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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감옥
전체주의 국가는 반대자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나는 작년에 이러한 질문을 던져 다음과
정치범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을 위한 감옥도 없다.
굳이 들자면 재교육을 위한 감화원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첫번째 여행기에서
이에 대해 언급했다가 서구인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 스스로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즉 <감화원이란 무엇인가?>
북한 사람들은 <수용소>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다음번 여행때는 이에 대해 정확한 말을 듣고
또 그러한 감화원을 방문하리라 마음 먹었다. 이러한 방문이 내게 허용될까?
나는 이러한 것은 해명없이 거절하는 방식이라고 서구적인 태도로 의심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다.
즉 나는 서방의 모든 방문객들, 특히 안목이 좁은 저널리스트들이 저지르는
기다리지 못하는 잘못에 빠졌을 따름이었다.
나는 북한 당국이 바아로에게는 어렵지만 내게는 이러한 소망을 실현시켜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바아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아무튼 바아로는 소련과 동맹국인 동독 출신이면서도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 가 독일로 되돌아 가자마자 감화원 가운데 한 곳을 방문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일행은 평양북쪽에 있는 감화원에 들렀다. 우리 일행은 김선생과 통역자인 리틀 김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 감화원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내가 감옥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최초의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김선생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는 집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젊은이들의 숙박소(=유스호스텔) 같았다.
담장이나 감시탑, 가시철조망 그리고 쇠창살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진입로에서 여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벼를 말리기 위해 삽으로 이리저리로
옮겨놓고 있었다.
결코 중노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자가 세겨진 웃옷을 입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죄수인 셈이었다.
그들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간수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왔는데, 그녀는 친절했고, 서구와 같은 류의 간수는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방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원장을 불러왔는데, 그 역시도 우리의 방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이미 나는 <아, 이들이 나를 속이려 드는구나>하고 여느 서구인들과 또같이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크게 빗나갔다. 즉 법무부의 허가가 아직 내려지지 않았었다.
평양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허가가 내려졌다.
그때야 나는 이곳 사람들이 놀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방문객을 위해 아무것도 꾸밀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았다.
이것이 감옥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이곳이 감옥인 것은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감옥이 아닌 것은
이곳이 내가 아는 다른 나라의 감옥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여느 한국인들처럼 온돌식 방바닥에 깔린 요위에서 잠을 잤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없었고 복도에는 격자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남자 구역과 여자 구역 사이에도 차단시키는 격자나 밀폐시킬 수 있는 문이 없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아버지 같은 타입의 푸근하고 친절하며 마음을 터놓는 원장과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외국인 방문객을 처음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마음을 터놓았다.
그는 나의 모든 질문에 사심없이 대답했다.
*죄수들은 어떤 죄로 이곳에 갇혀 있습니까?*
*절도, 부주의한 잘못으로 작업에 손해를 끼친 행위, 지속적인 태만,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된 결근 등의 죄입니다.*
*살인죄는 없습니까?*
*살인죄라고요? 그러한 범행은 발생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살인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형도 없겠군요?*
그는 깜짝 놀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이십니까!*(내가 아는 한 사형은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집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종신형은요?*
*오, 말도 되지 않습니다. 법률상 제일 긴 형벌기간은 1년입니다.
하지만 모든 죄수들은 자신들이 직접 석방시기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죄수들 모두가 각기 자신들의 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이 표는 작업달성도와 학습(주체사상의 습득과 이해)의 진도, 그리고 자비심이 가장 중요성을 갖는 좋은 품행 등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색깔의 막대눈금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자신의 눈금을 다 채워 올린 자는 재교육된 것으로 간주되어 석방된다.
이렇게 석방된 자는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 가는데, 이곳에서는 형벌을 받았다고 해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모든 게 매듭지어진다.
그런데 이곳에 갇혀 있는 자들은 어떠한 계층 출신들입니까?*
*다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노동자들입니다.*
*그리곤, 경영자들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파면되어 다른 직장, 대개는 잘못을 저지른 곳과는 동떨어진 직장에서 노동자로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심한 형벌이죠.*
(나는 계속해서 과감하게 질문해 나갔다.) *고위직 간부일 경우는요?*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정치범은요?*
*정치범이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김일성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민들은 자기자신과 부합되지 않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인민회의가 있습니다.*
나는 이쯤 해두었지만, 다음번 여행때 다시 한번 이 문제를 거론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내가 이번에 알게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즉 북한감옥에서는 격리구금이 없고,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고문이 없었다.
