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 앞에 직면해 있는 어떤 환경이나 사람들로 인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망이 실망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심이 단순히 낙심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 속에 쌓이게 되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자신도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결국에는 끝없는 한탄과 절망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손에 맥을 놓고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낙심과 실망은 자신을 황폐한 광야의 한 가운데로 몰아내고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자 아닌 병자와 같은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 속에는 실망과 낙심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쉽게 넘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버텨야 합니다. 사람으로 인한 낙심이 자신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이란 환경적인 실망과 낙심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영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어떤 환경이나 사람들 앞에서 성급한 비판이나 판단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물론 어떤 사람의 길은 다른 사람의 길보다 더 험난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는 길을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실망이 나 자신을 생포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시련과 역경을 넉넉하게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라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섬기며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채찍의 도구로 쓰셨던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가운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이스라엘 민족이 옛날과 같이 회복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가 되면 포로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와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른 기대감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포로로 끌고 온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당시에 여전히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과 싸워서 이길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한 지 70년이 되었을 때 그들이 꿈에서라도 기대하지 않았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현실이 됩니다. 그렇게 강대했던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라는 나라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자기 망한 것입니다. 사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찾고자 바벨론을 대항해서 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대와 바사라는 나라가 일어나서 어느 날 거대한 제국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뒤로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그들 가운데, 그들 위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 이후 세 번에 걸쳐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에 걸친 귀환의 시기에 우리는 세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입니다. 이들 세 사람의 지도자들은 각기 다른 사역에서 활동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즉, 에스라 1장에서 6장에 기록된 1차 귀환에서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사역이 맡겨졌습니다. 에스라 7장에서 10장에 기록된 2차 귀환에서 지도자였던 에스라에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율법을 재정비하는 사역이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헤미야에 기록된 3차 귀환에서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이 맡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포로 후기에 기록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유다 공동체를 향한 다음과 같은 영적 부흥의 순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전의 건축과 공동체를 향한 말씀의 회복,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우선순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복의 우선순위를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전이 맨 먼저 와야 하고, 그 다음에 공동체의 정결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시의 바깥쪽 성벽을 쌓는 일입니다. 따라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성전의 회복과 말씀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성벽의 재건축이라는 중요도의 순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건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성전의 재건이었습니다. 성전의 재건이 있고 나서야 그 성전을 중심으로 말씀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 성전 중심의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우리가 말씀을 통한 영적 회복의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성벽의 재건, 도시의 회복도 이루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광복의 해방을 맞이한 지 71년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어느 날 그렇게 갑자기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목숨을 바쳤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아주 요원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더 독하게 일제 앞잡이가 되어 저들에게 충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는 패망했고, 우리 나라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은 해방과 함께 초래된 남북분단의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단 71년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 기대해야 할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과 백성들은 망망한 바다에서 거대한 폭풍 앞에 직면해 있는 돛단배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북한 핵무기의 실전배치는 이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무역장벽은 절벽화 되어 가면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방향도 제시하지 못한 채 더러운 진흙탕 싸움만 해대고 있습니다. 연봉이 2천만원 미만인 근로자들이 전체 3분의 1이 넘는 현실인데도, 1억 이상을 받는 소위 귀족 근로자들이 더 달라고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서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우리 나라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지나온 역사에서 경험했던 부흥을 다시 한 번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통한 회복의 역사를 맛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강해하고 싶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고레스를 ‘감동시켜’ 포로 귀환이라고 하는 기념비적인 선언을 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복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개인과 가정의 회복도, 공동체의 회복도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면 우리가 기대하는 회복의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감동하심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감동하실 때 그 감동의 성격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세속 역사에도 관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세속 역사 속에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로만 국한시키려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자 그대로 그분은 만유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그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통치자였던 바사(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를 감동시킴으로써 당신의 일을 시작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만을 보면 당시 고레스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앙의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역사는 그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신이든 찬양할 마음이 있었고, 자신의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신의 축복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다원주의적 종교인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정복하는 정복지의 모든 신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각 민족의 신앙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결코 유일신만을 믿는 그런 신앙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왕도 쓰셔서 당신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감동시키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에서 자유를 허락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고자 함이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에 보면 자기 민족을 향한 예레미야의 눈물의 예언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70년만에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 에스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세계 열강이나 지도자들을 사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이나 생각을 얼마든지 바꾸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평화로운 통일도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북한의 김정은이도, 중국의 시진핑도, 러시아의 푸틴도, 미국의 오바마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역사의 한 복판 속에서도 감동의 역사를 펼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수들의 마음을 바꾸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의 성격 두 번째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그가 먼저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가운데 하나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이유였습니다.
