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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國立洛東江生物資源館
設立目的 : 國立洛東江生物資源館은 國家 淡水生物 主權 實現 및 生物資源의 持續 可能한 利用에 其餘하고자 設立된 國家를 代表하는 淡水生物 專門 硏究機關.
<事業槪要>
*位置 : 慶尙北道 尙州市 圖南2길 137 (圖南洞). *事業期間 : 2009年 ~ 2013年 (5年間)
*建立規模 : 事業敷地 123,592㎡, 建築延面積 23,458㎡ *總事業費 : 922億圓
*主要施設 : 硏究∙守藏施設, 展示∙ 敎育施設, 展示溫室, 硏究溫室, 訪問者宿所 等
<主要施設>
*硏究·守藏施設(12,154㎡)
- 動·植物 標本分流, 微生物培養, 遺傳資源 分析 等 潭水生物資源 關聯 主要 硏究
- 收藏 인프라 構築(收藏庫 9個), 收藏用 컴펙터(156개), 標本場(878개), 標本 製作실(8個所)
※ 動·植物 標本, 遺傳資源 等 550萬占 以上 收藏 豫定
*硏究溫室 및 飼育室(1,704㎡)- 採集·確保된 淡水生物의 飼育 및 管理
- 硏究溫室(植物類), 飼育室(魚類, 兩棲·爬蟲類 登)
*展示·敎育施設(7,702㎡)- 體驗學習室, 企劃展示室, 展示視聽覺室, 第1展示室, 第2展示室 等
*展示溫室(951㎡)- 韓半島 南部 常綠樹林을 構成하는 植物 總 136種 1,800餘占 植栽
*訪問者宿所(1,704㎡)- 外部 專門人力 訪問時 宿所 提供(13個室, 30餘名 收容)
2.洛東江生態文化探訪路
*名稱 : 洛東江 生態,文化 探訪路 造成事業
*造成區間 槪括 - 位置 : 尙州市 沙伐面 錦欣里 ~ 洛東面 洛東里 지내 *事業量 : 50㎞
*主要特徵-探訪路 地域은 洛東江, 淸淨한 地域環境과 集約된 空間의 造成, 政府의 綠色 뉴딜 政策에 附合하는 未來發展形 觀光産業의 育成地이며 探訪 프로그램을 多樣化하여 시너지 效果 企待
*特異事項-探訪路 周邊에는 驚天臺 觀光地, 自轉車博物館, 國際 乘馬競技場, 洛東江 生物資源館, 洛東江투어로드, 洛東江 歷史文化生態體驗特化 團地가 造成됨으로 洛東江圈이 保有한 國內 最大의 生態,文化,觀光地로 開發할 수 있는 充分한 與件이 됨
3.洛東江歷史이야기 村
*位置 : 尙州市 洛東面 洛東里 3番地 一圓
*事業其間 : 2006年 ~ 2015年 (10年間)
*事業規模 : 敷地 148천㎡
*事業內容 : 觀光文化休養, 靑少年修練, 公共施設 等
*擔當者 : 觀光振興科 嚴定達(054-537-7115)
4.驚天臺
嶺南의 象徵이자 젖줄인 洛東江이 감싸안은 “三白의 고장” 尙州는 城邑國家時代부터 沙伐國, 古寧伽倻國의 部族國家가 繁盛하였으며, 新羅時代에는 全國 9州, 高麗時代에는 全國 8牧중 하나였으며 朝鮮時代에는 觀察使가 尙州牧使를 겸하는등 雄州巨木의 古都로 언제나 歷史의 中心에 자리해 왔다. 또한 누란의 危急한 國難을 克復할 때에도 忠과 孝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앞세운 수많은 忠臣과 志士가 있어 자랑스러운 歷史의 脈을 이어왔다 .