또한 면회금지, 서신검열, 구타, 기합, 업신여김 등이 없었다.
나는 히틀러 치하에서 겪은 내 자신의 감옥시절뿐만 아니라 서독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
그리고 쉬탐하임을 생각해 보았다.
이럴진대, 서방언론이 북한에 대해 암흑의 독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북한 당국은 죄수들이 탈선하지 않도록 몹시 신경쓴다.
이 때문에 투옥 기간은 짦고 인간적이며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
아울러 편지쓰기가 권장되고 있고 우편물은 검열하지 않으며, 면회는 감시받지 않는다.
죄수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 되며, 가능한 바르게 다시 정상적인 직장생활로 복귀되어져야 한다.
*죄수들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정원이나 들 그리고 가축우리에서 8시간 작업을 하고, 2시간 학습을 받은 후에, 낮에 거처하는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거나 운동을 하며 자유시간을 보냅니다.*
원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위대하신 지도자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형벌을 통해 사람의 기를 꺽지 말고 토론과 모법적인 태로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포는 가장 나쁜 교육수단입니다. 억압은 증오와 저항을 낳기 마련입니다.*
나는 간수나 원장이 총을 차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어디에다 총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죄수가 달아날 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달아나는 죄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들의 죄를 잘 알고서 속죄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달아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총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총은 오직 전쟁터에서만 사용될 따름입니다.
우리는 총을 쓸 수 밖에 없는 그런 때가 다시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사 /루이제 린저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루이제 린저의 대표작 '생의 한가운데' 주인공 '니
나'라는 여인의 초상은 매우 독특하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니나는 우
선 자존심 강하며 자립적이다. 맑은 두뇌와 지성과 강한 성격 때문에 언
제나 극단적인 상황속에 몸을 맡기고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줄타기
하는 것 같은 몸짓으로 살았다.
1950년에 발표된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여인초상을 통해 개개
인이 삶의 주인공임을 일깨워준다. 실존주의적 사상과 정치적 진보주의
를 암시하며 '여성을 통한 구원'이라는 괴테적 이상주의를 결합시켜 전
후 허무주의에 빠져 있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일본 중국에서
도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는 얘기를 들으며 60
년대에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서울 법대강단에 섰던 신화적인 여성작
가 전혜린씨의 번역으로 소개되었다. 니나처럼 강렬한 불꽃 삶을 살다가
32세에 요절한 천재로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통을 사고 있는
전혜린씨다.
루이제 린저는 '생의 한가운데' 외에도 '희생양', '생의 한가운데' 속편
인 '덕성의 모험'을 발표하여 한국에서도 폭발적이고 꾸준한 인기를 누렸
다. 그는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반핵, 여권신장, 평화운동 등에
자기 소리를 냈으며 냉전시대에 북한을 10여차례 여행하면서 김일성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이상과도 친분을 맺어 그의 사망후
집필한 전기 '상처받은 용'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북한 방문기 '또 하나의 조국'에서는 '김일성은 자신이 만나본 가장 호방
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로 묘사했다. 실업, 노숙자, 마약, 부정부
패가 없는 낙원을 위해서는 독재도 허용될 수 있다는 무비판적 좌파 시각
에서 북한체제를 옹호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북한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엑소더스를 감행한 탈북동포가 대거 입국
했으니 루이제 린저의 북한체제찬양은 오해였다고 할까?
그가 떠난 오늘 가만히 질문을 던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또하나의 조국
우리에겐 또하나의 조국이 있다.
대학교때 생의 한가운데의 저자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다녀와서 쓴 북한 기행문의 이름이 또한 또하나의 조국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가난하지만 후손을 위해서 금강산의 계발을 참을 줄 아는 나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든 해야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사회의 중심에 인간의 주체가 살아 있는 주체성을 가진 나라"
북한 사람들을 이리떼로 비유한 책을 읽고 자란 나에게,
내 반토막 조국 북한에도 나처럼 사람의 형상을 한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대학시절까지 생소했었던 나에게 이 책은 혁명을 불러왔다.
그렇게 길게 권력의 꼬랑쥐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쳤던 박정희와
수많은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면서까지 권력속에 남으려 했던 전두환의 시대도 끝이 났다면, 김의 세대에 걸친 장기집권에는 비밀이 있지 않을까..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한의 집권자들 열분에 비하면,
미국에 대해서 큰소리치는 지구상에 몇 안되는 나라중에 북한의 집권자들 여러분을 보면 은근히 통쾌함을 감출 수 없다..
