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司成公 墓誌 * (사성공 휘 종소 묘지문)
公의 諱는 종소(從韶)요 字는 가정(可貞)이요 本貫은 迎日縣이니 上祖는高麗의 추밀원 지주사 인 諱 襲明이시니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이 있었으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 양왕조를 섬기며 강직(强直)함을 心柱로 하여 보필 하다가 용납 됩을 보지 못하고 生을 마쳤으니 그 事蹟이 史官의 記錄에 있다. 그 後 六世間 모두 등제되고 발굽을 이은 어진 관료들이 혹은 卿宰級에 까지 이어졌다. 7世에는 諱가 仁彦이 있었으니 官은 전공판서로 永川에서 살았으니 곧 文忠公 포은선생 諱 夢周의 종증조 이시다.
시생(是生)이 諱 광후(光厚)이니 아조(我朝)에서 工曺判書를 지냈으니 이분이 곧 公의 증조고 가 된다. 祖의 諱는 瑋로서 문과하야 司正하고 考의 諱는 문예 이니 생원하야 영산유학 교도를 歷任하였으며 詩名이 있었다.
비(女比)는 孺人 영양이씨(현 永川李氏)니 부사직 玄實의 女로 대전선생(이보흠)의 누이 이다.
公은 영천군북 대전촌 재일봉하 에서 성장하셨으니 유시(幼時)의 모습은 빼어났고 명랑하였으며 총명해서 영특한 기운이 있었다. 外叔父인 大田李公(이보흠)을 좇아서 수학하야 文藝가 일찍 창달 되어서 同門 수학자 들이 公을 따를수가 없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소꼽친구들과 공산(公山) 은해사에 들어가서 독서하고 있을때에 윤공(尹公)
통(統)이 방군(傍郡)의 태수(太守)로서 놀러 왔는데 그 구종(驅從) 별배(別陪)가 대단히 많았다. 公은 동무들을 이끌고 소고(小鼓)를 우리면서 말하기를 ''山堂에 만도(晩到)하는 것은 古風에 그 죄(罪)를 벌(罰)해야 된다고 했도다''.고 하니 윤公은 거짓으로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작은 더벅머리 小童으로서 敢히 장자를 모멸 했으니 마땅히 벌 을 받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만약 詩를 잘 지을 줄 안다면 그 죄를 용서해 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汝에게 매로서 다스릴 것이니. 라고 하자 公은 드디어 [빨리 지어볼 터이니 운자를 부르시오]하고서 운자를 정해주자 마자 公은 붓을 들고서 선 자세로서 詩를 지어 써 내려감으로써 보는 이마다 놀랐다.
이를 본 尹公 統은 크게 칭찬하며 기이하게 여기더니 마침내 그 딸과 혼인시켜서 사위로 삼았다. 正統 丁卯(1447년) 春에 문과 급제하야 성균관 학유 에 補해 졌다가 秋에 문과 중시 에서 성삼문과 동방으로 급제 하였다.
세종대왕 께서는 바야흐로 문학을 중히 여겨서 이 문과에서 同時에 선발된 급제자들이 진신(搢紳)으로서의 영화로움을 누린 바가 최고度에 이르렀다.
대전이공은 詩를 드려서 그 제형(생원공 문예)에게 서로 축하를 했다.
成公 삼문(三問)은 기(旣)히 방수(榜首)요 朴公 팽년 과 李公 개 와 柳公 성원 도 동방 급제자 들로서 같은 방중에 있었으니 公은 드디어 더불어 교우를 定하고 경적(經籍)을 동연하며 명예와 절의를 격려하여 막역지교계 를 맺었다.
公은 기 히 성균관으로부터 집현전으로 옮겨서 그 명성을 날렸고 다시 이조좌랑으로 천보되니 세상에서는 모두가 다 公은 君主를 보필하는 그릇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乙亥(1455년)에 단종이 손위하고 이어서 사육신들의 옥사가 일어나서 대전이公도 이어서 살육 당함에 미치게 되자 公은 사환의 길에 머물러 있을 뜻이 없었다.
