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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 대만 가다 >
☆ 일시 : 2015.01.05 ∼ 2015.01.09 (4박 5일)
☆ 참가자 : 정성철(47) 부부 및 외손녀(국빈), 안창성(52) 부부, 도무석(54) 부부, 한경호(56) 부부,
윤한석(63) 부부 및 장남(관우) 등 총 12명. - 괄호 안은 출생 연도임.
☆ 여행 유형 : 패키지여행(BS Fun Tour 주선)
☆ 여행지 : 대만 ( 화련, 야류, 스펀, 타이페이 등)
대만은 에피소드 위주로 글을 적을 정도의 흥미거리가 없어 일반적 기행문의 형식을 따르려 한다
☆ 2015. 01. 05(월)
청도에서 7시 28분 구포행 기차를 안선생님 부부와 탔다. 대구 도사장 부부는 동대구에서 바로 김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탄다고 한다. 구포역에 도착 후 일부러 대로변까지 나와서 택시를 탔다. 바로 앞에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바가지를 씌운다는 게 안선생님의 말씀. 경전철도 있었지만 4명이 이동하는 것은 택시가 유리할 듯 했다. 4명이래야 캐리어가 2개라 별 상관이 없었다. 택시비는 8천 여원 나왔다.
09시에 부산 김해국제공항 에어부산 카운터 앞에서 12명 모두 모이니 제법 큰 무리의 여행자 집단처럼 보인다. 짐을 부치는데 휴대폰 배터리를 캐리어 안에 넣지 말고 휴대를 하라는 지침이 새로이 생긴 것이 좀 의아했다. 배터리 과열로 화재가 날 것을 예방하려는 것일까. 면세점에 들러 각자가 부탁 받거나 사려고 했던 것들을 산 후, 11시 05분발 BX 793기에 탑승했다. 2시간 20분을 비행한 후 타이베이 타오위엔(桃園)공항에 13시 25분에 도착했다. 시차는 1시간이 나니까 1시간 당겨 12시 25분이 되었다. 이런 경우는 뭔가 이익 본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공항에 내리니까 일단 날씨가 온화했다. 청도의 최저 기온이 영하 1∼2도였는데 최저 온도가 14도밖에 안되니 저녁 바람이 분다면 늦가을 쌀쌀한 날씨 정도이다. 가을 옷차림에 조끼와 바람막이 정도 준비했는데 반팔 남방 하나 준비하는 것도 괜찮을 듯 했다. 대만은 북쪽은 아열대, 남쪽은 열대라고 하나 우린 중부 지방인 화롄까지밖에 안가니 열대 기후는 접해볼 기회는 없는 셈이다. 대략 북쪽은 기온이 14∼20도 정도이고 남쪽은 2∼3도 정도 높은 것 같았다.
패키지여행의 경우 어떤 사람을 가이드로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의 많은 부분이 영향을 받는 바, 마중 나온 가이드를 보니 탄식이 나왔다. 첫인상이 너무 왜소하고 어려 보여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름만은 대단히 씩씩하게도 왕건무(王健武)란 28살이 된 청년이었는데 내 보기엔 중학교 3학년 중에서도 키 작고 덩치 작은 아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화교 4세인 듯 단어 선택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게다가 키가 작아 바짓단을 속으로 올린 것이 정강이뼈 중간까지에 이르는 것과 바짓단을 누빈 굵은 무명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는 것을 보고는 가여움이 이 가이드의 컨셉인가할 정도였다.
< 앳된 표정의 왕건무. 이 바지는 헤어지는 날 입은 것이어서 좀 나은 편이다 >
그러나 순박하고 나름 열심히 하려는 자세에서는 오히려 닳아빠진 베테랑 가이드보다 나은 점이 있어 나중에는 사모님들이 오히려 자식처럼 가이드를 챙겨주는 경우도 생겨 이런 가이드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가 TV에 방영된 후 대만 가이드가 동이 났다 하니 우리 왕건무도 모처럼 볕 뜰 날이 온 셈이다. 그래도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공부도 더 해야하고 표현력을 기르는 것이 앞으로 계속 가이드를 하려면 필수적 요건이라 생각되었다. 다행히 대략 대만의 역사도 아니까 별 불편은 없었다.
먼저 충렬사라는 절을 관광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시간 대 마다 위병 교대식을 하는 것이 관광거리였다. 위병들은 정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본전에 이르기까지 약 100미터되는 거리를 행진하여 교대식을 벌였다. 대만 국민혁명과 대일 전쟁 중에 전사한 애국지사 및 장병들의 영령을 모시기 위하여 건립된 성역이다. 그리 큰 감흥을 얻지 못하고 다음의 행선지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 보도 위에 길게 난 흔적은 청각적 효과를 주기 위해 군화 뒤창에 금속 조각을 박은 것이 군화를 쭉 끌다가 들어올려 걷는 걸음걸이다 보니 금속이 닳아 녹이 슨 흔적이다. 어디서든지 군바리는 개인적 의미가 함몰된 무의미한 지속성에 시간 가기만 기다리게 된다 >
고궁박물관은 엄청나게 많은 보물들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취옥배추"라 해서 벌레(메뚜기와 여치) 붙은 배추 모양의 옥 제품과 "동파육"이라하여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는 돼지고기 모양의 작품,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 시절의 유물로 상아를 가공하여 만든 노리개로 "상아투화운룡문투구"라는 것이 있었다. "상아투화운룡문투구"는 3대에 걸처 완성되었고, 구경 11.7cm 공 안에 17겹의 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서로 붙어 있지 않아 자유롭게 회전하며, 원형 구멍이 일직선으로 맞춰진다고 한다. 저걸 조각한 상아의 크기도 크기지만 3대에 걸쳐 17겹의 공을 깎고 있었다니 실로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갑갑한 노릇이다. 그래서 중국인인지 몰라.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가 문득 떠올랐다. 어리석지 않으면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 저걸 보고 답답함을 느끼는 나는 결국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취옥배추 > < 돼지고기 모양의 물형석 >
< 상아투화운룡문투구 >
이외에도 수많은 백자, 청자, 당삼채, 청동기 등등 수많은 유물들이 있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아도 벌써 2시간 이상이 지났다. 저가 항공이라 종이곽에 담긴 볶음밥과 음료수 하나가 기내식의 전부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허기도 몰려왔다. 눈과 머리는 좋은 구경에 많은 지식으로 비만한 풍요를 누리고 있었지만 위장과 다리는 피로한 빈곤으로 자꾸 쉬려고 하여 한 번 뿐일 이 좋은 구경도 마다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을 했다. 저녁은 몽골리안 바베큐에 샤브샤브로 대만 맥주인 진파이타이완피지오(金牌台灣啤酒)에 가지고 간 참소주로 간을 해서 먹고 마시니 비로소 모두 생기가 돌았다.
