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밭을 가래질하며
英語(영어)의 ‘Verse’는 詩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어원을 살펴보면 동시에 그것은 ‘가래질’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부가 밭을 가는 것과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가 어찌하여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그 상징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흙은 酸化(산화)하여 굳어버리고 表土(표토)의 양분은 농작물에 의해서 다 흡수되어 버린다. 밭을 그대로 두면 이제 새 곡식과 채소를 심을 수 없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고 있다.
나락을 거두고 채소를 다 캐고 나면, 새해를 위해서 농부는 쟁기질을 한다. 흙을 뒤엎는 것이다. 안에서 침묵하고 있던 흙을 겉으로 들어내고, 겉의 흙들을 표토 깊숙이 다시 잠재운다. 새 흙과 헌 흙을 反轉(반전)시킨다. 이렇게 해서 농부의 밭은 다시 새로워지고, 그 변혁된 흙에서 새로운 씨앗들이 돋아날 수가 있다.
시인은 우리들 體驗(체험)의 밭을 간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가래질을 한다는 것이다. 日常(일상)의 나날들 속에서, 우리의 생은 酸化(산화)되고 굳어버리고 양분을 소실해서 不毛地(불모지)가 되어간다. 어제 보던 壁(벽), 變化(변화)없는 길, 우리는 그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경로로 하루에 도달한다. 피로하고 권태로우며 기계적인 일상의 그 체험들은, 마치 늘 보는 看板(간판)의 문자들처럼 판에 찍혀버린 것이다.
생의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생은 이슬이 맺힌 싱싱한 배추밭이나 이랑을 덮는 오월의 보리밭처럼 신선하지 못할 것이다. ‘잘 잤느냐’고 ‘밥 먹었느냐고’ ‘또 보자고’……늘 같은 인사말처럼 하루가 오고 하루가 지난다.
詩人은 이 밭을 쟁기질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밭의 흙을 뒤엎어서 새 흙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일상의 흙에 쟁기질을 해서 이제껏 깊숙이 沈黙(침묵)하고 있던 흙들을, 검고 살진 흙들을 끌어내는 지혜를 알고 있다.
시인은 農夫(농부)처럼 빈 밭을 간다. 새로운 季節(계절)에 대비하여 씨앗을 뿌리고 채소를 심기 위해서, 그래서 생의 풍요한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먼저 가래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가래질 속에서만 생은 하품을 하지 않고, 팽팽한 耕作(경작)의 긴장 속에서 건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문학사상』1975.12
나무 행자*
동네 산을 오른다. 파인 등산로에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가 층층대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발길에 몸을 내주었으면 납작하게 이겨지다 못해 끊어진 것까지 눈에 띈다. 먹거리 찾아 이리저리 배밀이하다 알몸 신세가 된 뿌리의 생이 애처롭다. 바깥세상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땅속 질서에 밀려다니다 저리 고단한 신세가 되었으리라. 하루는 애써 견디고 다음 날은 힘들게 맞서고 한날은 흔쾌히 내어주며 살아온 삶. 뭉개지고 뒤틀린 뿌리가 품은 아픔이 길 위에 낭자하다*.
끙한* 마음을 거친 호흡으로 뽑아내며 비탈을 오르다 보니 상처 입은 나무뿌리가 마음에 걸린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전에는 흙 속 식구들과 입을 맞대며 지는 해와 더불어 나이테를 키웠다. 우듬지 갈증을 달랠 수 있어 물을 찾는 여정은 행복이었다. 스쳐지는 흙살의 간지럼이나 바위틈 비집기야 대수일까만 삼복염천 더위에는 숨이 막혔다. 비를 갈망했다. 그러나 하늘이 준 물숨*은 흙 이불을 거둬가는 재앙이었다.