洛東江邊에 位置한 驚天臺는 太白山 黃池에서 發源한 洛東江 1,300餘里 물길중 景觀이 가장 아름답다는 “洛東江 第1景”의 稱頌을 받아 온 곳으로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一名 自天臺로 불리는 驚天臺와 洛東江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鶴을 떠올리게 하는 天柱峰, 奇巖絶壁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感想하며 쉴 수 있는 鬱蒼한 老松숲과 展望臺, 朝鮮 仁祖15년(1637) 當代의 碩學 우담(雩潭) 蔡得沂 先生이 隱居하며 學文을 닦던 무우정과 驚天臺碑, 壬亂의 名將 鄭起龍將軍의 龍馬傳說과 말먹이통등 이루 말할 수 없는 名勝地와 遺跡地를 만날 수 있다.
驚天臺 觀光地內에는 展望臺, 野營場,木橋,출렁다리, MBC드라마 商道”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水泳場, 눈썰매장 및 食堂, 賣店 等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루러진 散策路와 맨발 體驗場 및 황토길이 있으며,隣近에는 “傳 沙伐王陵”과 “傳 古寧 伽倻王陵”, “化達里 3層石塔”, 壬辰倭亂의 名將 鄭起龍將軍의 遺跡地인 “忠毅祠”, “圖南書院”등 여러 文化遺籍地가 있으며, 尙州滑空場, “MBC드라마 상도”세트장(中東), 尙州藝術村 등이 있어 家族과 함께 便安한 休息과 觀光을 할 수 있는 最適의 場所로 (돌탑과 黃土길) 脚光받고 있다.
鄭起龍 將軍의 說話 : 龍馬는 驚天臺 아래, 물이 휘돌아 돌아가는 空間이 '龍沼'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驚天臺에서 모래沙場 건너편으로 뛰어노는 龍馬를 發見한 鄭起龍將軍이 이를 잡아서 戰爭時에 有用하게 쓰겠다는 생각으로 잡을 計劃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허수아비를 白沙場에 세워놓고 기다렸는데, 처음에는 말이 거들떠도 안 보다가 나중에는 차츰 關心을 보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허수아비 곁에 와서 몸을 부벼대기까지 하자, 이때 허수아비로 粉粧한 鄭起龍 將軍이 假面을 벗고 그 龍馬를 얻었다는 傳說이 있다. 鄭起龍 將軍은 이 龍馬와 함께 壬辰倭亂 中 錦山 싸움에서 單騎匹馬로 혼자서 敵을 무찌르고 조경장군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봉산곡은 조선 인조 때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지은 가사(歌辭)이고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丙子胡亂으로 昭顯世子와 鳳林大君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仁祖로부터 호가(扈駕)를 命令받았으나, 칭병(稱病)하고 거절하자 3년간 報恩에 流配되었다. 後日 임금(仁祖)이 다시 부르자 感激하여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임금에게 忠誠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情과 自然에 대한 애착을 읊었다. 歌詞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있거라 경천대(擎天臺)야, 요양만리(遼陽萬里) 길히, 머더야 언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館一周年)이 오래다 한랴마난…." 모두 101구로서 3·4조 또는 4·4조로 되어 있다. 또 丙子胡亂으로 인해 昭顯世子와 鳳林大君이 청나라 瀋陽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先生이 후일 모든 官職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도 볼 수 있다.
5.尙州自轉車博物館
우리나라 最初의 自轉車博物館으로 2002년 10월 첫 開館한 尙州自轉車博物館이 2010년 10월 27일 새로운 모습으로 擴張 移轉하였다. 低炭所 綠色成長과 關聯하여 無公害 交通手段인 自轉車에 대한 觀心과 理解를 돕고자 생겨난 自轉車博物館 이다.