저녁 후 자오시의 설산호텔로 이동을 했는데 엄청 긴 터널을 지나야했다. 대만은 동쪽이 산악지형이고 서쪽이 그래도 평야지역이라 도시의 대부분은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려면 터널을 지나거나 산을 넘어야 했다. 대만 중앙을 가로지르는 중앙산맥을 따라 최고봉인 3952m의 옥산(玉山)을 비롯하여 3000m급의 산들이 십여 개가 있다고 하니 백두산(2744m)을 엄청 높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높은 산을 한라산(1950m)이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은 데 북한에는 2000m급 이상의 산들이 매우 많아 남한에서 가장 높지만, 남북한으로 따지면 2위가 아니라 8위에 불과하다.
별로 적을 것도 없으니 이 참에 우리나라의 높은 산을 한번 조사해 보자.
1. 백두산ㅡ 함북/함남 2744m, 2. 관모봉ㅡ 함북 2541m, 3. 북수백산ㅡ 함남 2522m
4. 차일봉 ㅡ함남 2506m, 5. 남포태산ㅡ 함남 2435m 6. 백산 함남ㅡ 2379m
7. 대연지봉 ㅡ함남/함북 2360m 8. 한라산 ㅡ제주 1950m
호텔은 온천호텔인지라 옥외온천도 훌륭하고 거실에 딸린 욕실도 훌륭하고 넓었다. 지금까지 다녔던 여러 나라의 방들 중 가장 넓고 시설이 훌륭했다. 게다가 음식도 빠지지 않는 편이라 만족스러웠다. 이 곳에서 이틀을 묵을 작정이라 상당히 흡족스러웠다.
< 욕실이 상당히 넓다. 좌측은 반신욕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물을 받아 목욕하는 것이 자꾸 부담스러워 좌측만 이용했다. 물을 아껴쓰는 것이 습관이 된 모양이다 >
하루를 마치며 윤선생님과 정선생님이 묵고 있는 방에 다섯 남자만 모여 하루를 마치는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는데, 인도네시아에서 김장김치를 물에 깨끗이 씻어 밀폐용기에 넣어와 엄청 호평을 받은 윤선생이 일년간 연구해 더 발전한 백김치를 공개했다. 윤선생이 자랑스럽게 두꺼운 비닐로 된 진공팩을 내어 놓았는데 경악스럽게도 그 속에는 바짝 건조된 미이라처럼 보이는 배추시래기 비슷한 것이 들어 있었다. 설명을 옮기자면 네 번 정도 물에 깨끗이 씻은 김장 김치를 채반에 널어 낮에는 햇볕, 밤에는선풍기 바람으로 말리기를 사흘하여 완성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완전 건조 김장 백김치"라는 것이었다.
윤 선생이 조심스럽게 비닐을 잘라 "완전 건조 김장 백김치" 한 조각을 도사장에게 권한 바, 도사장은 정중히 받아 입으로 가져 갔는데 결과는 바로 웩!, 하더니 소태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어 안선생님의 시식 이후로 본인이 맛을 보고서는 나머지 두 사람은 맛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기서 부피는 줄어도 염분은 줄지 않는다는 염분불변의 법칙을 세울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그걸 밤새도록 물에 넣어 짠 맛을 뺐더니 짜지는 않은데 아무 맛이 없더라고 함으로써 윤 선생의 탐구생활과 함께 "완전 건조 김장 백김치" 사건은 일단락이 났다.
☆ 2015. 01. 06(화)
설산 호텔에서 조식 후 기차를 타고 화련(花蓮-화롄)으로 이동하기 위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역으로 이동했다.