어제 그저께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폐막식에 다녀왔다.
내자리가 북한 응원단의 자리 옆이었다.
내 주변의 대다수는 북한 응원단을 쳐다보면서 격려의 깃발을 흔들고 한반도깃발로 서로 교감하고 있었다.
그 따스이 교감되는 마음이 가슴 벅차 오르게 하였다..
내가 이땅을 내 조국으로 점찍어 태어나지 않았다.
저들도 북한땅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같은 종족으로 태어나 다른 이념을 가진 정부를 가진 죄 밖에 없다.
미국사람들이 미국에 태어난 것이 저들의 전생에 대한 댓가가 아니어서, 미국인임을 으시대는 꼬락서니가 눈꼴 사납지 않은가.
나 다행히 여기 태어나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통일이 되어서 북한에 뭔가를 나누어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겠다.
주체가 불분명하고 사대주의의 뿌리를 아직도 뽑아내지 못한 우리도 그들에게서 특별한 무엇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이나 지나서, 루이제 린저가 보고 느끼고 글을 쓴 것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동안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벗어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것 같다.
이 진리인양 믿고 있다.
또한 북한사람들은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생각하고 믿고 있을것이다.
이 객관성이란,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여행할 당시에 그녀의 조국인 독일도 역시 분단 상태였다.
(물론 독일과 한국이 분단된 것은 독일이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었
고, 한국은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분단되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분단된 조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는 또다른 분단국가의 모습이었고, 루이제 린저는 자신이 편
견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쉽지만은 안았다고 한다.
믿을 수가 없지만..
그녀가 또한 사회주의자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20년이나 흘러버린 그 시대와 지금의 북한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외국의 작가도 우리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
각 하고있을까?
한번 고민해볼 문제이다.
동백림 사건과 윤이상
1963년 4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그 후로도 여러 번 평양을 방문하며 김일성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희곡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 안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서독으로 추방되어 그 뒤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정치 운동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1] 그 뒤로 조국 통일 범민족 연합(범민련)의 유럽 본부 의장으로 있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소식을 듣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써서 이듬해 발표했다.
1985년 오길남 박사를 월북시켰으며, 1986년 오길남박사의 탈북이후 윤이상은 1987년 10월, 1988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있는 부인이 쓴 편지를 건네주며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오갔다. 북조선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1009&logId=1907914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의 우정)
(루이제 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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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어머니 울린 심수봉 '조국이여' |
심수봉 - 조국이여
눈 덮인 대지에도 뿌리 있으면 푸른 잎 다시 피는데
무슨 사연으로 갈라섰나 마지막일 줄 몰랐나
부모형제 기다린 세월을 눈물로 만들고 무정한 기차야
내 님은 어디 두고 너만 혼자 이제야 오나
조국이여 서러운 조국이여 이별 땜에 병 난 내 조국이여
기막힌 사연들을 누가 물을까 앞만 보고 가는 한강
한숨만 쉬다 못해 하늘만 보다 키 커진 금강산 소나무
높은 담 감옥 땅 너머 잠시 잡은 님의 손 변절한 끓는 피도
성한 곳 없어 돌아서 울어버린
조국이여 미웠던 조국이여 두 얼굴의 못난 내 조국이여
용서해주오 용서해주마 말 좀 해봐요
사랑하고도 미워하는 건 수많은 상처때문에
하나님이 위로해주오 사랑하게 한 몸으로 다시 안게...
첫댓글 "가난하지만 후손을 위해 금강산 개발을 참을줄 아는 나라..."
동이의 후손과 원숭이 종자의 근본적인 차이점...
이런! 여태 윤이상선생이 북측 음악가인줄 알았었네요.
서평방송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었는지라~...ㅎㅎ(부끄~)
최소한 루이제린저의 위 말씀들대로라면
이북은 한민족의 원형적인 순수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특히, "~ 수령님께서는 형벌을 통해 사람의 기를 꺽지 말고
토론과 모법적인 태로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포는 가장 나쁜 교육수단입니다. 억압은 증오와 저항을 낳기 마련입니다."
어렸을적 말 많은 사람을 핀잔줄때면 흔히
"이 사람 공산당을 닮았나. 웬 말이 그렇게 많어"
하는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그녀 말에 올곧은 믿음을 내기가 쉽지는 않네요.
암튼 감사합니다.
공포는 가장 나쁜 교육수단....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