그러나 집에는 어버이가 계시는 故로 그 禍가 가내의 부모에게 미치게 될까봐서 구설수를 경계하여 입을 다물고 감히 애안이 되는 행동은 노출 시키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여러차례로 사헌부의 소임이나 사간부의 소임등을 제수 했으나 公은 문득 그때마다 병을 칭탁해서 굳이 사임 하다가 군부의 소임에 맞는 외직으로 제수가 내리자 친명(親命)으로서 힘을 내어서 부임하여 부모봉양에 힘을 입었으나 즐긴바는 아니었다.
의성현령.영천군수(榮川) 예천군수 함양군수 등의 많은 읍재를 역임했으나 모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서 곧 직을 버리고 돌아 갔으나 부임한곳 마다 모두 선정으로서 치적(治績)이 명성을 남겼으니 당시 榮川郡守로 재임시 에는 므릇시설(施設)한 바 모든 동정과 이합집산이 자로써 잰 것처럼 해서 오직 진실하고 엄격하게 신실(信實)로서 상부를 받들고 깊은 정과 따뜻한 분위기로 백성을 사랑하고 강직하게 질투와 비리를 물리쳐서 1년이 못되어서 민정은 바로잡혀서 백성들은 서로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정사가 확립하게 되자 그 여력으로써 누(樓)와 원(院)을 증건하여 그 곳을 방문하는 관원이나 내빈들을 기분좋게 맞이하게 되었으나 한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거나 그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았고 또 국고를 축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때 조정의 관원이 그 군에 와 있었지마는 이 공사역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향서당을 지어서 좋은 명절마다 향부노(鄕父老)와 사대부들을 맞이해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향사의(鄕射儀)도 개장하는 동시 더불어서 서로간에 예의를 지켜서 사양지심 도 습득하게 하고 사회의 풍속 교화에 있어서도 돈독하게 이끌었고 또 각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서 독서로 하여금 그 재조와 인품을 기르게 해서 여기에서 유예(遊藝)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진행 과목에는 조금도 게으름을 짓지 않도록 권장하고 인(因)하여 향규약간조문을 지어서 영구히 행케 하였다. 그리고 또 군지(郡誌)를 撰해서 고적도 기록하야 後世에 전하도록 했더니 군중의 인심이 화합하여 저절로 한 곳으로 모여졌다. 점재필 김문간공(김종직)이 일찍이 榮川의 소루의 기문을 썼는데 가로되 ''이 邑에는 어진 군수로서 뛰어나게 나타났던 인물이 군민들이나 세상인들의 이목에 남아있는 분들로서는 하호정(河浩亭) 윤(崙)과 鄭公 습인(習仁) 최공 원유등(元濡等) 3인이 있었고 현재의 군수 오천정선생 도 이와 동등한 류(類)의 한분이다''.살펴보면 公이 榮川의 수령으로 부임해서 시정한 치적이 可히 입증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다스린 고을이 의성과 함양과 예천 등 으로서 모두 榮川에서 배풀던 치법(治法)을 그대로 사용 했는데 그 후에 이 법이 각읍 수령들이 모두 이용 했음을 기록에서 볼수 있는데 지금도 이를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보면 可히 고증할 수가 있다.
成宗2년(1471년)에 전라도 진휼사의 종사관 으로 다녀온 후에 성균관 사성을 제수 하여 역임 했으니 이가 마지막 관직 이었다.
宗孫이 표박(漂泊)하여 가첩의 부전으로 인하야 生年과 卒歲를 고증할 길이 없으며 전후 이력도 동시에 모두 상세하지 못하고 유문 유묵도 모두 흩어져서 잃어버리고 단지 詩 4편과 책 2편과 書와 전(箋)과 발(跋)이 각 1편식 전해 오고 있으므로 그 글들이 모두 전아(典雅)하고 유법하고 책(策)도 건려(健麗)하고 굉박(宏博)해서 실로 경륜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 있었으니 만약 장상(將相)을 맡았더라면 묘당(廟堂)에 올라가서 반드시 대사업의 업적을 이루어서 그 명성이 역사에 전함이 있었을 것이나 불행히도 재앙이 있는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밝게 펴볼 기회를 조금도 얻지 를 못하였으니 이는 천운이 이니리요.