< 역에서 보이는 우리의 숙소 설산온천 회관. 그리고 역 앞에는 자동차(汽車)와 오토바이(機車)를 빌려주는(租) 상점이 즐비하다. 우리나라의 기차는 화차(火車)라 한다 >
< 자오시 역 - 여느 시골역 정도 크기로 승객도 별로 없다. 간판의 차점은 기차역이란 뜻이다. 역 안에 대만인보다 한국인이 많다. 위에 양쪽으로 걸린 푸른 휘장에 쓰인 "남"자와 복판의 붉은 휘장의 "여"자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자오시가 온천지구라 역 앞에 족욕을 할 수 있는 온천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물은 차가워서 사용할 수 없었다. 좋은 아이디어로 멋진 시설을 힘들게 만들어 욕을 배불리 얻어 먹는 경우라 하겠다 >
< 역 앞에 길게 누워 잠든 개 - 묶이지 않은 개들이 무리지어 다니거나 이처럼 한가하게 자는 개들이 많았는데 대만은 2001년 이후 공식적으로 개를 도축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고, 2008년에는 개고기식당 주인들이 자신들은 팔기만 하지 도축은 하지 않는다고 하여 법망을 피하므로 다시 예전 법을 강화하여 개고기의 매매도 금지하고 위반 시 벌금을 5만-25만 대만달러(현재 환율로 하면 우리 돈으로 180만원에서 900만원)로 올렸다고 하니 중국인답잖은 생각이라 느껴졌다. 전통의 식습관과 서구 문명을 지향하려는 갈등을 법으로 처리한 것이 문화적 탄압처럼 느껴졌다. 저 누워 잠들어 있는 개에게는 미안하지만 >
< 승강장에는 이와 같은 안내문이 바닥에 적혀 있었다. 야간부녀후차구(夜間婦女候車區 - 밤에 여자들이 기차 기다리는 곳) - 왜 이런 곳이 있을까? 치안 부재? 남녀 유별? 여성 존중? 그런데 웬 비너스의 당당한 나체 반신상에 이상한 나무조각의 생뚱맞은 진열은 뭥미? 예술가의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술혼에 엄청 당황 >
화련에는 대리석 공장이 있어 그곳을 구경했는데 옥 제품 중에 어마어마한 것들도 많고 색이니 형상이니 조각한 솜씨들이 기괴한 것들도 많았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상업적 목적이 예술적인 충동을 능가하지 못하기도 하려니와 예술적 충동 또한 실용적 목적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그 멋진 병풍을 준다고 해도 거실에 두면 온 벽면을 가릴 정도이기에 차라리 병풍을 보느니 벽면 TV를 보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라 하겠다. 하긴 청나라 태조에게 거대한 옥 병풍과 LED TV를 바꾸어 주겠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히 땡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청나라 태조보다 내가 더 부자가 아닐까? 비닐이나 플라스틱 물통만 가져가도 금과 옥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자동차라니 그는 얼마나 나를 부러워할까? 카메라도 있네. 휴대폰을 본 그는 나를 암살하려고 할지도 몰라.
모든 현대인은 과거에 죽은 누구보다도 부유하고 건강한데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이 아닐까? 화려하고 크기도 한 옥 제품의 하단에 붙은 조그마한 가격표에 붙은 엄청난 동그라미를 소유한 숫자에 37(대만 환율)을 곱하고서는 옥 제품과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자신의 경제적 빈곤을 달래느라 전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옥을 보고 아주 기뻐 날뛰는 아내를 발견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밖으로 먼저 나가 기다리다가 전시장에서 나오는 아내의 손에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하고 다행히 그건 기우(杞憂)에 지니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중에 등은 바로는 손가락이 가늘어 맞는 것이 없었단다.
식사를 하려고 대리석 공장 입구에 위치한 식당에 갔더니 손님들이 거의 한국사람 같았다. 음식은 닭이나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 마파두부, 반토막낸 게 튀김, 해초류를 넣고 끓인 국, 콩나물 무침, 삶거나 튀긴 새우, 그리고 반드시 나오는 음식이 김치 종류이다. 배추김치이거나 깍두기 혹은, 무말랭이 같은 것이라도 한국인을 배려해서인지 일반 식당에서는 김치가 나왔다. 그래서 대만을 여행할 경우 괜히 김치를 가져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데 "완전 건조 김장 백김치"를 가져왔으니, 이는 인터넷에 이러한 정보를 올려놓지 않은 네티즌의 비협조로 말미암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호텔의 음식도 그렇고 일반 대만 식당의 메뉴의 경우 입에 맞지 않는다거나, 빈대 맛의 향채는 넣지 않아 향이 진해서 못 먹겠다거나 하는 음식은 없었다.
식당과 이어진 남도문화공연장에서 대만 원주민인 아미족의 민속공연이 있다고 해 들어갔다. 과거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있었던 대만 원주민들의 식인 습관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희생되었다는 오봉스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긴 중국인들의 식인 풍습이야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라 특별히 이들을 야만족의 후예라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실제의 쇼를 보니 야만족이었으면 차라리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등장인물은 남녀로 약 10명 정도인데 여자들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남자들은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운 치마 같은 것을 입고 춤을 추었다. 등장한 여자 무용수를 자세히 보니 좀 전에 식당에서 서빙 하던 아가씨였다.
