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시작한 우람한 용맥은 남쪽으로 내닫다 속리산에서 치고 올라오며 한남정맥을 이룬다.
한남정맥의 맥세는 계속 북상을 하며 관악산 청계산 구룡산을 지나 동북쪽으로 힘차게 거침없이 내닫는다.
그 맥세는 구룡산을 넘어 불쑥 불쑥 불거져 나오며 대모산(大母山)을 이룬다. 대모산의 용맥이 여러 갈래로
남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탐스럽게 혈(穴)자리를 만들고 있다.
" 이 산은 장백산(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넘어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고
이곳에서 꺽어져 서북쪽으로 수백 리를 달리다 과천의 청계천에 이르고 또 꺽여 동북으로 달리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헌릉 신도비에서-
살아서도 부왕 태조 이 성계가 두려웠다. 때로는 무서운 부왕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다섯째 아들 정원군 방원은 조선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워 부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자 책봉과정에서 부왕 태조 이 성계와 틈이 벌어졌다. 막내 11살의 방석을 세자에 책봉한 것이다.
방원은 마침내 칼을 뽑았다. 둘째 어머니 신덕왕후 강비의 소생 세자 방석과 그 형 방번을 죽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정 도전 일파도 함께 제거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부왕 태조 이 성계는 몹시 격노 아니 혁노(赫怒)했다. 군왕이 격노하였을 때 최상급의 표현 혁노(赫怒)이다.
태조 이 성계는 고향 함흥으로 갔다. 여러차례 함흥으로 차사(差使)를 보내 부왕을 한양으로 모시려 했다.
그 차사는 함흥에 가서 죽었다. 태조 이 성계는 그 차사를 모조리 죽였다. 어렵게 한양으로 부왕을 모셨다.
부왕 태조 이 성계의 한(恨)과 분노는 여전했다. 태조 이 성계는 그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부왕 이 성계는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아들 방원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다.
태종은 한양도성과 가까운 경기도 구리에 조선왕실의 선산 건원릉을 조성하고 부왕 이 성계를 모셨다.
태종은 죽어서 부왕 이 성계의 건원릉 곁으로는 가기 싫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 한(恨)과 분노를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부왕이다.
태종으로서는 살아서도 무섭고 두려웠던 부왕 이 성계를 죽어서 대한다는 게 몹시 싫지 않았을까 한다.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氣風卽散 界水卽止)
풍수지리에는 '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 고 했다. 산이 물을 만나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 산을 타고 온 정기도 머물 수밖에 없다. 물은 기를 막아낸다는 말이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산 건원릉에 왕비의 능을 쓰지 않는다.
건원릉에서 보면 한강을 건너 남쪽 대모산 기슭에 왕비릉을 쓰고 그 곳을 자신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
한강을 기를 막아내는 바리케이트로 삼은 셈이다. 강북의 드센 기를 막아주는 안전지대에 수릉을 둔 것이다.
태종은 죽어서 그 수릉에 영면한다. 바로 태종의 헌릉이다.
궁궐이나 왕릉 사찰 향교 등에는 금천(禁川)을 두고 있다.
밖에서 오는 악기(惡氣)를 막아주는 금천이다. 그 위에 금천교를 놓았다.
금천교를 건너면 만나는 홍살문이다. 신성한 왕릉의 진입공간 지킴이 홍살문이다.
왕은 홍살문에서 어도를 밟고 걸어 배향공간으로 들어간다. 배향공간에 정자각이 있다.
배향공간으로 왕릉의 중심 건물인 정자각이다.
건물의 모양이 '장정 정(丁)'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자각이라고 한다.
정자각은 능에서 제례를 지낼때 정자각 내부에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일반 묘의 상석(床石)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왕은 홍살문에서 어도를 밟고 걸어와서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라 정자각 동쪽으로 오른다.
동쪽에는 신이 밟고 오르는 신계(神階)와 왕이 딛고 오르는 어계(御階) 두 계단이 따로 설치되었다.
정자각에서 바라다본 홍살문 모습이다. 참도(參道)가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긴 모양의 참(參)자를 쓴다.
정자각의 내부에는 전돌 바닥 위에 화문석을 깔고 그 위에 신위를 모시는 신어평상(神御平床) 1좌,
제상(祭床) 2좌, 향상(香床) 1좌, 촉대상(燭臺床) 2좌, 축상(祝床) 1좌, 준소상(遵所床) 1좌를 둔다.
정자각 그 자리에 서서는 봉분을 대할 수 없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면 뒷문을 통해 봉분을 만난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받은 혼령은 정자각 뒷문으로 나와 신교를 건너 왕릉으로 올라간다.
조선왕릉은 산 위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평지에 있는 왕릉은 더욱 아니다.(非山非野)
중국 일본 등에도 없는 묘제다. 신라 고려 때도 없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묘제 조선왕릉이다.
사초지(沙草地) 강(岡)이 조선왕릉에서만 찾을 수 있는 왕릉양식이다.
조선왕릉은 산도 아니고 평지도 아닌 강(岡)을 올라타고 있다.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
태조의 조문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와 임관 등이 건원릉 능침 산세를 보고
감탄한다. 기보는 조선 왕릉의 특징인 사초지 강(岡)을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조선 왕릉의 사초지는 절대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9할은 자연적이고
단지 1할 가량이 보토(補土)로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공적인 사초지일 때에는 풍수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매립지의 경우 생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초지인 강은 생기의 몸이며, 생기를 저장하고 있는 탱크라 할 수 있다.
