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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금 강 (錦 江)
신동엽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래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가 되면 그 하늘 아래로
오포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치는 동짓날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막히는 삼복(三伏) 순이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매밋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2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새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제 1 장
반도는,
가는 곳마다
가뭄과 굶주림,
땅이 갈라지고 서당이 금갔다.
하늘과 땅을
후비는 흙먼지.
1862년
전봉준이 여덟살 되던 해
경상도 진주에서
큰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세금.
이불채 부엌세간 초가집
다 팔아도 감당할 수 없는
稅米, 軍布,
마을 사람들은 지리산 속 들어가
화전민 됐지.
관리들은 버릇처럼 또
도망간 사람들 몫까지
里徵, 族徵했다.
총칼 앞세운 진주병사
백낙신.
3천의
농민들이 대창 들고 관청에 몰려와
병사 내쫓고 아전 죽이고
노비문서 불살라버렸다.
정부는 병사를 잡아
더 좋은 기름고을 벼슬을 주고,
다음해, 윷놀이가 한창인 정월 대보름날
진주농민 마흔일곱 명을 묶어
교수했다.
1871년
경상도 문경에서
농민군 2천명이
동학교도 이필의 지휘로
관아를 습격, 죄수들을 석방하고
노비문서 불사르고 창고를 때려부숴
쌀을 꺼내다가 농민에게 나눠줬다.
황해도,
평안도,
이곳 저곳에서
농민반란은 터졌다.
제 2 장
짚신 신고
수운은, 3천리
걸었다.
1842년
경상도 땅에서 나
열여섯 때 부모 여의고
떠난 고향.
수도 길.
터지는 입술
갈라지는 발바닥
해어진 무릎
20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딩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
학정
뼈만 앙상한 李王家의 석양.
2천년 전
불비 쏟아지는 이스라엘 땅에선
선지자 하나이 나타나
여문 과일 한가운델
왜 못박혔었을까.
3천년 전
히말라야 기슭
보리수나무 투명한 잎사귀 그늘 아래에선
너무 일찍 핀
人類花 한 송이가
서러워하고 있었다.
1860년 4월 5일
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
수운은,
하늘을 봤다.
바위 찍은 감격, 영원의
빛나는 하늘.
제 3 장
어느 해
여름 금강변을 소요하다
나는 하늘을 봤다.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을
갈가리 찢어
꽃 풀무 치어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죽음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子時다. 새벽이다.
승천이다.
어제
발버둥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는 세상을 밟아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아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는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야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는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버린
오, 인간정신미의
지고한 빛.
제 4 장
수운은
왕명으로 체포되어
대구 감영 속 감금되었다가,
1864년 3월 10일
대구 노들벌에서 순교했다.
해월이 옥리를 매수하여
수운을 탈옥시키려고,
옥 안에 들어섰을 때, 수운은
담뱃대 하나 해월에게 쥐어주며
빨리 돌아가라 할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주막집,
등잔불 아래 마주앉은
문경 접주 이필, 제 2 세 동학교주 해월,
선사에게서 받은 담뱃대를 쪼개니
종이 심지.
종이 심지를 펴보니
깨알 같은 붓글씨,
그대 마음이 곧 내 마음이어라
우리의 죽음은 오히려 지붕 떠받드는
기둥으로 영원한 것.
나는 고이 하늘의 뜻에 따르려노니
그대는 내일 위해 어서
먼 땅으로 피하라.
<燈明水上 無謙隙
柱似枯形 力有餘
吾는 順受天命하니
汝는 高飛遠走하라>
들에선 농부들이
거름을 퍼내고
거름 무덤에선
아침 햇살 속
흰 김이 무럭 피었다.
장꾼으로 변장한
해월, 이필, 그리고 몇 사람은
상주의 들을 거쳐
문경 새재 아흔아홉 굽이 휘어
태백산을 찾았지.
왕실에선 천냥의 현상금 걸어
해월을 수배하고.
일찍이 수운은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東經大全,
龍潭遺詞,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노비도 농사꾼도 천민도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우리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니라
우리의 내부에 한울님이 살아 계시니라
우리의 밖에 있을 때 한울님은 바람,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울님을 깨달을 뿐,
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하니라.
모든 중생이여, 한울님 섬기듯
이웃사람을 섬길지니라.
수운은
집에 있는 노비 두 사람을
해방시키어
하나는 며느리
하나는 양딸,
가지고 있던
금싸라기땅 열두 마지기
땅없는 농부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중간 생략>
주력부대는
삼로로 진격했다
계룡산 동쪽 기슭 돌아
대교 쪽에서
공주감영 공격하는
손병희 부대 5만명,
성남에서
노성 효포 거쳐 북상하는
신하늬 부대 4만명,
7만명 이끈 전봉준은
노성산 서쪽 돌아
이인에서 우금티를 넘었다.