문제는 춤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이 무대로 우르르 나와서는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춤을 추다가 우르르 떼로 퇴장했다가 또 무대로 우르르 나와 좀 전의 춤과 조금 다른 춤을 추고는 다시 우르르.... 이러한 동작을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대나무를 들고 나와 대나무 사이에 발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국적불명의 춤을 추기도 했다. 차라리 야만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라는 것은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냥 과거에 원주민들은 이런 춤을 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서는 어떤 감흥을 받겠는가? 차라리 오봉스님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 아미족의 민속 공연으로 무대에 나와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대기실로 들어가기를 계속 반복하여 7번 들락날락하는 걸 보고 중간에 그만 나오고 말았다 >
별 감흥도 없이 공연을 마치고는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태로각(太魯閣-타이루거) 협곡을 향했다. 장춘교(長春橋)를 건너 장춘사(長春祠)까지의 절벽을 뚫어 만든 길은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자아내었다. 아니 없는 길을 굳이 바위까지 뚫어가며 길을 만들어 갈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 사람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1~2m도 아니고 말이다. 그 곳 아니면 사당을 지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모를 무슨 이유가 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 장난이 아니다. 물론 바위가 화강암처럼 단단한 종류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힘들여 바윗길을 만든 이유는 뭘까? 차라리 그 노력으로 입구에다가 바위를 깎아 엄청난 크기의 부처를 만들든지, 아니면 엄청난 크기의 석굴을 만들어 그 안에 부처를 모시지 왜 단순히 길을 뚫는 것에 이런 엄청난 공력을 들였을까? >
< 왼쪽 건물이 장춘사이고 오른쪽은 누각, 중간의 파란 지붕은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엄청난 길에 비해 장춘사가 너무 초라하다 >
다시 버스를 타고 연자구(燕子口-옌쯔커우)를 향했다. 타이루거 협곡은 20㎞ 정도인데 그 중 7㎞ 지점에 위치한 연자구가 가장 아름다워 이곳에서는 차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 연자구란 이름은 협곡 사이 바위에 구멍이 있어 그 곳에 제비와 칼새 종류가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위를 보면 거의 수직의 암벽이 나를 내려찍어 누르듯 압도적 자세를 취하고 있고, 밑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의 깎아지른 절벽에 발 밑 바위는 보이지 않아 허공에 떠 있는 듯 했다. 가끔씩 낙석 사고도 난다고 하여 모두 지급된 안전모를 쓰고 지나가는데 과연 낙석이 떨어지면 작은 돌조각이 아닐 터, 엄청난 크기의 암석에 이 플라스틱 안전모로 무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짐을 느끼고 이 절경에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나의 어쩔 수 없는 세속성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바위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있는데 칼새와 제비가 절벽으로 먹잇감을 찾아오거나 둥지를 지어놓은 흔적을 볼 수 있어 연자구라고 불린다. 석회석 바위가 물에 녹은 자리에 제비들이 찾아 들어간 모양인데 문득 요릿감으로 제비집을 채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을 듯했다. 1950년대에 장개석 군대가 이 길을 닦으면서 군인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는데 문득 제주도의 5.16도로가 연상되었다 >
< 연자구에 이어진 구곡동의 모습. 이름으로 보아 아홉 개의 골짜기가 있는 모양이지만 워낙 높은 절벽으로 다가오는 산과 깊고 가파른 벼랑에 온 신경을 빼앗겨 골짜기를 헤아릴 겨를은 전혀 없었다. >
화롄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자오시로 이동하여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기에 자오시의 밤풍경을 보기 위해 로비에 모였다. 밤풍경이라는 것은 밤에 어떤 술집이 문을 열며, 어떤 종류의 안주로 어떤 술을 팔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밤나들이를 말하는 것인데 자오시는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노점상도 술집도 찾기 힘들었다. 즉 밤풍경이 별 볼 게 없는 곳이었다. 슈퍼 같은 곳에는 각종의 병조림을 비롯한 반찬류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 음식 같은 것도 많았다. 그러므로 대만 여행을 계획한다면 필요시 사서 먹으면 되므로 경비 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굳이 한국음식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아열대 기후인지라 많은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스타플루트”(가로로 썰면 별 모양이 나는 과일)과 “골든 무엇”이란 과일을 샀는데 호텔에서 먹어보니 “골든 무엇”은 수분도 없고, 떫고, 진짜 맛이 없었다. “스타플루트”도 다시 사고 싶지 않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과일 먹는 법을 모르는지, 다른 나라에 가서는 뭔가 새로운 과일을 맛보려는 나의 도전정신은 겨우 망고 정도는 성공적이라 할 만 할 뿐 거의 늘 실패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복숭아나 사과, 배는 엄청난 맛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옆의 병조림에는 마늘, 고추, 오이 등의 반찬류가, 그리고 계란, 오리알, 심지어 김치까지 있다. 시식을 환영한다는 표지도 붙어 있다. 옆 유리창에 국민여유카특약상점(國民旅遊卡特約商店)에 上下를 붙여놓은 글자는 우리 식으로는 “끼일 잡”인데 중국에서는 “카드”라는 뜻으로 쓰인다 >
별다른 밤 문화를 경험하지 못해 쓸쓸해진 다섯 남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텔방에서 슈퍼에서 사온 대만 맥주에 참소주를 간해서 마시며 헛소리를 조금하다가 내일 아침 호텔 노천 온천을 이용하고 10시경에 자오시를 떠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 2015. 01. 07(수)