展示館
- 1층 企劃展示室 : "두바퀴로 살아온 인생" 기획 전시
- 2층 常設展示館 : 고전, 이색, 레져자전거 전시, 체험관
自轉車貸與 : 어린이용, 異色自轉車, MTB자전거 등 (전 기종 1시간 무상 대여)
4D映像館 : 24석, 15분정도의 3D영상물 상영
自轉車循環道路 : 0.5km
登山路 : 0.5km
駐車場 : 751㎡, 56대 駐車可能
6.도남서원
1606년(선조 39년) 상주시 도남동에 창건되었으며 1797년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1871년에 훼철되었다. 사는 도정, 원은 도남, 도은 경재, 서는 의재, 당은 일관, 동재는 손학, 헌은 관서, 서재는 민구, 헌이 첨의, 루는 정허, 문은 입덕, 동에 영귀문 문 동쪽에 풍우단이 있었다. 1871년 훼철되고 현재 있는 건물이 일관당 뿐이다.(현재 단을 모으고 제향한다.) 여기에 입향한 분은 아래와 같다.
·정몽주(1337년-1392년)
처음 이름이 몽룡, 몽랑 자는 달가, 호는 포은, 본관은 연일, 운관의 아들이며 영천 출신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고 1380년 이 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390년 수문하시중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 조 영규에게 격살당했다. 유학의 성리학에 뛰어났고 고려의 충신이기도 하다. 개성에 오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중종 때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 문묘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이다.
·김굉필(1454년-1504년)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 사옹, 본관은 서흥, 유의 아들이다. 한양 출신이고 김종직이 문인이며 형조좌랑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희천에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다. 성리학자요 그림에도 능했는데 문인에 조광조, 이장곤, 김안국 등이 있으며 광해군 때에 문묘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경이다.
·정여창(1450년-1504년)
자를 백욱이라 하고 호를 일두라 했으며 본관은 하동이다. 육을의 아들, 함양 출신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1490년 문과에 올랐고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에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역행실천 위주의 성리학자였다.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이언적(1491년-1553년)
자를 복고 호를 회재 자계응이라 했으며 본관은 여주이다. 번의 아들이고 처음 이름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했다. 1514년 문과에 올랐으며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다. 위사 공신 3등이며 1547년 윤 원형에 의해 강계에 유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퇴계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성리학자이다. 시호는 문원이다.
·이황(1501년-1570년)
자는 경호,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산인이라 하였으며 처음 이름은 서홍이다. 본관은 진보며 식의 아들, 예안 출신이며 1534년 문과에 올랐고 양관 대재학을 지내고 성리학자이며 시호는 문순.
·노수신 : 1617년 추향됨.
·류성룡(1542년-1607년)
자는 이현, 호는 서애 본관은 풍산이다. 중영의 아들이고 이황의 문하인이다. 1566년 문과에 올랐으며 양관대제학 영의정에 올랐다. 이순신, 권률 등 명장을 천거하여 임진란에 큰공을 세우게 했다.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도체찰사로 군무총괄, 화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 군대 양성, 훈련 도감을 설치했다. 기효신서, 강해 등 국방에 대비했고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기도 했다. 도학, 문장, 글씨에 이름 떨치다. 시호는 문충이다. 특히 1580년(선조 13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높은 학문과 덕망으로 후진 육성에 진력하여 정 경세, 이 준 등 많은 명사들을 배출시켰으며 1631년에 추향되었다. 그가 이룩한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그에 감화를 받은 상주의 선비들이 1582년(선조 15년)에 유애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왕자 사부 하락이 지었다.처음 냉림동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다가 세월이 흘러 비각이 허무러지고 1855년(철종 6년)에 새로 비각과 비신을 건조하였다. 1906년(고종 43년)에 홍수로 비각이 허무러졌다. 다음해 현 북문 파출소 북쪽으로 옮겼다가 1946년 상주읍 현 우시장 북편 국도 옆에 옮겼으며 1979년에 서애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상주읍 남산으로 옮겨 비각을 짓고 보존하게 되었다.