산의 벽과
산의 벽이
마주 울고
역사와 노도가
산을 문질렀다
꽃도, 나무도,
돌도, 강물도,
북쪽 하늘 향해, 일제히
머릴 나풀거렸다,
감발과 감발
짚신과 짚신
꿰진 무릎과 무릎,
돌,
몽둥이,
삽,
호미,
괭이,
부엌칼,
부지깽이,
그렇다
정말,
눈 못 보는 허리굽은 할머니들,
아들딸의 뒤를
따라, 부지깽이 들고
좇았다,
창,
심지총,
죽창,
살과 살,
뼈와 뼈,
눈동자와 눈동자,
이마와 이마,
가슴과 가슴,
쓸개와 쓸개,
미움과 미움,
분노,
고개 넘고
내 건너고
마을 지나
밑없는
어둠을 뛰었다.
일어나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일어나자
반도의
중생들아,
목숨 살아 있는
동학교인이여, 모든 농사꾼이여
일어나라,
조국의
모든 아들딸이여.
손톱도 발톱도
돌도 산천도, 이 나라의 기름 먹은
흙도 바람도
새도 벌레도 일어나라,
두레꾼이여
조국이여
너를 부른다. 두레꾼이여,
녹두알이여, 너를 부른다,
땅도 강물도
깃 털고 중천 높이 솟아라
너를 부른다.
너의 피를 부른다
여문 뼈, 노랑수건 휘날리며 오라
농민군이여.
우리들은 이때 공주 싸움에서
있었던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3일 이른 아침
이인에서 곰나루 건너던
농민군이, 鈴木 소위가 인솔한
일군 기관총부대의 반격을 통쾌하게
때려엎은 이야기,
지금의 공주교육대학 뒤 봉황산 마루에 있던
관.일 혼성부대가 농민군의 포위공격에
쫓기어 무기 버리고 성내로 도망간 이야기,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역사도 울고
산천초목도 울었다.
공주 우금티,
황토흙 속 유독 아카시아가
많은 고개였어,
어느 여름
땀 흘리며 뻐스로 올라가는
이 고개는 매미소리뿐이었지,
그날 낯선 여학생이 나 보고
까닭없이 웃었지,
오빠였을까? 형무소에서 나오던
그 잘생긴 사내,
그리고 어느 핸가
폭격이 있었다, 황소가 쓰러져 있는 마음
고갯길 한가운데
탱크가 누워 있었지,
부러진 포신.
귀를 째는
제트기 폭음,
즐비하게 흩어진 외제
기관포 탄환
의 깍지,
그 우금티 고개에서
동학군은 악전고투했다,
상봉 능선에
일렬로 배치,
불을 뿜는
왜군 제5사단의
최신식 화력,
야전포,
기관총,
연발소총,
수류탄.
꽃이 지듯
밑없는 어둠으로
수백명씩
만세를 부르며,
흰 옷자락 나부껴
수천명씩
차례차례
뛰었다,
민족의 제전,
반도의 상봉우리 높이
불타고 있는 저 모닥불 속에
던져라,
우리의 젊음,
없었노라
이 목숨 내맡길 자리.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聖火,
젊음을 부르는
성화,
왔노라,
이제야 왔노라
거대한 천명.
이제야 보았노라
우리의 하늘
발밑에서 불타는
우리의 하늘,
던져라
젊음,
던져라
창,
던져라
증오,
던져라
반역,
영원의 강물이
우릴 손짓한다
오, 위대한
몸부림이여
깊은 하늘,
용광로 불길 속에
사방, 팔방에서
무수히 던져지는
저 꽃다발,
지글거리는
역사의 밭이여,
꽃불 튀기는
피의 잔치여,
내가 왔노라,
이제야
내가 여기 있노라,
뼈를 남기고
승천하는
승리여,
내 여기 왔노라
이제야
처음, 내 여기 왔노라,
내 여기서
불타며 승리했노라,
살덩이를 여기
찢어던지며
내 영혼은 여기서
승리했노라,
만세,
만세를 불렀노라,
노래했노라
우리의 형제들은,
다음날의
백화 요란한
하늘밭 위해
우리의 목숨을
거름밭에 던졌노라
용감히 노래하며 던졌노라,
알맹이를 발라서
던졌노라.
제 21 장
사흘 밤낮의 싸움 끝에
전봉준은
총 후퇴령을 내렸다.
