곤 했다. 몸이 아픈 중에도 머리를 단정히 빗고,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신사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신사는 정직한 사람이다. 신사는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신사는 맡은 바 책임지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해군은 신사여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투병 중에도 이 같은 신사 해군 정신을 잊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6) 손 제독 "예수 잘 믿다 오세요" 유언
1980년 1월 남편 손원일 제독의 건강 상태가 더 악화됐다. 남편 곁을 지키면서 나는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불렀다. 그런데 남편이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분명 방 안에는 우리 둘뿐인데 말이다.
"누구와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러자 남편은 "예수님과 이야기했어요"라고 활짝 웃었다. 그동안 한번도 예수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문득 평생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의 일을 성실히 수행한 그의 삶을 예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것 같아 감사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손정도 목사님)께서 많은 사람과 함께 나를 환영해주고 계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헤어짐을 앞둔 나는 눈물을 흘렸다. "저에게 해줄 말은 없어요?"라고 묻자, 남편은 "예수님 잘 믿다가 오세요"라고 대답했다.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80년 2월 15일 남편은 편히 눈을 감았다. 2월 19일 손원일 제독 장례식은 해군 성가대의 찬양과 그가 작사한 '바다로 가자'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조촐하고 엄숙하게 진행됐다.
손 제독은 부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권세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명성을 탐하여 비굴하지도 않았고 늘 겸손했다.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했다.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바다 사랑을 외친 그는 진정으로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떠났다. 손 제독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말은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죽어간 장병들을 잊어선 안 된다.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먼저 하늘나라로 갔으나 나는 해군이 원하면 어디든 달려갔다. 특히 초임 장교들의 다락방 모임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월급을 모아 10평가량 되는 다락방에 세를 들었다. 왜 편리한 BOQ(미혼장교숙소)를 마다하고 좁은 다락방에서 생활할까. 답은 간단했다. 해군사관학교를 다닐 때는 신앙생활을 잘했으나 졸업하고 배를 타니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이고 스트레스가 쌓였단다. 휴식 시간이면 자연스레 술을 마시는 등 신앙을 멀리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믿음을 점검해 보자며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인원은 늘었고, 그러다보니 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나는 감동을 받았다. 손 제독의 신사해군 정신을 이어갈 이들을 돕고 싶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 뒤 손 제독의 이름을 딴 '원일다락방'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인도하셨을까? 건물을 지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지금은 원로가 되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찾아갔다. 이미 조 목사님은 해군사관학교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주신 상태였다. 그런데 또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으니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그런데 조 목사님은 해군사관학교교회 헌당예배를 드리는 날, "하나님께서 다락방을 지어주라고 하십니다. 저희 교회가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2억5000만원을 헌금해주셨다.
과거 손 제독과 나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한 보육원 원장을 통해 포도밭을 매입했다. 그리고 당시 김성은 국방장관이 후원해준 땅을 사 그 돈으로 다락방 내부의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7) 기독 장교 교류의 장 '원일다락방' 건립
"다락방이 설립된 지 10년 되던 해인 1980년, 홍은혜 권사가 다락방 형제들의 신앙생활에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의 사재를 헌납하므로 현 다락방 부지를 매입하고,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목사)의 건축비 지원, 김성은 장로의 토지 헌납, 해군 교회들과 기독 장교들의 헌금으로 본 건물이 건축되었으며 그리고 '신앙을 통한 기독 장교들의 지도자적 자질함양'과 고 손원일 제독의 염원이었던 '신사 해군 상을 구현한다'는 뜻에서 '원일다락방'이라 명명하고, 이 건물이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해군 복음화를 이루는 데 더욱 요긴하게 쓰여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새긴다."
2003년 5월 5일 원일다락방 형제자매들이 진해의 원일다락방 입구 현판에 남긴 문구다. 생각해 보니 다락방이라는 말 자체가 기적의 단어이다. 유월절 전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곳, 그리고 오순절 날 기도하던 주의 백성들이 성령을 받던 곳이 다락방이 아니던가. 마가의 다락방 같은 기적이 이곳 원일다락방에도 넘쳐나기를….
원일다락방에 가면 나는 1층 나의 방에 머무른다. 처음 다락방이 만들어질 때 1층에 예배실, 식당, 친교실과 함께 감사하게도 내 방을 따로 꾸며준 것이다. 형제들은 2층 방에 머무르는데, 현재 2∼3인실 10개, 5인실 1개의 방이 있다. 지하에 관리 겸 주방을 섬기는 집사님의 거처가 있고, 3층에는 기도실, 다락방 입구에는 탁구대가 설치되어 있다. 다락방의 하루는 매일 새벽 5시 새벽기도로 시작된다. 개인기도뿐 아니라 민족과 군의 복음화를 위해 중보하고 개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서로의 신앙적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요즘엔 1년에 여섯 번 정도 원일다락방을 찾는다. 이제는 손주뻘 되는 다락방 청년들을 볼 때면 새삼스레 90을 넘긴 내 나이를 실감하면서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찬양을 부를 때면 내 나이를 잊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다락방 생활이 어떠냐?"고 종종 묻는다.
