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소리
김규원
잠이 쏟아진다. 눈두덩에 쇳덩이가 놓인 것인지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뜰 수가 없다. 불과 20여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릴 터인데 그 시간 동안을 참을 수 없다. 제야의 종 타종 장면을 보려고 TV를 켰는데,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을 진행하고 있다. 간혹 낯익은 얼굴이 보여도 웬지 잠이 쏟아져서 할 수 없이 침대에 누워야 했다. 그렇게 해마다 지켜보던 제야의 타종을 이번에 못 보고 말았다.
내가 세밑에 빼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면 해가 바뀌는 시간에 제야의 종소리를 들어온 일이다. TV에서 ‘10, 9, 8, (…) 2, 1, 데엥-’ 하고 울리는 범종 소리를 들었다. 물론 보신각 타종 현장에 직접 가본 일도 없고 언젠가 딱 한 번 전주 풍남문 타종 사진을 만들 생각으로 타종을 본 일이 전부다. 왜 해마다 그 타종을 지켜보고 종소리에 가슴이 함께 공명했었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면서 올해는 조금 더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름의 목표도 세웠다. 물론 단 한 번도 그 목표를 달성한 기억이 없고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보람을 느껴본 기억이 없지만.
건조한 실내 공기에 목이 칼칼하여 잠에서 깨었을 때는 TV만 혼자 시시덕거리고 있는 새벽이었다. 얼마 전에 추운 날씨에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실내운동용 스핀 바이크를 샀다. 겨울마다 체중이 늘고 신체 리듬이 깨지는 걸 막겠다는 심산으로 사서 타보니 제법 괜찮다. 실제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운동은 더 되는 느낌이다. 연말 연휴에 쉬는 동안 열심히 운동해서 점점 늘어져 가는 뱃살을 줄여보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이 날 때마다 여러 차례 자전거를 비벼댄 끝에 체력이 거의 바닥을 보았다.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내고 책상에 앉아 제야의 종을 기다렸으니 졸릴 수밖에.
걸려있던 새해 달력의 12월을 떼고 1월 첫 장을 열었다. 빨간 날 1월 1일이 생경하게 다가선다. 젊은 시절에 내가 이때까지 살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2019년이라는 시간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던 그 미래의 시간에 어느덧 내가 와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래라고 기다리던 시간은 과거라는 이름표를 달고 저만치 가고 있음에 소스라친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삼켜버렸던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까지 제우스의 형과 누나들을 토해내듯, 시간은 제 속에 삼켜두었던 미래라는 또 다른 시간을 끊임없이 토해낸다. 시간의 속에서 나온 것들은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과거라는 허망한 이름으로 흘러가 버린다. 그것들을 현재라는 이름으로 만나보려는 인간의 소망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닐까.
시간이라는 괴물은 잠시도 멈출 줄을 모른다. 쉼 없이 달리는 시간에는 현재라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간을 토해내는 크로노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순간조차 현재라고 부를 수는 없다. 시간은 무서운 능력으로 세상과 우주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 인간이 시간의 조화에 울고 웃는 일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물며 작은 별 지구에서 생겨난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죽든 살든 종자가 마르든 시간은 눈도 깜박하지 않는다.
지구라는 푸른 별이 혼자 도는 자전과 태양을 따라 도는 공전, 태양계가 은하의 작은 구성집단으로 은하의 주위를 도는 일을 생각하면 어쩌다가 우리가 태어나서 찰나를 살다가 죽는 일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밀가루 공장에서 밀가루 한 분자가 잠시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처럼 부질없고 하찮은 순간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과 사연을 만들어 왔던가. 무한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무관심을 저지르고 겪었던가. 인간 수명이 길어야 100년이지만, 우주의 나이는 약140억년 이라고 한다.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고 추측한다. 빅뱅이라고 이름 지은 대폭발에서 시작한 우주의 생성과 운동 도중에 지구라는 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과학으로 아직도 풀지 못하는 생명체가 푸른별 지구에서 생겨 끝없는 진화를 거쳐 오늘의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 모든 생성과 변화는 시간이 만들어 낸 걸작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없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서 불변이라고 착각하는 바위나 땅덩어리도 쉼 없이 변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인식하는 살아있는 것과 융합과 폭발을 거쳐 하늘의 별이 만들어지고 결국엔 소멸하는 그 거대한 별의 일생은 어쩌면 하나의 생명 현상인지 모른다. 불과 몇십만 년을 살아온 인간들이 짐작하는 생성과 소멸이 무변광대의 우주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게 많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치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걸 탓하고 서러워한다. 거대한 우주가 끊임없이 변하는데, 하물며 인간의 마음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사람의 감정도 일시적인 착각이고 환상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에는 그렇게 인식하여 위로 삼으려는 심리가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바뀌고 날짜가 바뀌고 해가 바뀌는 일은 그 숫자만큼 모든 것이 변했다는 걸 나타내는 지표다. 그 변화를 느낀다면 인정하고 받아들여 순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 달력을 걸었다. 어릴 적에는 해가 바뀌면 한 장에 일 년 열두 달이 모두 인쇄된 달력을 아버지나 형이 벽에 붙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때에는 어서 저 달력이 자꾸만 새로 붙여져서 내가 나이를 빨리 먹어가기를 바랐다. 나이를 먹으면 아버지나 큰형처럼 돈을 벌어 내가 사고 싶은 자전거랑 서울서 피난 온 감리교회 목사의 손자처럼 넥타이에 정장 저고리랑 멋진 옷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의 심술에 견딜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 숱한 날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2019년의 꼭두새벽에 미리 걸려있던 달력의 첫 장을 뜯어내면서 나는 태어나는 순간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약속된 죽음이라는 문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생각한다. 저만치에 뻥 뚫린 구멍처럼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문, 문짝도 없고 지키는 이도 없어서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다시 돌아나올 수 없는 문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다. 누구에게는 멀고 누구에게는 가까운 문이라기보다는 문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어떤 이는 빠르게 가고 다른 이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닐까는 생각한다.
건강한 이는 천천히 걸어서 가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에스컬레이터에 올려져 빠르게 그 문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일찍 고속열차에 실려 들어가기도 한다. 나는 쉽게 끌려가지 않겠다는 심산으로 나는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스피닝 바이크를 타기도 하면서 자주 걷기도 한다. 더불어 그 문에 집어넣기 위해 유혹하는 의사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한다. 걸어서 가더라도, 아무리 버텨도 예외 없이 들어가야 하는 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내 시간의 끝에 자리 잡은 문이다.
내가 세상에 나와 어느새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바로 엊그제 같던 그 시간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갔다. 아직 남은 시간은 끌려가지 않으려는 ‘버티기’ 시간인 걸 안다. 버텨본들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버티고 보는 이 마음을 어쩌랴.
올해엔 해를 넘어가는 타종 소리를 안 들었으니 해가 바뀐 일도 무효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