7시부터 시작되는 호텔 조식 후 탄산나트륨 온천지구인 자오시에 와서 온천도 안하고 가면 안 될 듯하여 남자들 모두 호텔에 딸린 노천 온천으로 갔다. 아침이라서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물도 알맞게 따뜻하고 각종의 시설들도 훌륭했다. 어제 밤에 마신 알코올 성분이 빠져나가는 듯도 하고 피부와 머릿결이 한층 부드러워진 듯도 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10시경에 전용버스를 타고 대만 섬의 북단에 위치한 야류해양관광공원으로 이동했다. 날씨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추웠다. 가지고 간 두꺼운 남방에 조끼에 바람막이까지 입어야 했다. 이곳은 파도와 바람으로 침식된 바닷가 바위들이 볼만하다고 한다. 매표소에서 100m 정도 가니 좌측에 기괴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광코스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는데 그런데 문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무얼 자세히 보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닥 돌들이 사암인지라 미끄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겨우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음의 관광구역으로 가려니 상당히 멀어 보였다. 게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더욱 몰아치니 우산 준비를 못한 일행들은 꼬박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옆의 공원 같은 장소에 만들어 둔 모조품에 기념사진이나 찍고 말자는 것으로 의견 통일을 했다. 이렇게 멀리 와서도 조금 귀찮으면 바로 포기하는 것이, 좋게 말하면 관광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없는 것이 우리 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 위쪽 검은 색 돌은 단단하니 풍화작용을 덜 받고 아래 사암은 물러 쉽게 깎여나가 이런 절경을 만들었다. 아마 기존 형성되어 있던 사암층에 어느 날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이 흐르면서 굳어진 후 오랜 세월을 거쳐 비바람과 파도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듯하다. 무상한 자연이 만들고 흐르는 시간이 다듬어 완성한 작품이다 >
< 이건 파도로 인한 침식을 받은 듯하다. 꾸물꾸물한 것이 거북이 같기도 하고 물개들이 바위 위에 올라와 볕을 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에 갈라진 것은 용암이 굳을 때 온도차에 의해 갈라지면서 생긴 절리(節理)처럼 보인다 >
두 구역의 구경은 포기하고 나오니 왕건무 가이드가 깜짝 놀란다. 너무 일찍 와서 아직 점심 준비가 안 되었단다. 그래서 비도 피할 겸 안내 센터에 들어가니 야류해양관광공원을 소개하는 영상관이 있어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가 구경했어야 할 기이한 암석과 괴이한 바위들이 한국어로 20분 이상 소개되었는데 그걸 보고나서야 우린 정말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이 영상관에 들어와 보아야 할 것을 알고 들어갔다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마 끝까지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흥준교수가 말한 “아는 만큼 본다.”가 우리에게는 “알아야 보려 한다.”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점심은 야류해양관광공원 입구에 위치한 식당에서 현지식을 먹었다. 흔히 중국인들은 성조가 있어 말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가 와 습도 탓인지 정말 시끄러웠다. 종업원들이 서넛 있었는데 지기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고함 수준이다 보니 손님들도 덩달아 옥타브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당이 아니라 시장 안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음식은 그래도 기본적으로 먹을 만하게 차려 나왔고 어묵이 눈에 띄어 먹어 보니 그것도 괜찮았다. 여기서는 김치 대신 무김친지 무말랭이인지 좀 섞갈리는 게 나왔지만 그래도 먹을 만 했다. 말랭이는 경상도 방언으로 ‘오그락지’라고 하는데 ‘지’라는 것이 김치의 옛말이니까 ‘오그라진 김치’란 의미의 ‘오그락지’가 오히려 생생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감말랭이’를 차라리 “오그락감”이라 했으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언어는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므로 이미 감말랭이로 약속한 바에야 어쩔 수 없다.
중식 후 중국 영화 “비정성시”와 우리나라 드라마 “온 에어” 촬영지로 알려진 ‘지우펀’을 향했다. “비정성시”라는 중국영화가 있었다는 정도는 알지만, “온 에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나에게 ‘지우펀’에 대한 왕건무의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계속 비가 내려서 내릴 때 버스에 비치된 우산을 하나 빌렸다. 폭이 3m 정도밖에 안 되는 골목길 양 옆으로 상점이 계속 이어져 있었고 그 끝까지 가니까 바다가 내려다 보였지만 비가 와 시야가 뿌옇게 되어 수평선은 아예 보이지 않고 시가지만 겨우 보였다. 상점에서 무얼 사고자시고 간에 인파에 치이고 비에 치여 어디든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전용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가이드가 길가에 네온이 부채꼴로 있는 상점은 빈랑(檳榔) 파는 가게라 한다. 빈랑(발음은 삥랑)은 원래 한약재인데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예를 들면 운전기사들, 그래서 우리 차의 기사도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작은 비닐봉지에서 도토리 비슷한 걸 꺼내어 이빨로 위쪽을 깨물고 무얼 까서 계속 먹는다)이 주로 먹는단다. 카페인처럼 각성효과가 있어 껌이나 사탕처럼 습관적으로 먹는데 중독성이 있어 인이 배이면 잘 끊지 못한단다. 그러고 보니 빈랑 가게가 상당히 많다. 길바닥에 핏자국처럼 보이는 붉은 자국들이 바로 빈랑을 씹고 뱉은 자국이라 하는데 우리 기사는 옆에 큰 종이컵을 두고 침을 찍찍 뱉더니 그게 빈랑 때문이었다. 우리가 상점을 다녀오면 차 안에 담배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 기사는 담배에 빈랑에 언제 돈을 모울까? 가격은 물어보지 않아 돌아와 인터넷에서 알아보니 2011년도 쓰인 글에서 15개들이 한 갑에 50 NTD(새 대만 달러의 약자)라 하니 우리 돈으로 1850원(37원 기준) 정도이다.