하늬는 이때 30명의
장정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봉황산 골짜기에 들어가
일본군의 대포 2문을 파괴하고,
관군의 본부 향해
화살 편지 쏘았다.
"왜놈들 미워하긴
그대들이나 동학군이나 다를 바
없을 줄 아노라.
총부릴 어서 왜놈들의
등으로 돌리오.“
뒷날 전해진 이야기로, 3천의 관군
거느렸던 서산군수 성하영은 편지 보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의 곁엔 일군의
감시병이 24시간 떠날 날 없었다.
갑자기 잠잠해진
함성소리,
하늬는
척추에 땀 느끼며
유격대의 후퇴를 지휘했다,
40보 앞 개울에서
포환이 터졌다,
엎디었다,
뒤에서 또 터졌다
어디서 또 터졌다
콩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
마당쇠의 고개가 부러져 있었다,
하늬는 보았다
능선 바위 사이 히노마루
기관총 사수,
검정 군복의 이마
쏘았다
겨냥없이,
미움으로, 겨냥하고
마음놓고 쏘았다,
기관총이 굴러떨어졌다.
하늬는
뛰었다,
보리 뿌리
쥐어뜯으며 전우들은
꺾여져 있었다,
산마루 눈을 흡뜨고
네 활개 벌렁
왜군 기관총 사수는
누워 있다,
피가 어깨를 적시고
흙에로 스민다
피의 고향은 흙일까?
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여기가 어딘데?
너에게도
고국 가면, 콩밥 묻어둔
아랫목
쪽니 나온 마누라가
웃고 있겠지?
"불쌍한 것들"
하늬는
흙 한줌 주검의 가슴 위
던져주며 뛰었다.
골짜기마다 시체의 산
피의 개울,
싸움은 끝난 걸까?
초겨울,
보리밭에 뿌려진
허연 거름 건데기처럼
골짜기, 갯바닥을 덮은
누더기 죽.
몇 달 두고
금강 이쪽 저쪽에선
살기름냄새 가시지 않았고
우금티, 무너미 황토고개에선
지금도 간간이
밭 매다 뼈마디 추려내는 일
있다 했다,
진아가, 와 있었다고
들었다, 앞치마 두르고
부녀자들 속에 섞여 동학군의 밥
나르고 있었다 한다.
하늬는 이인 장터에 이르렀다,
어제까지 수백의 아낙들이
국을 끓이고 부상병을 치료하던 장터는
홍수 지나간 갯벌처럼 쓸쓸하였고,
수십개의 가마솥, 생솔가지 꺾어 만든 막사들만
주인 잃고 쓰러져 있었다.
진아는 어디 갔을까.
그리고 그 많은 아낙들은,
또 부상병들은?
하늬는 소로길을 들어
계룡을 향했다,
계룡산
갑사로 가는 길가엔 농바위 있다,
어느 해 여름
우린 손길 맞잡고 휘파람 날리며
깨꽃 피는
절길 걸었었지,
참외.
인천에서 내려 오는 길이라는 어느
할아버지가 동학란 때 얘길 들려줬다,
미처 후퇴 못한
부상 농민군이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일병, 왕병 수백명이
포위하고 기관포 난사하여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남자들은 없었고, 아닌밤중 천지 뒤집는
총소리에, 부녀자, 노인, 어린애들은
방에서 부엌, 부엌에서 변소로 뛰다가 죽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20여명의 아낙들이
불붙은 옷을 찢어던지며 뛰다가 일.왕병에
잡히어 윤간당하고 살해되었다,
옹기장수 부인 하나는, 일본군의 국부를 뽑아 죽이고
자기도 혀 깨물어 자결했다,
열두 살 먹은 소년 하나가, 헛간 속에 숨어 있다가
엄마의 비명소리
듣고 달려가 일본군의 등에 쇠스랑을
꽂았다,
어느날 밤
대창 든 검은 그림자 셋이
나타나 일본군 보초 두 명의
가슴 뚫어놓고 총 뺏어 사라졌다,
며칠 후
역시 대창 든 세 그림자가
나타나, 관군 둘, 일본군 하나의 가슴
뚫어놓고 사라졌다,
그러나 뒤쫓은 일제사격,
벌판을 뛰던 세 그림자 중 두 개가
거꾸러졌다,
머리에 노랑 수건 두른
고향 모를 농민들이었다,
자취 감춘
한 사람의 게릴라가
하늬였을까,
억수로
비가 쏟아졌다,
초겨울인데도 여름비처럼
이틀 밤을 쉬지 않고 퍼붓는 비
그리고 때아닌 뇌성벽력,
사람은
산천의 아들,
아들이 아프면 산천도 찡그린다,
사람 마음에 궂은일이 있으면
산천도 따라 울어줬다,
외적의 행패가 못마땅해
산천이 날씨를 궂혀 방해하고 있는 걸까,
갑사에서 하루를 묵은 하늬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팔도강산에
고루 내리는 빌까,
서곡은 끝났다.
