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윤리에서의 효(孝)
도웅 스님 춘천 삼운사 주지
생명 향한 무한대 사랑과 자비가 ‘孝’
1. 조선초 성리학자 : “불교에는 효가 없다”
태자 시절의 부처님은 위대한 버림의 길을 나선다. 아버지 슛도다나 왕의 아들이자, 왕국의 상속자로서, 왕비 야소다라의 남편으로서, 아들 라훌라의 아버지로 살아왔던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성벽을 넘었다. 그 때 나이 29세였다.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길을 나선 것이다. 아들로서, 지아비로서, 아버지로서 살아 온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절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하셨다.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과 죽음, 근심, 지극히 청정한 열반을 구하고자 하였다.” 〈중아함경〉 권 56.
이에 대해 조선 초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세운 정도전은 불교를 통렬하게 공격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이라는 책을 써서 불교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불씨의 가르침은)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은혜(恩惠)와 의리(義理)는 매우 약해지고 각박해져서 친지들 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보고 공경해야 할 어른 대하기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여 그 근본과 원류를 잃어버렸다… 불교는 의(義)가 없고 이(理)가 없는 까닭에, 명교(名敎:유교)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라는 하늘을 무너뜨린 역천(逆天)의 명분과 그렇게 세워진 권력을 뒷받침할 토대가 필요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민초들의 마음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불교를 공격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부처님을 불씨(佛氏)로 비하하며 날선 공격을 해 댔다. 당시 권력에 공감하던 권력층에서는 불교만큼 좋은 공격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고려 말 신돈(辛旽)이 출가수행자로서 개혁을 주도했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입장에서 불교는 더욱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초기 조선의 국가 경영 방침은 불교 탄압으로 이어진다.(사족 -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편드는 사상과 제 종교는 챙기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탄압을 하는 정치적 꼼수는 조선 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멀게는 진시황이 그랬고, 가깝게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이런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비판대로 불교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효(孝)’는 진정 불교에서는 불필요한 윤리인가. 우선 ‘효’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 불교와 효에 대해 짚어본다.
2. 효는 모든 윤리의 근원
한자문화권에서 효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뜻한다. 잘 공경하고 받들고, 모시고, 봉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효의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한자 효(孝)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자식이 늙은 부모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그것으로 효를 정의한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어린 자식이 부모를 업고 있기를 바라겠는가.
공자는 효에 대해 “어김이 없는 것(無違)”이라 했고, “예(禮)로써 섬기는 것”(〈논어〉 위정편)이라 했다. 부모를 대함에 예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 효라는 의미이다. 물론 예(禮)에 대한 논의도 해야겠지만, 효와 관련된 측면에서는 성선설(性善說)에 따른 ‘덕성(德性)을 사랑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유가(儒家)의 사상적 흐름에서 ‘효’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흐름은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 역사에서도 정치적 관점이나 통치 이론의 배경으로서 작동하기도 하는데, 효에 대해 〈논어〉에서는 이렇게까지 확대한다.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내용이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고서 도가 생겨난다. 효와 제가 그 인의 근본이 된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여기서 말하는 인(仁)이란 인간다운 도리를 지키는 것이고, 그 가장 근본적인 덕목이 효라는 것인데, 이는 국가 윤리까지 확장되는 것이고, 정치 질서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효가 갖는 미덕에 대한 사례로 순(舜) 임금에 대한 것이 있다. 중국 정치 역사에서 가장 덕 있는 군주로 꼽히는 그는 “아버지는 억세게 고집스럽고 사나웠으며, 어머니는 매우 어리석었으며, 동생은 오만했으나 효로써 화목하게 하며, 그들의 성정을 점차 다스려 나아가며 지극히 악한 곳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서경(書經)〉 요전(堯典)-고 한다. 이로써 요임금은 순임금을 후계자로 정한다. 이는 효를 매개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하겠다. 하여튼 순임금은 요(堯)임금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끈 군주로 기록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효는 어찌 보면 군주시대를 위한 윤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근본은 역시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내면이 따르고 있는 전통이든, 정치 윤리로서 효를 활용한 측면이 강한 유가적(儒家的) 관점이든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효란 ‘사람으로서의 도리’ 그것도 부모에 대한 지극한 도리,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하겠다. 근원적으로 효(孝)로써 인(仁)을 세우고, 인으로써 도의 근본을 삼으니, 효란 세상 모든 이치의 근본이요,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라고 하겠다.
3. 불교와 효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효와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불설우란분경(佛設盂蘭盆經)〉이다.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전하지 않고 중국 서진(西晉:265년~317년) 시대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경이다.
목건련 존자가 처음 육신통(六神通)을 이루고 부모를 제도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세간을 살폈으나, 아귀 지옥에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부처님께서는 목건련 존자 어머니의 생전 악업의 뿌리가 깊으니 출가 수행스님들의 위신력을 빌어 제도할 수 있는 방편을 일러주셨고, 그것이 오늘날의 우란분절, 백중의 근원이 됐다. 우란분절에 공양을 올리면 “이미 돌아가신 부모도 천상에 나고, 살아계신 부모의 복락이 백년에 이를 것”이라 하셨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알려진 〈우란분경〉의 내용이다. 그러나 효와 관련해 〈우란분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부처님께서 경전 마지막 부분에서 효에 대해 강조하신 내용이다.
“선남자 선여인들이여, 그대들이 나의 제자로서 효순(孝順)의 도를 닦는 자라면 마땅히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라. 현생의 부모와 과거 칠세의 부모를 위하여 해마다 7월 15일에는 우란분재를 행하라. 항상 효순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낳아 기른 부모와 과거 칠세의 부모를 생각하고 공양구를 지어서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도록 하라. 낳고 기르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라. 불자라면 마땅히 이 법을 받들어 행해야 하느니라.” - 〈우란분경(盂蘭盆經)〉 제 3품”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효는 모든 생명에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7대 조상에까지 확장된 효는 사실상 모든 생명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이고, 이는 불교를 제외하고는 동서양 어느 사상,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생명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과 자비라고 하겠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나타난 효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설하신 효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효, 그리고 유가(儒家)나 서양의 사상에서 나타난 효는 큰 차이가 있다. 인륜, 천륜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인 효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향한 대자비라는 가피를 더했고, 나아가 모든 생명을 고통에서 제도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학술적으로 위경(僞經) 논란이 있지만, 우리와 2,000년 이상을 함께 한 〈부모은중경〉 첫 머리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셨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 해골 더미를 향해 큰 절을 하셨다.
아난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스승이시고 모든 중생의 어버이신데, 어찌하여 보잘 것 없는 해골더미에 절을 하시나이까.”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은 전생에 나의 조상이었을 것이고, 또 나의 부모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예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생의 자부(慈父)이고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께서도 부모에 대한 지극한 공경의 예를 올린다. 그것도 길을 가다 만난 유해(遺骸)를 향해서. 이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효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효와의 가장 명확한 차이이다. 〈부모은중경〉은 너무도 널리 알려진 경전이지만, 누구도 실천하기 쉽지 않은 효에 대한 가장 쉬운 가르침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읽기만 해도 가슴이 저리고 뼛속까지 아파진다. 우리 시대 가장 확실한 효에 관한 가르침이며, 사람으로서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부모은중경〉이 효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 효에 관한 많은 보다 풍부한 의미와 실질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도 많다.
출처 : 금강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