타이베이로 돌아와 파인애플로 만등 대만 대표적 과자인 펑리수 파는 가게에 들렀다가 발마시지를 받으러 갔다. 사오십 대 되는 남자들이 들어와 발마사지를 하는데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태국이나 월남 말처럼 느껴졌다. 뒤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대만 말이라 한다. “아파?”라고 묻기도 하고 “살살?”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제법 한국인들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 이 사진이 흐려도 중정기념관을 설명하기에 제일 좋은 사진인 것 같다. 중앙의 아치형의 황동 문을 열면 장개석이 의자에 앉아 중국 대륙을 바라보는 동상이 나온다. >
1975년 장개석이 죽은 후 화교들이 돈을 모아 지었다는 중정기념관을 가게 되었다. 정문 입구에는 자유광장(自由廣場)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는데 과거에는 장개석의 이름인 중정(中正)과 관계있는 대중지정(치우침 없이 공정하다 - 大中至正)이라 적은 것을 천슈이벤 집권 후 바꾸었다 한다. 물론 25톤이나 되는 장개석의 동상(銅像) 철거는 실패했지만. 중정기념관은 높이가 70m나 되는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층부터 장개석에 대한 사진과 훈장, 그리고 지금 봐도 탐나는 세단이 두 대 전시되어 있었고 김구선생과 찍은 사진도 있어 그가 김구선생이 귀국할 때 미화 20만 달러를 주었다는 일화가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돈은 미군정에서 압수하여 김구선생이 못 사용하였지만.
장개석 동상의 크기는, 에이브러햄 링컨기념관에 있는 링컨의 대리석상의 높이가 5.8m인데 그보다 1.2m 더 큰 7m이며, 무게가 25톤이나 된다. 여담이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의 실제 키는 190cm가 넘었다고 하는데 장개석의 키는 169.7cm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도 의자에 앉아 거대한 철문 너머 중국 대륙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이 인물이 이렇게 큰 동상을 만들어 두고 기념할 만한 인물인가를 생각하니 실소(失笑)가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 뒤에 새겨진 것은 “이 성전에는 미합중국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미국을 구원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기억들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란 뜻이다. >
< 벽면에 윤리, 민주, 과학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그가 생전에 이를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겠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윤리라는 단어와 민주라는 단어를 적었는지 모르겠다. >
1947년 2월 일어난 2.28사건은 국민당 정부에 저항하는 일이만 명에서 일이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만인들을 3월에 상륙한 국민당 군대가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성인(外城人)에 대한 적대감, 반 국민당 반 장개석 의식의 성장과 이로부터 비롯된 '나는 대만인이다. 중국은 중국이고 대만은 대만이다.'라는 자아(自我)의식을 형성하였다. 특히 반 국민당, 반 장개석 의식은 반 중국 의식으로 치달아 50여 년간 그들을 식민 지배하였던 일본을 중국보다 오히려 우호적으로 여기고 일본 문화를 모방하여 중국적인 문화보다는 일본 지향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무력탄압을 선택했고, 40년이 넘도록 지속된 계엄령은 그러한 대만의 정치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계엄 하에서 아들까지 대를 이어 40년간 세습통치를 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을 피의 숙청으로 죽인 인물이 장개석이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민주를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부인이 세 명(송미령은 3번째 부인이다), 일본인 첩이 세 명인 그가 무슨 윤리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리고 그의 독선과 아집 때문에 잃어버린 대륙을 동상이 되어서도 쳐다보고 있는 자체도 아이러니하거니와 이제는 대만 사람들도 중국에 흡수되는 것에 그리 반대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가 버린 민중과 민주에 의해 그의 동상도 아마 곧 녹아 없어질 것이라 생각된다. 대만 전역에 2만 개나 되던 그의 동상이 거의 다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독재자의 쓸쓸한 말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애로이 웃고 있는 그의 웃음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독재자의 가식적인 웃음인 듯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장개석이 대륙을 잃어버리고 대만으로 패주한 원인을 그의 정치적 성향을 중심으로 짧게 전문가의 견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장개석의 패배 이유는) 장개석의 독재적 성향이다. 그는 북벌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동원하기 위해 당내 이들을 위한 조직을 설치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북벌이 끝나고 자신이 통일 정권의 지배자가 되자 이 조직들을 폐지하고 민중운동을 폭력으로 탄압했다.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손문의 유지와 장개석의 약속대로 헌정의 실시, 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장개석은 헌법 초안을 만든다는 구실로 시간을 끌었고 점차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가 끊임없이 독재 체제의 완화를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정치란 엘리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군부 인사와 당료들의 의견만을 들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버린 대중은 공산당 쪽으로 향해 갔다. 이 점에서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초창기의 혁명성과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노쇠하기 시작 했다. (중략)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은 장개석에 대해 전민 항전, 즉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지 말고 이들 대중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것만이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장개석이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개설을 촉구했다. 요컨대 정권의 민주화만이 전쟁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에 대해 장개석은 전쟁은 정부와 군대가 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반면 공산당은 이들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을 그치면서 많은 지식인과 학생, 사회 저명인사들이 국민당의 독선에 염증을 느끼고 공산당 쪽에 가까워져 갔다. 게다가 장개석은 이들이 빨갱이라며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도와주었다. (중략)
절망한 장개석은 1948년 1월 이렇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오늘날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혁명 정당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얼이 빠져 있고 기율이 없으며 더 나아가 옳고 그른 기준도 없다. 이 따위 당은 오래 전에 부서져 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당의 기율을 세우고 옳고 그른 기준을 바로 하라는 수많은 충고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것은 장개석 자신이었다.』 - 상식 밖의 세계사 中 -
독재자의 엄청난 자기 과시 현장을 보고 나서 혹시라도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몇 년 전 전두환의 호를 딴 일해공원인가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고, 박정희와 그 딸에게서 장개석과 장경국, 그리고 북한의 3대 세습의 독재정권의 이어짐까지 자연스레 연상이 되었다.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 명랑한 기분이 아닌 상태로 한식당(韓食堂)에 갔다. 불낙이라고 하던데 낙지는 대부분 외출을 했는지 12명의 인원에 아마 작은 낙지 한 마리 정도 넣은 듯 했고 불고기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분이 상하는 것은 현지식당에는 없는 “주류 반입금지”라는 한글 푯말을 식당 여기저기 붙여 둔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주 한 병 가격이 우리 돈으로 이만 원이다. 다음날도 한식당에서 불고기로 점심을 먹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대만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면, 절대 한식당을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지식의 경우 대여섯 가지의 요리와 약간의 부식과 밥이 나오는데 한식의 경우 요리가 하나밖에 안 나오고 리필도 오히려 현지식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식당에서는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왕 먹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현지식은 어쨌든 푸짐한 맛이 있었다. 첫째 날 몽골리언 바비큐의 경우 자기가 한 접시든 두 접시든 채소와 고기와 양념을 담아 가면 주방에서 넓은 철판에 볶아 주었다. 그리고 샤브샤브를 해먹을 수 있게 재료들을 준비해 두어 세 번인지 네 번인지 먹었더니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넷째 날 석식은 샤브샤브였는데 일차 고기와 채소를 데쳐서 한 그릇씩 먹고 면을 넣더니 다시 한 그릇, 그리고 밥을 넣어 죽처럼 만들어 한 그릇 합이 세 그릇을 먹고 나니 더 생각이 없었다. 호텔에서야 각자가 알아서 먹으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바깥에 나왔을 때는 현지식이 훨씬 나았다.