그 뜻은 맑았고 그 자취는 위태로 웠고 그 행로는 고(苦) 되었으나 참고 견디며 어두운 세월을 깊게 잠겨서 부모에게 까지 누(累)를 끼침이 없도록 중용을 지키며 시종 근심 속에서 산 것이니 그 심중의 어려웠던 바가 어떠했으리요. 孔子가 말한[류하혜(柳下惠)는 젊어서 부터 줄곧 일신에 욕이 되어도 그 뜻을 굽혔느니라.]했다. 더듬어 보면 그 언론중에 윤리가 있고 행지중에 의리가 있었으니 그 의치(義致)를 아는 者는 가히 公의 심사를 알 수 있으리라. 고 하였다.
별세후 원당리의 간좌곤향지원에 장사를 지냈으니 卽 증조고 판서공의 墓所의 右麓이다 .
숙인 尹氏의 墓所는 公墓의 위에 있으니 그 상하의 거리가 10보가 된다. 尹氏는 평산인 으로서 父 統은 官이 참판에 이르렸다.
公은 3남1녀를 두었으니 長男은 以揮로 장수도 찰방 하야 점필재 김公이 詩客이라 칭(稱)하며 함께 읊은 창수가 많다.次는 以僑로서 전랑을 역임하고 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로 끝났다.
次는 以諶이다. 女는 權欽祖에게 출가했다.
찰방공도 5男을 두었으니 차순(次諄)은 직장하고 다음은 차함(次 言咸)과 차해(次諧)와 차성(次誠)과 차근(次謹)이다.
교리공도 5男을 두었으니 공징(公徵)은 서윤(庶尹)이요. 公虔은 첨정 이요. 公弼은 군수요. 公淸은 현감이요 公藝는 참봉이다.
以諶은 4男을 두었으니 公英과 公傑 公俊 公亨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점점 더욱 번성해서 지금 그 後孫으로서 연락되는 생존자 가 거의 200여명 으로서 詩人 墨客과 官冕들이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았으니 그 가운데에서 명성과 덕행이 가장 높은 이는 次謹의 子 참봉 允良과 孫에 증판서 世雅 그리고 증손에 증승지 宜藩 그리고 현손에 문과하여 목사에 好仁이요 공징의 5대손인 통제사 后亮과 공필의 子 좌랑 昌武 증손에 헌납 維藩 이 있고 공예의 현孫에 승지 繼胄가 있고 기여의 고관과 소과는 不可盡記이다.
九世孫 重器 謹撰
사성공 가장 = 後孫 鎭韶 謹草記
사성공 행장 = 李泰一 謹書
公의 字는 가정(可貞) 號는 정헌(靖軒) 烏川人으로 判書 諱 光厚의 증손 영산교도 諱 文裔의 長男으로 鄭圃隱의 3종질이며 순흥부사 李甫欽은 公의 외3촌이다,
영천군북 대전촌 제일봉下에서 출생하였는데 용자수랑총명(容姿秀朗聰明)하였으며 자라서는 世宗29년 丁卯:1447년에 문과에 오르고 동년 성삼문,이개,유성원,신숙주,박팽년,최항,정창손,등과 함께 重試에 入格하였다,
내직으로는 전랑,교리,사성,이요 외직으로는 영주목사,안동영관,등을 역임하여 집현전에서는 팔준도전(八駿圖箋)을 펼쳤다,
단종임금이 손위후로는 칭질(稱疾)하여 대부직을 고사하였고 丙子後 금성대군,외삼촌 이보흠(순흥부사)과 더불어 영월에 유배된 단종(노산군)의 복위를 꾀하여 격문을 작초(作草)하고 영주의 제민교(濟民橋)를 건조한다는 口實로 志士들과 주래하다가 일이 드러남에 금성대군은 안동에 유배, 이보흠은 박천(博川)에 유배당하고 김대중(金大仲)은 촉지(捉致)되고 하였는데 公은 피신하여 모면하고 후에 금산 봉계(현:김천 봉계)에 禍를 避하여 은거(隱居)하여 절개를 지키다 타계(他界)하였다,
점필재(김종직의 號) 金宗直이 항상 경중(敬重)하여 상칭(常稱)하기를 鄭先生 鄭先生하였다, 後에 復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