보십시오. 고레스를 향한 하나님의 감동은 포로에서의 자유였습니다. 시온의 땅으로의 복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파괴되었던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십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역사가들은 아마도 고레스가 당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 건축의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1절 말씀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결과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건축된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또 하나의 거룩한 건물이 건축되었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 하나가 지어진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물론 예배라는 것이 건물이 없이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구약의 제사에 있어서 성소로서의 건물은 하나님과의 구별된 만남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에게 드려야 할 경배를 위해서 아직도 필요 불가결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건물 그 자체보다도 예배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선순위는 예배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예배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반면에 예배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은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이든, 신약의 예배이든 그 핵심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 먼저 첫째로 성공해야 할 것은 예배의 성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부터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가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설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출발하는 기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지 못하고 인생의 여정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의무는 삶의 우선순위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일에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선한 일에 힘쓰는 주일 성수는 우리들의 성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예배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집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도 무너집니다. 유럽의 세속화는 그렇게 왔던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세속화가 온다면 그렇게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 이미 이 땅에도 세속화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 세속화를 막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예배가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세속화에 빠져 방황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방황을 중단하고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이 땅의 성도들에게 그 무엇보다 예배의 회복에 감동을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예배를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라도 우리는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예배를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도 회복될 것입니다. 방황하는 내 삶도 회복될 것입니다. 가정도 회복될 것이고, 민족도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하나님의 감동의 또 다른 한 차원이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헌신하게 하십니다.
고레스를 향한 하나님의 감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에로 복귀할 것과 성전 건축을 명령하시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헌신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여기 불신자인 고레스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이야기와 같습니다. 불신자가 신자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제발 신앙생활 잘 하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3절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고레스는 포로가 되었던 자리에서 자유함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고레스는 자신의 손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백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발적인 기쁨과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적 봉사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면서도 이 원칙을 지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4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기쁘게 드릴지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드리는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런 헌신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의 헌신의 원리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 기쁘게 내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헌신과 헌금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헌신과 헌금은 기뻐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서 읽어보십시오. 마가복음 12장 4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바깥에 헌금함이 있었고, 거기에 헌금을 넣고 안으로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있는 사람들을 주목해서 보고 계셨습니다. 옛날 그렇게 하셨던 주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그렇게 하실 가능성은 없을까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가를 주목해서 보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아무 것도 아닌 가치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것을 헌금하는 그 모습을 주목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헌금하는 자의 마음, 헌신하는 자의 마음을 우리 주님은 주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가난한 과부가 드렸던 두 렙돈이 수치상으로는 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두 렙돈이 무려 300개가 모아져야만 한 데나리온이 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일꾼이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렙돈이라는 것은 돈도 아닙니다. 그 당시에 거의 쓰여지지 않는 돈이 바로 렙돈이었습니다.
이 렙돈이라는 화폐는 사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마카비왕조 시대에서부터 쓰여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잠시 독립을 해서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마카비왕조 시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마카비왕조도 퇴락하여 결국 로마 제국의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의 지배를 당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카비왕조 시대에 사용하던 동전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성전 회복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로마제국에서 보았을 때는 불순한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돈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종교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 화폐는 뒷면에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반면에 렙돈은 원래의 화폐 가치와는 무관하게 로마 황제의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돈의 위력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푼돈 그 자체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런 목적으로 렙돈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나 성전의 회복은 그야말로 가이사의 발끝의 때만도 못한 초라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효과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렙돈을 대할 때마다 희망이 아닌 절망과 좌절을 느끼도록 했을 것입니다.
렙돈의 무게는 2그램 정도였고, 재질은 구리였습니다. 크기는 1.5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새로 나온 1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작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렙돈에는 두 개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배를 움직이는 배의 키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수레바퀴가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과거 마카비왕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독립을 위해서 일하던 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두 렙돈을 과부가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의 가치는 없지만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렙돈을 드린 이 과부의 마음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과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담겨진 헌신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헌물에 우리의 기도, 우리의 애정, 우리의 헌신이 담겨져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옛날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헌금 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헌금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계십니다.
오래 전, 영국 교회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헌금을 하고 있었을 때 큰 헌금 박스가 교인들 사이를 돌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의 아기와 같은 어린 소년이 갑자기 헌금 박스 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놀라서 “얘야, 뭐하고 있는 거니?”라고 했더니 이 어린 소년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바칠려고요.” 이 소년이 바로 후에 아프리카를 변화시켰던 그 유명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은 지금도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도록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예배자로 세움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그냥 종교적인 유희를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감동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 앞에 우리가 기쁨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 앞에 기쁜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그럴 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교회도, 새로운 나라도, 새로운 민족의 내일도 열려올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 교회와 이 땅의 교회 위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