"저는 다락방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섬김과 나눔을 배웠고, 배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함상근무 시절, 주말 출동이 있을 때 교회를 가지 못하는데, 다락방에서의 예배인도 경험을 살려 함상예배를 1년8개월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락방 형제들과의 생활을 통해 주님께 초점을 맞추며 살아갈 수 있었고, 결국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 향후 해군에서 장기 근무를 하며 주님 전하는 것을 삶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였습니다."
"저의 첫 부임지는 인천이었습니다. 주기적으로 1년에 두 차례 정도 진해로 함정을 수리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럴 때면 원일다락방에서 잠을 청하곤 했는데, 마치 엄마의 품처럼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인천에도 월세방을 하나 구해 '인천다락방'이라 이름 짓고 입방 예배도 드렸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들인가. 다락방은 그야말로 기적의 공동체다.
지난해 12월 19일 '다락방 작은 음악회 및 홈커밍데이'에 참석했다. 여느 때처럼 꽃이나 엽서, 그림 등 내가 일일이 만든 선물을 한아름 안고 달려갔다. 다락방 청년들은 참 맑고 깨끗하다. 앞으로도 그들이 작은 예수가 되어 해군 내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8) 소아마비 청년 바로 걷게해준 믿음의 힘
한평생 하나님 품 안에서, 또 그분 뜻대로 살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더 나누지 못한 아쉬움, 더 전하지 못한 아쉬움, 더 기도하지 못한 아쉬움….
1980년대 후반, 낙도 선교를 후원하는 분들과 함께 목포에서 진도까지 8일간 선교를 다닌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스웨덴 덴마크 등 5개국에서 온 예수전도단 청년들이 동참했다. 그 청년들의 열심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끼니도 고작 빵과 라면 등으로 때우며 하루 24시간을 온통 복음 전파에 매달렸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연극도 하고 찬양도 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이들이 자비를 들여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의 오지를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데, 정작 내 나라 사람들은 한번도 이곳을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물론 지금은 많은 분들이 낙도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복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씁쓸했다.
서로 언어는 달라도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니 선교현장은 감동의 장이었다. 나는 통역을 맡았다. 청년들과 함께하니 칠순의 내 나이도 잊은 채 전도에 몰입했다. 그때 죽황도라는 섬에서 만난 22세 소아마비 청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에 누군가의 등에 업혀 나왔는데, 그게 태어나서 첫 외출이라고 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미운 감정을 털어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그러자 청년은 나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저는 부모님이 몹시 미워요. 저를 이때까지 가두어 놓기만 했어요."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오늘날까지 키워주신 분은 부모님이세요. 그분들 이상으로 당신을 돌봐주고 사랑해주신 분이 어디 있어요?"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말을 건네자 갑자기 청년이 눈물을 흘렸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를 붙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가 부축을 받으며 조금씩 한 발짝을 떼는 게 아닌가. 할렐루야!
순간 '이 청년을 돕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집회를 마친 뒤 그 청년을 고향 마산의 한 병원에 데려갔다. 병원에선 수술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었다. "선생님, 꼭 수술을 해주세요. 지금은 수술비를 내는 게 힘들지만, 제가 꼭 마련해 드릴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하지만 그 선생님은 한 노인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년은 세 차례에 걸쳐 수술을 무사히 받았다. 이후 건강이 회복된 그에게 나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세월이 지나 그를 만나러 섬에 갔었다.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나를 꼭 끌어안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께 갚으세요"라고 답했다.
섬을 떠나오며 그와 한 가지 약속했다. 매일 밤 10시 같은 시간에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간만 되면 무릎을 꿇고 그 청년(나에겐 지금도 그의 모습이 한결같은 청년이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통해 많은 것을 거저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거저 줘야 하지 않을까. 훗날, 아쉬움이 남기 전에 한번쯤 주변을 살펴보길 바란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19) 1800t급 첫 잠수함에 '손원일함' 명명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저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따뜻하게 해주며 늘 밝은 마음, 웃는 얼굴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려고 한다. 그게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요즘 나는 서너 달에 한번 정도 진해를 다녀온다. 예전처럼 일주일에 한번씩 오가기는 힘들다. 진해에 갈 때면 손원일 제독과 함께했던 해군사관학교 초창기 때가 많이 생각난다. 자식과도 같은 다락방의 해군 청년들을 볼 때면 늘 대견스럽다.