사초지를 돌아서 능침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다. 통나루 계단으로 길을 조성했다.
조선의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 헌릉(獻陵)이다.
문화재청은 박자청(朴子靑)이 조영한 헌릉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왕릉 둘레길은 능침 뒤로 지나고 있다. 능침으로 꿈틀거리고 치고 들어가는 맥세가 아주 강하게 보인다.
헌릉과 인릉을 안고 있는 헌인릉 영역이다.
그 두 능을 사이에 두고 호젓한 산책길을 내었다.
참으로 걷기 좋은 길이다. 쉬엄 쉬엄 걷는데 그리 힘들지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15분 남짓이면 족하다.
헌릉은 1420년(세종 2년) 원경왕후가 사망했을 때 태종의 명으로 조성됐다.
1422년 태종이 사망하면서 쌍릉이 됐다. 태종은 왕권을 세종에게 넘긴 뒤에도
사냥 등을 즐기면서 섭정을 했으나 세종 4년인 1422년 4월 22일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세종은 명산과 개경사, 길상사 등에 여러 사람을 풀어 기도를 드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인을
석방하고 점을 보면서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했다.
또한 궁궐에 비상을 걸어 궁내 출입을 통제했다.
병세가 더해지자 태종은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넷째 사위인 의산군 남휘의 집으로
옮겼으나 5월 10일 56세로 승하했다.
이렇게 병중에 거처를 옮긴 것은 아무리 상왕이라도 궁궐에서는 임종을 할 수 없는 왕실 법도 때문이었다.
세종은 연화방(창경궁) 신궁에서 버선을 벗고, 머리를 풀고 슬퍼했으며, 백관은 흰옷에 검정사모를 쓰고
검정각대를 띠고 궁중에 들어와, 열다섯 번 곡을 하고 네 번 절한 뒤 자리를 옮겨 곡을 했다.
이때는 여름철이라 얼음 소반을 준비하고 졸곡(장례) 때까지 사직을 제외한 모든 제사를 금했다.
세종은 부왕 태종이 병들자 간호하느라 음식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에나 묽은 죽으로
하루 한 끼를 들었다 한다.
세종은 모후가 승하하자 당일로 국장도감을 설치하고 능제는 태조의 건원릉을 따르도록 했다.
당시 왕비의 석곽은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의 석산 돌로 사용했다. 석곽 덮개돌은 원래 물 등이
새어들지 않도록 한판으로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다친다며 반을 쪼개
두 개를 덮도록 지시하고 직접 자신이 현장에 가 석공들로 하여금 둘로 쪼개도록 했다.
원경왕후가 죽은 2년 뒤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하자 4대 임금 세종(世宗)은 모후의 능 옆에 부왕의 자리를
마련해 봉분을 나란히 만들었다. 난간을 연결해 쌍릉으로 조성했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다.
바로 자신을 그토록 믿어줬던 태종의 헌릉에서 그랬다.박자청은 공사가 시작되면
무서울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부들을 독려하여
성균관 문묘를 불과 넉 달 만에 건완성했다.
변계량은 새로 건설된 문묘가 높고 그윽하며 단정한 것이 개성의 문묘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밤낮으로 혹독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민폐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다음은 사관의 기록으로 그의 단점을 적시한다.
“박자청은 성품이 가혹하고 각박하여 어질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미천한 데서 일어나 다른 기능은 없고 토목 공사를 감독한 공으로 지위가 재부(宰府)에 올랐다.”
실제로 공사에 하자가 생기거나 인명에 손실이 오면 박자청을 처벌하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태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박자청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곧기만 하다”
태종의 그에 대한 평가였다.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박자청은 마전(麻田)의 나루터에 부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완강히 반대가 있었지만 부교는 만들어졌고, 국장 행렬은 평지 길을 밟듯이 무사히 강을 건넜다.
뒤늦게 칭찬이 쏟아졌다. 그는 정치적이거나 행정적으로 탁월해서 인정받는 인물은 아니다.
기능인으로 한양건설에서 큰 몫을 다하였던 인물이기에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한다면 박자청을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후세는 평가한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동궁(세자)과 대군들이
산천, 신사, 불사로 가서 기도드리고 팔(臂)을 불태우며 소신공양을 했으나
그해 3월 24일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그때 춘추 52세였다.
국장도감(장례위원장)은 영의정 황희(黃喜), 산릉도감은 우의정 하연(河演)이 맡았다.
승하 4개월이 되는 7월, 장례일을 택하는데 7일과 19일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서운관(풍수비서관)이 7일은 임금에게 안 좋고 19일은 금기일이라 하자 세종이 직접 7일로 결정했다.
장지를 결정할 때도 논란이 있었다. 신하들은 대모산 아래 서쪽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곳 아닌 다른 곳에서 복지를 다시 얻는다 한들 어찌 선영 곁에 장사지내는 것만 하겠는가."
세종은 개의치 않았다. 왕비의 능과 자신의 수릉을 그 자리에 조성했다.
세종은 죽어서 아버지 태종의 헌릉 곁 영릉에 영면한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예종 1년(1469) 2월 30일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기 위해 무덤을 팠다.
그 무덤은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 물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 곁에 그렇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