7.사벌국의 유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에 사벌국 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는 큰 고분 일기가 남아 있으며 주위에는 멀리 사벌국의 성곽이었다는 옛 성지가 남아 있어 이 일대를 부족 국가 시대 사벌국의 영역이라 추정하고 신라 말 박 언창이 세운 사벌국의 유적지라는 설도 있다. 사벌국 추정의 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족국가 때의 사벌국을 신라 12대 점해왕 때 장군 석우로를 보내어 사벌국을 멸하고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14대 유예 이사금 때에는 왕이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에 사는 호민 팔십여 가를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사벌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사벌주로 부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사벌국 성지로 추정되는 곳은 상주시에서 동쪽으로 병풍산이 있고 산중에 성지가 있으며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호)이 서 있는 뒷산인 둔진산 동편에 능선을 따라 토성지가 있다.
사벌국 고성에 관계되는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병풍산 밑에 사벌국 고성이 있고 신라 말 후백제 왕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했다>고 하였고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는 <상주시 병성리 병풍산성이 있는데 성안에는 샘이 하나 있고 문지가 두 곳 있으며 관지가 세 곳 있다. 석축으로서 주위 약 600간 높이 3척-6척 폭 2간-3간이다.>라고 기록되어 성곽의 형태와 여러 가지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병성리 뒷산인 병풍산에는 지금도 성지가 완연히 남아 있으며 성 밑의 동리를 보통 성안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달리 성지에 대해서는 기록상 전하는 것은 없으나 현재 사벌면 화달 초등학교 뒤쪽 산 능선에 토성지가 반월과 같이 둘려있고 이 성의 앞들을 성내 혹은 성안이라 부르기도 하며 곳곳에 쌓인 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병풍산성 서편 둥등이 마을 전면 구릉지대에 거대한 석관으로 된 고분군이 있어 신라 토기의 출토가 많고, 둔진산 부근에서도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니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병성리의 안쪽이 옛 사벌국 혹은 사벌주의 중심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8.비봉산(飛鳳山 230m) (尙州市 中東面 오상리)
飛鳳山은 洛東 중의 洛東, 中東面 오상리의 江邊에 地殼變動으로 솟구쳐 생긴 산이다.
鳳凰이 하늘을 나는 形局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어졌겠는데, 실제 보아도 그런 것이 左右로 펴진 稜線이 飛行機의 날개처럼 앞면은 두껍고 뒤쪽은 얇아지면서 깃털처럼 갈라져 영락없이 새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다. 그 가운데 頂上이 머리처럼 우뚝해 강 건너편의 玉主峰을 바라보고 있다.
山勢가 부드럽고 登山路에 소나무가 우거져 散步하는 氣分으로 家族山行하기 좋은 곳이다. 솔잎을 밟고 솔香氣에 취하여 강바람에 옷자락 나부끼며 吟風弄月하는 데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코스 : 中東初等學校 -> 稜線 -> 頂上 -> 잘록지점 -> 中東初等學校 (1時間 10分)
또는 靑龍寺~飛峰山~靑龍寺 코스는 40分이면 마친다.
* 청룡사의 구조 및 볼거리 *
극락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내부에는 목조보살상이 2층 누각의 화려한 보궁 안에 모셔져 있는데 높은 보관을 쓰고 한 손에 보주(寶珠)를 든 채 금칠한 사자상(獅子像) 위의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형태로,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조보살상 왼쪽 불단에는 경주 옥석으로 제작했다는 높이 40㎝의 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머리에 모자를 쓴 이른바 피모지장(被帽地藏)에 천의를 걸친 양식으로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다른 손에 보주를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극락전 앞으로는 지름 130㎝가 넘는 석조 좌대 1점과 이와 비슷한 크기의 맷돌 1점이 있는데 이 유물들은 오래 전에 청룡사가 많은 대중들의 수행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오층석탑 1기도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다. 산신탱을 봉안하는 산신각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 뒤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절벽 끝으로는 종각이 있다. 요사는 2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