우선 끝났다,
뇌성벽력은 누구의 분놀까,
누구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 걸까,
십만의 농민이
죽고 다쳤다, 이제 그 가족
50만명이 학살당하고
주리틀리고 곤욕당해야 한다,
하늬는
계룡산 주봉 향해 뛰었다,
뛰다 걷다 뛰다 쓰러졌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쥐어뜯으며 뛰었다.
비는 옷을 적시고
살 속 스며 허리 아래로
흘러나리는 강물,
상봉에 가까울수록
뇌성은 하늘을 가르며
으르렁거렸다,
하늬는 기구하며 뛰었다, 벼락아
때랴라, 벼락아. 벼락이여, 나를 때려라, 내
대갈통을 부숴라, 벼락이여, 이 못 난 놈을
박살내다오, 벼락아, 벼락이여.
하늬는 어느새 상봉에 올라와
바위 위 무릎 꿇고 있었다,
비는 더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도 더 무섭게 으르렁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맑아왔다,
네 활개 벌리어
바위 껴안고 잠들어 있었던
하늬,
비는 멎고
하늘은 맑았다,
아침,
눈부신 태양이
동쪽 먼 산마루 위
떠 있었다,
저 태양은
영원한 걸까,
금강의
부드러운 물굽이가
멀리서
희게 빛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이 흘러가는 강물.
등성이 두어개만 내려가면
애화 얽힌 오누이탑,
그리고 동학사,
진아와 앉아 쉬던
돌방석, 아직도
나무 그늘 반쯤
비껴 있을까?
시뻘겋게 젖어 있는 바위,
봉황산에서 부상한 손바닥
찍어붙인 쑥이 비에 씻겨 없어지고
피가 맘껏 흐르다가 제풀에
멎어 있었다.
들여다보았다
손. 맞창이 난
손바닥.
벼 베러 다니던 손,
진달래 꺾어 이웃 소꿉동무
나누어주던 손,
진아의 보드라운 볼 어루만질 때
그리고 그녀의 가슴
허리 아래 어루만질 때
이 손은 내 전부였다,
생명,
천재,
그녀는 자주 내 손
되받아, 꼬옥 쥐어왔지
마곡사에서
범종 함께
쳐볼 때도 이 손이었다.
엄마는 비오는 날,
비.
어떻게 생겼을까,
내 손 만들어놓고 간
엄마는,
그 피는 어떤 피였을까,
눈
마음은,
목소리.
하늬는
바위 위 기댔다,
동쪽 향해 경사로 누웠다.
반도 위
누워 있었다,
눈을 감았다,
原虛,
텅빈 바람의 마을,
눈을 떴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박혀 빛난다,
눈을 감았다,
하늘,
가슴 속
생명 속, 안방 다락방가지
골고루 적셔 들어오는 하늘소리.
꿈이었을까
반도, 산과 마을
도시와 농촌,
태평가 부르며
일하는 노동자들 머리마다에서
분수가 솟았다,
반도 전역은
옥 같은 분수,
분수에 휘말려
곤두재주 넘으면서, 쏟아진다, 쏟아진다,
무수한 양반 아전, 수령 왕족들이
바다로 쏟아진다,
양총 멘 뙤놈
왜놈들이
곤두재주 넘으면서 쏟아진다,
전봉준은 어찌 됐을까,
김개남, 최해월은?
손병희, 손화중은?
재조직,
그렇다, 재조직,
그리고, 알맹이만 모은
유격부대 조직,
동학농민혁명위원회
의 깃발.
제 22 장
씻어내면 또
모여들 올 텐데,
씻어내면 또
또 열흘도 못 가
모여들 올 텐데,
이 맑은 피로만
채워 버리면
좋겠는데,
이틀도 못 가
검은 찌꺼기들은
또 모여들 올 텐데,
그러나, 내일
새 거품 모여 올지라도
우선, 오늘
할 일은
씻어내는 일,
저 하늘의 검은 찌꺼기
오늘 할 일은 모두
씻어내는 일.
1960년 4월
우리의 남이는 소방차 앞에서
허리를 꺾었다,
유 에스의 상표 찍힌
탄환이 그의 어깨를
쪼갰다.
26일,
옆에 라일락 가지 들고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남이는 꽃에 손을 뻗치며
입을 열었다,
하늘을 보았죠? 푸른 얼굴.