숙소인 골든차이나 호텔에 짐을 풀고 밤구경을 나왔는데 여기도 그리 마음에 쏙 드는 데가 없어 이리저리 다니다가 피곤하여 일찍 들어와 술 몇 잔 마시고 잤다.
☆ 2015. 01. 08(목)
호텔 조식 후 스펀으로 갔다. 스펀은 천등(天燈)을 날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천등은 가로 약 80㎝, 세로 120㎝ 정도의 좁은 마름모형으로 사면의 색깔에 따라 ‘사랑’ ‘건강‘ ’재물‘ 등등의 소원을 적어 아래에 석유를 묻혀둔 솜에 불을 붙여 멀리 날려 보내는데 등 하나에 200 NTD(약 7400원)를 받았다. 어떤 한국인 아가씨가 “교장 선생님, 화 좀 그만 내세요.”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고 과연 교장은 이후로 화를 좀 줄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어쨌든 재미있는 놀이임에 틀림이 없다. 사람은 중력을 벗어나는 것에 늘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안 선생님과 도 사장, 그리고 나까지 세 집이 하나의 천등에 소원을 적어 날려 보냈다. 생각보다 천등은 아주 높고 멀리 날아가서 까마득히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돌아오는 길 곳곳에 천등이 나무나 강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이것도 엄청난 쓰레기 공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장사를 한다면 제주도의 마라도에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0분 정도 후 테두리에 미리 타이머를 달아 자동 점화되도록 해서 자체가 아예 타 없어지도록 하면 바다라서 화재 염려도 없고 쓰레기 염려도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 안씨, 한씨, 도씨 세 가지 성씨가 보인다. 전부 자식이나 손녀 이름을 쓴 걸로 보아 이제 모두 나이가 지긋한 모양이다 >
< 이곳은 곱창국수가 유명하다는 곳인데 좀 짜게 느껴졌지만 유명하다니까 한번 먹어보았다. 작은 컵라면 정도의 그릇에 50원이니까 1850원 정도. >
<삼형매(우리식으로 본다면 ‘남매’) 망고빙수에 들어가 망고빙수를 한 그릇에 시켜 두 사람이 먹었다. 양이 제법 많은데 맛은 그저 그렇다 >
타이베이로 돌아와 한식당(韓食堂)에서 불고기로 중식을 마친 후 시내 중심가로 가서 이리저리 다녀 보았다. 물론 한식당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류 반입금지”라는 푯말이 우릴 불쾌하게 했다. 소주 한 병에 20,000원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내가 터키에 갔을 때 아마 한식당의 소주 값이 20,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거리가 거의 배가 아닌가? 이건 아예 바가지를 씌우려는 작정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식당 주인이 한국인인 것도 아닌 듯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한국에서 온 대만인 2세나 3세인 듯 짐작되었다.
시가지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사람 사는 곳이 어딘들 다르랴마는 그래도 우리와 다른 무엇인가를 보려 노력했지만 대만 본토인인지 모르지만, 비만 체격에 다리가 짧고 몸에 비해 머리가 아주 길고 큰 사람들만 특별히 몇 명 눈에 띄었다. 곱창국수집과 삼형매 망고빙수가 유명하다기에 가보았다. 곱창국수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곱창이 몇 개 들어 있었고, 망고빙수는 겨울인지라 망고를 저장해 둔 것을 사용해서인지 신선한 맛이 좀 부족했다.
