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480(361)장 기도하는 이 시간
본문 : 마가복음 7장 24-30절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의 대화를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를 떠나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두로 지방으로 가신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좀 쉬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워낙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팽배해있었던 당시 상황과 또한 어디를 가든지 나타나는 병자들 때문에 아마 두로 지방에서도 예수님은 조용히 계시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에는 특별한 사건 하나가 소개된다.
25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발 아래 와서 엎드린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 즉 이방인이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딱 하나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간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의 반응이 차갑다. 아니 무정하시다.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는데, 나는 그 중에 개인적으로 이 해석을 지지한다.
즉, 24절에 나와있는 "숨길 수 없더라"라는 말씀에 숨어있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들어가시자마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래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두로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가 알고 있는 온동네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로 몰려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들을 치료하시는데 갑자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여자가 나타나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추측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여인의 간청을 이렇게 냉정하고 차갑게 거절하시는 이유를 달리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해석 말고 가장 많이 지지받는 또 다른 해석은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 한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즉, 구원사적 의미에서 당장은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방인인 그 여인에게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셨다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예수님을 쫌스러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방인을 경멸하는 유대인과 똑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예수께서 왜 그러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매우 냉정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27절 한 번만 거절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은 처음 이 여자가 예수께 나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할 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27절의 말씀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여자가 너무 시끄럽게 간청을 하니까 예수님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냥 빨리 고쳐주시고 보내시죠?"라고 요청하였지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면서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모습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은 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 앞에 와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그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오늘 본문 27절에 나와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총 세 번이나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거절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여인의 모습이다.
한 세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 두 번 예수님이 저렇게 정색을 하면서 딱잘라 말하시면 그냥 포기하고 갈 법도 한데,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간구하는 자는 끝까지 매달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 두 번 해보다가 안되면 포기하는 그런 자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주님만이 해답이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이 여자는 예수님이 심지어 자기를 '개'에 비유하면서 냉정하게 거절하시는데, 오히려 그 말을 받아쳐서 "그래요. 저 개예요. 그렇지만 개도 주인이 예뻐하듯이 저도 불쌍히 좀 여겨주세요"라고 대답을 한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간구하는 자는 철저히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겸손할 수 있는가? 그 여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딸이 고침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겸손은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다.
셋째, 그런 여인의 모습에 예수님도 두 손을 드시고 그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29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30절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나는 사실 이 30절의 말씀이 더 놀랍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마태복음 15장에는 단순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그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왜 이 표현을 굳이 집어 넣었을까?
믿음은 순종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세 가지다.
간절함, 겸손함, 순종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이 세 가지 태도를 보여드리면 좋겠다.
우리가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며,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분명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임하리라 믿는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는 하루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