영원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어
우리들의 발밑에,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우리들은 보았어, 영원의 하늘,
우리들은 만졌어, 영원의 강물, 그리고 쪼갰어,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하늘.
우리들은 이겼어.
제 23 장
10월 25일
공주 우금티의 결전 이후
일본군과 이왕병은, 패잔한 농민군, 농민군 가족,
농민군에게 밥 지어준 부녀자들까지 수색, 추격,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은
태풍이 지나간 벌판처럼
쓸쓸하였고,
두어 그루의 나무가
중동이 부러진 채 추레하고
서 있었다,
집집마다 연기가 끊어지고
인적도 끊어졌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땅을 굽어보고, 그러나 눈은 불안에
떨면서, 그렇지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바삐
지나갔다,
눈발 날리는
11월 한 달, 가마니 짜고
짚신 삼는 12월 한 달, 다음해
정월 대보름, 2월, 3월
자운영 피는 춘궁기까지
이왕병은 왜군과 손잡고 다니면서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총검으로 쑤셨다,
영동에선
아궁이 속 숨어 있는
일곱 살짜리 계집앨 끌어내
아버지 있는 곳 대지 않는다고
기관총 갈긴
일병,
청산에선
미친개, 이진호 이겸제 등이 거느린
왕병과 일군 기관총 소대가
350명의 농민 사살하여
보리밭에 버렸다,
그들은 그 다음날
옥천에 들어가
동학교도 정원준 서도필 등
아홉 명의 노인을
눈 사태 속 끌어내
발까벗겨 세워놓고
사격,
이두황이 인솔한 왕병은, 왜군 기관총소대의 지원을
얻어 온양에서 농민 90여명을 창고 속에 몰아
넣고 불질렀다, 그리고 동네 부녀자들 강간 한 뒤
기관총 난사.
이두황, 그도 엄마 젖을 빨며 자란 사람 아들이었을까,
바람 맑은 반도에서도 이따금
그런
고장난 기계가?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120명, 400명,
270명씩 총살하고 강간하며
해미, 서산, 매현
유구, 노성, 은진
정산 등으로 설쳤다,
이제 고만,
팔도 휩쓸던 이런
고장난 얘기는 끝도 없고
부끄러운 얘기,
다만
아직도 몇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후퇴령을 내린 전봉준은
잔존부대 만여 명 이끌고 전북
금구까지 와,
산과 내를 이용하여
반격태세 갖췄다,
그러나 월등한 화력 앞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아성,
대포와 기관폴 맨몸으로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봉준의 오른쪽 어깨엔
깊숙한 파편,
봉준은, 자진 해산령을 내렸다,
"동지들,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 기다리고 있어주오."
눈 벌판 속을,
순창 땅 향해
산길 걷는 외로운
그림자,
봉준의 마음,
하늬가 말하던
유격대,
유격작전을
생각하며 산길을 뛰었다,
순창군 노피리
김접주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갑오년 12월 초이틀,
밤,
군불 넣은
쩔쩔 끓는 아랫목.
밖에선 함박눈,
내년의 풍년을 예고하는
소담한 함박눈이
오리나무 숲의 시린 발등을
덮으며
쌓인다,
지리산 양지쪽,
눈 덮인 붉은 흙 속에선
쑥, 진달래 뿌리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그 향내나는 살로,
처마 속 잠자던
참새들이 푸득푸득 날아
뒤꼍 장작우리 속으로
숨었다,
그날 새벽
봉준은,
눈길 위 자죽난
천냥의 현상금 따라 뒤쫓아
토반 관병 스무 명에게 포위되어
묶였다,
눈먼 토반들은
다음날 천냥 받고 봉준을
일본군에게 인도했다.
봉준은 동아줄로 묶인 채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
들것을
네 귀통이서 얽매고 가는
사람은 상투 튼 조선사람
그 뒤 총 들고 따르는 담배 피는
사람은 왜놈,
봉준은
서울 오는 나흘 동안
입 한번 열지 않았다.
눈은
감은 채, 물 한모금
담배 한모금
입 대지 않고
조용히, 그림처럼 정좌하고
있었다
머리 위서
반도의 하늘이 그를 호송하는 듯
따라오고,
어디선간
방울새, 한 마리
그의 어깨 위 날아와 앉았다간
냇물 건널 때
날아갔다,
산이
가면 마을, 마을이
가면
들이 열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맛보는 사람,
돌아다니는 사람은
먹는 사람.