< 용산사 본전의 모습, 마침 기도하는 시간인 모양으로 많은 신도들이 기도문을 낭송하고 있었다. >
빙수를 먹은 후, 기도를 잘 들어준다고 소문이 난 용산사라는 도교식 절에 갔다. 사람들도 많고 소란스러운 것이 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굵은 향을 얼마나 피우는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는데 그래도 전부가 아주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어 그래도 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전에는 부처를 모시고 본전 뒤 건물에 우리의 용왕에 해당하는 바다의 여신인 마조(媽祖)를 모신 곳도 있고, 미혼의 남녀들이 기원을 드리는 중매쟁이 구실의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모신 곳도 있고, 중국답게 관운장을 모신 곳도 있고, 그 외 알 수 없는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여러 신들이 각자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할 것을 비는 신도(信徒)들의 기도와 예물과 향연(香煙)에 둘러싸여 용산사는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용산사에서 나와 야시장 구경을 갔는데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라 그런지 별로 볼 것도 없어 면세점 쇼핑 후 샤브샤브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 왔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밤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다시 호텔에서 나와 밤거리를 배회했는데 정말 별 볼일 없었다. 대만사람들은 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여 밤늦게 술을 마시는 법도 없고 이차(二次)도 없다. 그래서 술집이라 할 만한 곳이 없고 음식점이 대부분이었다. 간판에 주로 적힌 것은 탕(湯), 면(麵) 등의 식사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시장 안 허름한 식당에서 닭다리 요리를 발견하고 다리 두 개를 주문 후(100원, 아마 우리 돈으로 3700원 정도) 술을 시키려 했더니 술은 안 파니 우리가 사와서 먹으란다. 어쩔 수 없이 맥주를 사와 항시 소지하고 다니는 소주로 간을 하여 먹었다. 닭다리는 식어 서늘했지만 데워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아 그냥 먹었다.
< 대만에서 음식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다. 이것도 먹다가 아차해서 겨우 찍은 것이다 >
9시 조금 더된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장사를 마무리하는지 식당 식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데, 채소도 볶고 물고기도 지진 밥반찬이 우리의 술안주보다 훨씬 탐이 났지만 언어 소통도 그렇고 단란하게 저녁 먹는 사람에게 무얼 주문하기도 그렇고 해서 우리의 대만 밤 문화 경험은 닭다리 두 개로 끝나고 말았다. 밤늦게 술 마시는 사람이 없으니 늦게까지 장사하는 사람도 없고 그러다 보니 이렇다 할 밤 문화가 있을 수도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 타의에 의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실제 대만 원주민의 문화는 단절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중국대륙에서 갑자기 수많은 중국인들이 들어와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2.28사건에서 보듯 일본인보다 더 잔혹하게 대만인들을 무력으로 탄압해 대만 안에서 중국인과 대만인은 서로 이질화의 길을 걷게 된다. 중국의 문화와 대만의 문화가 융화되지 못하고 새로운 지배층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서구적 문화를 지향하다 보니 지금 대만의 문화는 유구한 역사의 중국의 역사도 대만의 역사도 아닌 것이다. 타이베이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 수많은 중국의 유물이 있다고 하나 그건 유물일 뿐 그것이 문화를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만의 도시나 농촌을 볼 때,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이지만 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장개석 부자(夫子) 시대의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이 지속된다고 하니 언제 대만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될 지 궁금할 뿐이다.
☆ 2015. 01. 09(금)
호텔에서 조식 후 호텔 부근의 시장에 가보았다. 건물 안에 있는 상설시장이었는데 음식도 있고 채소, 과자, 과일 의복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밤에 바깥에 야시장이 서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오늘은 대만을 떠나는 날인데 시간은 넉넉했다. 공항에서 왕건무 가이드에게 팁도 주고 왕건무가 운전기사도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나무젓가락 5벌과 밥주걱 하나가 들어 있는 세트를 우리 돈 10,000원에 팔아 여행 간 다섯 집 모두 한 벌씩 사주었다. 그리고 남은 김이나 컵라면, 과자 등을 마치 손자에게 주듯 왕건무 가이드에게 주고 공항으로 들어 왔다.
마침 공항 벽걸이 시계가 눈에 띄었는데 ROLEX라고 적고 노력사(勞力士)라고 한자로 적어 둔 걸 보고 이름 참 잘 지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만은 간자체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자와 대부분 같아서 간자를 쓰는 중국보다 간판이나 지명 등을 알기가 훨씬 쉬웠다. 외래어의 경우 ‘버스’는 ‘파사’(巴士)처럼 음역을 하거나, ‘센터’는 ‘중심’(中心)처럼 의역을 해서 쓰고 있었다. ‘메디컬 센터’의 경우 ‘의료 중심’이라고 쓰고 있었다. 아마 대만사람이 중국 본토에 간다면 달라진 한자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긴 말은 통하니까 별 문제 없겠지만.
13시 15분발 비행기였는데 김해의 기상악화로 말미암아 1시간 연착을 하여 타오위엔 공항에서 14시 30분 비행기를 탔다. 하긴 그 덕분에 대만의 만두와 우동 세트(우리 돈 10,000원 정도)를 맛볼 수 있었지만. 에어부산 BX 794편으로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17시 15분이었고 입국 수속 후 시간들이 바빠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바로 헤어졌다.
이번에는 정 선생님이 감기 기운이 있어 조금 고전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일정이 넉넉하여 여유가 있었다. 다만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어 웃을 일이 적었다. 안 선생님은 코끼리도 못 사왔고.
1월9일 다녀온 여행을 2월 1일에 기록을 마친다. < 끝 >
첫댓글 덕분에 저도 대만 여행 잘 했습니다.
선생님의 여행기 속의 실제 모습.풍경들과
추가된 대만에 대한 선생님의 역사적 사료들
그리고 그 위에 저의 상상력 까지 덧 입혀 보니
'대만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자만에 잠시 빠져 보지만
알고 가면 아는 것 보다 더 많은 것들이 보이겠죠?.
선생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쓰신 여행기.
누군가 공들여 잘 차려 놓은 밥상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잘 먹은 기분입니다.
모자란건 아닌데
갑자기 시장기가
서서히 발동 하는 거 같아요.
대만 여행 갔다 와야 한다는 신호일까요?ㅎㅎㅎ
제가 열심히 연수 받고 있을 때 다녀오셨군요 ㅠ 힐링이 되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