또 매주 금요일 서울 영락교회 새벽예배에 참석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6시쯤 해군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7시까지 교회로 간다. 그곳에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린 뒤 이어지는 예비역 육·해·공군 대장들 모임에서 성경을 배운다. 대부분 65세부터 70대, 80대지만 나 혼자만 유일하게 90세를 훌쩍 넘겨 그 일원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예배가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붓글씨를 쓰고, 영어를 배운다.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가끔 '섬김의 집'이라는 보육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셋째 아들과 함께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된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쉬운 영어문장을 가르친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서쪽 언덕 상단에 위치한 장군 제2묘역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의 주역을 모신 곳이다. 대부분 육군 장군의 묘이지만 유일하게 해군 제독의 묘가 하나 있는데, 바로 남편 손 제독의 묘이다. 묘 앞에는 돌판으로 된 성경책이 펼쳐져 있다. 요한복음 말씀이 새겨져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1997년 11월, 진해 군항지역에 해군들이 손 제독의 동상을 세웠다. 해군에서 자발적으로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오고 그것을 위해 각자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금을 내는 과정이 있었다고 들었다. 성금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해군이 마음을 보태 손 제독의 동상 제작에 참여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또 2006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214급(1800t급) 잠수함이 취역했는데, 그 1번함 이름이 '손원일함'이었다. 손 제독을 기리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지난해는 손 제독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식이 열렸다. 감사하게도 그때 해군에서는 나에게 공로패를 안겨주었다. 작은 그랜드피아노 모양의 공로패에선 내가 작곡한 해군가들이 흘러나온다.
손 제독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청지기로서의 자기 사명을 감당했을 뿐이다. 다만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서 개척자의 길을 걷다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희생하고 헌신했던 것이다. 이렇게 남아 있는 자들이 그를 기억해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손 제독이 '해군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덕분에 해군은 나에게도 '해군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참 부끄럽고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 칭호를 받아들이려 한다. 왜냐하면 언제까지나 해군의 어머니이고 싶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홍은혜 (20·끝) "이 땅의 해군이여! 다시 일어서라"
"홍은혜 권사님은 소녀 같은 분입니다." "권사님을 다락방에서 처음 뵈었는데, 저희에게 찬양을 가르쳐주시고, 피아노도 직접 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 연세에 괜찮으실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기도에 권사님이 제일 먼저 나오시는 게 아니겠어요." "남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권사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난해 자서전 '은혜의 항해'를 쓸 때 다락방 식구들은 이런저런 말로 나를 격려해줬다. '다락방 식구들이 본 홍은혜'란 제목으로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책 속에 수록했다. 그들은 나를 '열정적인 음악 선생님' '인생의 멘토'로 기억해줬다.
마산의 미인, 해군가 작곡가, 초대 해군제독의 아내, 해군부인회 회장, 해군의 어머니…. 나에게는 매 시기 다양한 '이름'들이 붙었다. 모든 시기마다 소중한 추억들이 있고, 그때마다 불린 이름들이 모두 귀하지만 나는 지금 해군중앙교회 원로권사로서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
나는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94세를 살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내가 짐작하지 못했던 인생의 앞길을 한 걸음씩 인도해주셨다. 그렇기에 따로 염려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그저 매일매일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면서 살 뿐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다시 한번 해군창설 때를 떠올려본다. 해군창설은 그야말로 사랑이 뭉쳐서 이룬 아름다운 기적의 역사다. 해방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니, 아무 것도 없던 그 시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는가. 그때는 왜 그렇게 유리창이 많이 깨졌는지…. 해군의 숙소는 유리창이 다 깨어져 없는 부둣가 근처였는데, 바닷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불도 없는 냉방에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누런 담요 한 장씩을 갖고 새우잠을 자야 했다.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해군 대장이 장병들을 잔디밭에 집합시켰다. "그동안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 수고가 많았소. 일이 많고 바쁘다보니 언제 고향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오늘 저녁 하늘 위의 저 달을 쳐다보며 부모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을 떠올리며 실컷 울어봅시다."
그러자 장병들이 "와" 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한참 후 대장은 말했다. "내 나라의 해군을 건설하는 벅찬 열정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하는 정신으로 해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다 함께 일어서십시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우리 해군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천안함 침몰로 46명의 꽃다운 청춘을 잃고 지난 한 달여 동안 대한민국 국민은 침통함 속에서 보냈다. 유가족의 고통을 보는 내내 나 역시도 많은 눈물을 쏟고 괴로웠다. 이제 서로의 눈물을 씻어야 하지 않을까. 천안함 장병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한다. 마음과 뜻을 다하며 지금의 어려운 고비를 인내하며 넘겨보자. 신사다운 훌륭한 해군의 모습이 '건설'될 수 있도록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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