을지로 6가
지금은 도로공사로 헐렸지만
광희문 밖
언젠가
미군 찦이
대폿집 들이받아
안방 뒤집어놓고
핸들 잡은 채
껌 씹고 있던,
그리고 그 앞으로
천연스럽게
여대생,
너는 걸어오고 있었지,
지금도 있을까
녹두지짐이를 팔던
눈이 무른 그
과부댁들,
언제 보아도, 광희문
너는
우중충한 돌이끼.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왔다,
형리가
동아줄 푸르는
자기 손가락마저
분간 못할 만큼
비가 쏟아졌다,
온종일,
그리고
오후 세시, 돌문 밖
질경이랑 반지꽃이랑 냉이랑
예쁘게 돋은 흙언덕
높은 장대 위,
교수된
전봉준의 머리는
칼로 다시 잘리워
매달리웠다,
다섯 차례의
혹독한 왜식 고문,
일본인 낭인 武田, 田中의 번갈은
일본망명 권유,
인품에 감동, 뒷날의 쓸모를 계산한
일본 공사 井上의 은근한 호의,
들은 체하지 않고
발밑에 이까려 버린
농민지도자
전봉준의
비.
그는
목매이기 직전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하늘을 보아라 !"
그의 곁엔
고창에서 체포된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의 머리가 나란히 효수됐다,
그 앞을 누가 지나갔고
누가 지나왔을까,
그리고
며칠 후, 서소문 밖
장터 네거리엔 전주 숲정에서
참수된 김개남, 성제식의
머리가 효수됐다,
맨발벗은 아이들이
손가락 물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을까,
그 무렵
여행용 트렁크 들고
한양성에 들른 영국 관광객
비숍여사는, 표현했다, 효수된
혁명지도자들,
얼굴마다,
서릿발이, 엄숙하고
잘 생겼더라고,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서 다음해 봄까지 사이
전국에 50만명의 농민이 봉기,
싸웠다,
그리고
십만명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었다.
충청, 전라도에선 전지역,
경상도 상주, 문경, 영주,
진주, 마산, 밀양, 김해,
강원도 원주, 춘천, 홍천,
황해도 해주, 사리원, 배천,
구월산, 풍천, 장연, 수안,
평안도 용강, 평양, 신의주,
정주, 진남포
함경도 원산, 청진,
방방곡곡에서
쇠스랑 들고 함성지르며
일어났다,
벗고도 싶었으리라, 굴레,
찢고도 싶었으리라, 알살 덮은
쇠항아리.
찢어진 쇠항아리 사이로 잠깐
빛난 하늘,
살무더기의 소망
꽃들의 기구
쌀밥사발의 기원,
누가 꺾었나,
그러나
꺾였을까?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로 있을 뿐이나,
땅에 떨어져 썩으면
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리라.'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 보고,
번식도 없다.
제 24 장
봄 달은
몸뚱아리엔
꽃이 피었다.
멍석
그늘.
돌창을
던져라,
꽃힌
바위.
호수 위엔
맑은 바람
아우성은
승리 높이
상천에
뻗고,
죽음은
빛났다.
숱한 낮.
태양 익은
능선 따라
서린
입김.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戀苦는
빛났다.
새벽
별
이슬 쏟은
네 발
문
사자.
죽음은 썩고
뿌리 적신
생피.
비단 젖가슴
흙밭 위에,
억센
사지,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쓰러지지 않았다,
혼은
뛰쳐나와
하늘을
갔다.
숱한 밤.
멍석딸기 골짝마다
꿈은,
제 25장
진아는
금강가에 서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
수면은, 수억만 개의 물팡개
싣고 흘러간다.
조그만
보자기 끼고 나룻배
기다리는 진아의 머리, 목덜미
앞가슴 허리 아래를
강물은 흘러내린다,
살아 있을까 하늬는,
아직, 그리고
나 생각하고 있을까,
불타던
부여의 집,
통곡하던 마을과 마을,
그럼 우리가 갈 곳은?
하늬는
자기 죽음을 예감했던 걸까,
진아는 허리 더듬어 치마 속으로
은방을 만져 보았다,
아기 낳거든
자기와 똑같은 이름, 하늬로
부르라 했다, 그리고 은방울 달아주고,
해주길 떠나던 날 아침,
즐거웠던
시절은 철없이 뛰놀던 해주 땅,
아빠는 지게 바작 위
나 태워 산나무 다니셨지,
사과밭,
낯모르는 할아버지가
치마 한 아름 사과
안겨주고 즐거워하셨지,
소꼽동무들,
각시풀 다듬던 그 손매디, 맑디맑던
그 눈동자,
윤기 짙은 머릿다발,
그러나
어려선 그렇게 예쁘던
손과 살색,
나이 들면 스물도 되기 전
누우렇게 시들고 말았지,
궁중생활,
그건 잠자는 시간밖엔
살아 있는 마음이 없었다,
하루종일
지껄여대는 여자들,
외양간에 검불만도 못한 이야길
그 찢어진 입으로,
돼지 같은 남자
많이 지껄이는 여자
그건 같은 말
훌륭하다면
한없이 훌륭
못됐다면 한없이 못된 건
여자,
엉덩이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하늬
하늬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여자,
하늬를
만나기 위해 성장한
육체,
곧,
또 하나의 하늬가
내 몸 속에서 세상에
나온다,
진아는
눈을 감았다,
다시 태어나진
못하겠죠, 하늬?
한 번 더 걷고 싶어요
강 언덕길, 손길
마주잡고
석양이 비단처럼
비쳐들던 숲 속,
당신은 나리꽃 앞에
무릎꿇고 꽃 입술에 입맞춤하며
날 놀리셨죠.
금빛 꾀꼬리가
우리 머리 위를 장난치듯
아슬아슬하게
날아갔어요.
풀방석 위서
까불며, 속삭이며 새우던
하룻밤,
전 원추리꽃으로
왕관 만들어 당신 머리 위
올려놔 드렸어요.
끝났군요
당신 말씀대로
정말 우리는 한 가지 목숨의
흐름일까요.
이 세상은,
우주에 있는 모든 생물은
한 가지 목숨의
강물일까요,
그래서
죽음도, 삶도
없는 걸까요,
영원한
바람만 있는 걸까요,
정상을 향한,
당신도, 나도
한가지 강물의 흐름 위에
돋아난 잠깐의
표정일까요,
그럼
구태여 혁명까지 조직하셨어요,
한 모서리 희생를 치러야 하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을.
나룻배, 흠씬 젖은
애꾸할아버지가
나룻배를 모래밭에
대고 닻을 던졌다.
그녀가
서 있던 강기슭,
언젠가, 6월
아름다운 석양,
소녀들이 노래하며 지나갔다,
강산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가는 곳마다
도시와 마을
마을과 어촌이
쑥대밭 되던 폭격,
제트기의 폭음
그 때 우리들은 그걸
호주기라 불렀지,
오스트라리아산이라던가,
또는 쌕쌕이라고도 불렀지,
소리도 없이
한쪽 하늘에서 나타나
땅을 되짚고 사라질 때 그제서야
비행기 소리가 났지,
내 친구
철이 누난
부엌 앞에서 보리방아 찧다
날아갔어,
순이와
순이 엄만
콩밭 매다, 아름다운 코
흙에 박았지,
그 여름
우리들은 쫓겨다녔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모른 체,
기껏 눈인사나
나누며 남으로 북
밀려다녔지,
곰나루,
왕진나루,
백강,
귀암나루,
맞바우,
사람은
비어 있고,
대 낮,
역사 없는
박물관 속,
오, 소리쳐도
들리지 않던
공간이여.
꿈속 같던
강나루, 사공은 어디 가고
빈배만
온종일
철썩이던
강언덕
내,
부여안고
얼었던 미루나무여.
그핸
가물었다, 해서
우리는 불달은 흰
모래밭,
옷 벗어
머리이고
한 발 한 발
강을 건넜지,
나의 등에
업혀 금강 건너던,
여름인데도 겨울 쉐타 입었던 네 살짜리
서울아가여, 그후, 엄만,
찾았는지? 지금은 대학생?
천안 고개
호젓한 소롯길에서
우리 함께 붉은 까치밥
따먹으며 피난길 걷던 노량진 소녀여
지금은 어디?
제26장
황폐한
땅에도 아침은 온다,
아득한 평야에 새벽이 열리면
어디서라 없이 들려오는 가벼운 휘파람 소리,
물 길어 오는 아낙의 물동이 가에
반도의 아침이 열린다,
냇가에선
일찍 깬 물새가
강언덕 인사를 보내며
이리저리 준비운동을 하고,
외양간에선
건장한 황소가 긴
심호흡을 한다,
진아는
아들을 낳았다,
복슬복슬한
아기 하늬,
금강의
흰 물줄기가 가물가물 내려다보이는 동혈산,
쉰 길 바위 아래 초가집, 사리원댁
할머니의 도움으로
꼬마 하늬가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애정
쏟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벌어진 석류알처럼 피어나고
눈동자는 물먹은 별
습기 차게 빛난다,
자침이
겨냥을 얻어
조금 흔들렸단 멎고
기둥 못을 뽑아 달아나려고 하듯,
넘칠 곳
찾던 저수지의 물이
터놓은 물꼬를 얻어
미친 듯 춤추며 휘말려가듯,
암 전기가
수 전기를 만나
힘을 규합하며 커다랗게
빛 발하듯,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화안히 피어난다.
진아의 얼굴도
봄과 함께,
사랑과 행복으로
다숩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
그렇다
햇빛이 준 아름다움일까,
옛날
하늬가 그랬었듯
꼬마 하늬의 탐스런 손목에서도
조그만 은방울 떠날 날
없었다.
아기 하늬
꿈에 안고 진아는 뜰에 앉아
골짜기 덮은 진달래
구경,
옆에선
하늬 얼르며
뜨개질하는 사리원댁,
할머니
우리의
가슴 적시며
노래가 지나가듯,
우리의
강산 디디며
비는 지나갔나,
비 먹은
진달래, 강산을 채워
일제히 진달래 마을로
피어나는데,
우리의
가슴마다
새 비 맞은 진달래 화창히
피어나는데,
진아는
품속의 하늬, 얼르며
먼 금강 줄기
바라다보다
머루알 깨물었다,
그러나
슬프진 않았다,
하늬는
진아의 전부, 전 우주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사랑
이 나른한 충족.
이제 고만.
진아의 이야긴 섭섭하지만
끝내련다,
다만
하늬가 남아 있다.
어떻게 됐을까, 계룡산 산마루에서 빛났던 그 정신,
그러나, 오늘까지
아무리 자료를 뒤져도
그에 관한 뒷소식
얻을 수 없다,
다만
젤 마음에 지피는 이야기
하나.
곰나루 함성 뒤
석달 지난 다음해 정월
보름날
서정리 역에선
왕병과 왜군, 동네 토반, 유림들이 합세
마을 농민 스물 일곱 명을
능지처참했다.
네 마리의, 말허리에 감겨진
쇠줄로 사지를 묶어
사방으로 달리게 채찍한다,
눈벌판 속
수십 개의 모닥불 피워놓고
온종일 술잔 기울이며
베푸는 장님들의
피의 잔치,
북소리,
환호성,
어쩌자는 걸까,
바람버섯 찢는 걸까,
꽃노을
아름답게 물든 저녁나절
웬 낯선 청년 하나가 산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형장의 중앙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형리들의 손
뿌리치며,
그리고선
눈 위에 네 활개
펴고 드러누웠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사나이, 얼굴에
돋는 무지개.
어서
나, 찢으라고 말할 뿐
딴 말이 없었다,
한쪽
손바닥에
덜 아문
흉터가 있었다.
네 쪽으로
찢길 때도
떡이 찢기듯,
살덩이만 몸부림쳤을 뿐,
신음소리 하나
없었다.
후화 <1>
밤 열 한시 반
종로 5가 네거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통금에
쫓기면서 대폿잔에
하루의 노동을 위로한 잡담 속
가시오 판 옆
화사한 네온 아래
무거운 멜빵 새끼줄로 얽어맨
소년이, 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충청남도 공주 동혈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소년의 눈동자가
내 콧등 아래서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들고
바삐바삐 지나가는 인파에
밀리면서 동대문을
물었다.
등에 짊어진
푸대자루 속에선
먼길 여행한 고구마가
고구마끼리 얼굴을 맞부비며
비에 젖고,
노동으로 지친
내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2>
1894년 3월
우리는
우리의, 가슴 처음
만져보고, 그 힘에
놀라,
몸뚱이, 알맹이채 발라,
내던졌느니라.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19년 3월
우리는
우리 가슴 성장하고 있음 증명하기 위하여
팔을 걷고, 얼굴
닦아보았느니라.
덜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60년 4월
우리는
우리 넘치는 가슴덩이 흔들어
우리의 역사밭
쟁취했느니라
적은 피 보았느니라.
왜였을까, 그리고 놓쳤느니라.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음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자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반도 하늘높이 나부낄 평화,
낙지발에 빼앗김 없이,
우리 사랑밭에
우리 두렛마을 심을, 아
찬란한 혁명의 날은
오리라,
겨울 속에서
봄이 싻트듯
우리 마음속에서
연정이 잉태되듯
조국의 가슴마다에서,
혁명, 분수 뿜을 날은
오리라.
그럼,
안녕.
언젠가
또다시 만나지리라,
무너진 석벽, 쓰다듬고 가다가
눈 인사 부딪쳤을 때 우린
십겁의 인연
노동하고 돌아가는 밤
열 한시의 합승 속, 혹, 모르고
발등 밟을지도 몰라,
용서하세요.
그럼,
안녕,
안녕,
논길,
서해안으로 뻗은 저녁 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