생각나면 오르는 익숙한 산인데 등산로에서 만나는 것은 그때마다 다르다. 발밑에 밟히는 뿌리에 마음을 두고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니 비탈 안쪽 고목에 눈길이 간다. 잎도 가지도 다 떨구고 두어 아름 둥치만 망연하게 서 있다. 허허로운 모습이 명줄을 놓은 듯하다. 그런데도 만고풍상 함께 한 시절을 잊지 못했는지 이파리 몇 장 달린 잔가지가 허울뿐인 줄기를 지키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벌거벗은 고목인 한 그루 그려져 있다. 휑한 가지 끝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목청을 높인다. 노래 제목은 ‘사랑’이다. 목소리 큰 남편하고 사십 년을 살았다. 이제는 익숙할 만하건만 목소리만 높아지면 말문이 막힌다. 목소리만 조금 커졌을 뿐이지 화를 낸 건 아니라는 변명을 밀치고 되로 받고 말로 주고 싶은 몽니*가 꿈틀거린다. 자존심이 술심*을 놓아주지 않는다.
물려받은 가난과 대면했던 어린 날, 속에서 올라오는 강퍅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커졌을지 모를 남편의 목소리다. 곤궁함이 만드는 부끄러움을 가리고 싶어 높아진 남편의 언성을 그예 밀어내고 싶은 나를 들여다본다. 아이들과 부모 형제들을 보듬고 꾸려온 우리의 시간을 생각한다. 기쁜 일 고마운 일 놀란 일, 거기에 간헐적으로 지나간 슬픔까지 찾아내려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소한 일에 매달려 아까운 시간만 버리고 말았다.
늦가을 나무의 목마름을 아는지 중턱까지 왔는데도 아침 이슬을 거둬갈 소슬바람이 잠잠하다. 군락을 꿈꾸며 날아가고 싶은 억새마저도 바람의 말을 기다리며 숨 고르기 중이다. 잠시 날개를 접은 억새가 ‘삶은 서로를 견디는 게 아니고 받아들여 함께 품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 하나를 내 속에 더해준다.
세상이 돌아가는 인연의 이치를 아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욕심 따라 줄 서기에 바쁜 게 우리네 세상이다. 그곳에 뿌리내린 마음이 혼탁해져 숨이 가빠지면 한 번씩 산을 찾는다.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니 곳곳이 경전이다. 나무가 한 장 돌이 한쪽, 바람이 한 면, 크고 작게 숨탄것들이* 한 바닥씩 쓰고 있다. 땅속 어딘가에 뿌리고 온 업보를 덜어내느라 밟히고 차여온 흔적을 안고 층계로 살아내는 뿌리의 말도 그 곳에 있다. 달리고 싶은 욕망은 뿌리에 주고 오르고 싶은 소망은 우듬지에 넘긴 채 생명의 통로가 되어준 줄기의 이야기도 한 구절 있다. 나누는 말이 달라 그들의 말이 내게 닿지 못하고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지 못해도 교외별전* 강독은 진행 중이다.
파르르 떨며 흙을 밀고 올라온 어린나무가 긴 세월을 품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두 아름이나 되도록 한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낸 고목의 의연한 시간 앞에 나를 세운다. 부부의 삶이라고 다를 리 없건 만은 때때로 흔들리는 내가 무색해 고개를 떨군다. 뿌리를 의지해 줄기가 있고 그것에 기대어 잎은 해를 먹으며 살아간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그대로, 빛이 내린 무궁한 법어를* 꽃으로 열매로 설(設)하기 위해 나무는 지금 수행 중이다.
가쁜 숨이 밀어낸 땅방울이 안쓰러웠는지 건너편 등성이에서 놀던 바람이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긴다. 바람이 나무를 나무가 산을 산이 나를 춤추게 한다.
다시 호흡을 길게 고르고 세상에 마음을 댄다.
*행자 : 불도를 닦는 사람
*낭자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어지럽다.
*끙하다: 몹시 힘들거나 아파서 끙 소리를 내다
*물숨: 떨어지거나 내뿜는 물의 힘.
*몽니: 받고자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내는 심술.
*술심: 온당하지 아니하게 고집을 부리는 마음.
*강퍅하다: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숨탄 것: 숨을 받은 것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교외별전: 불교 선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법.
*법어: 처의 말. 곧 경전에 있는 말
지은이 : 김근우
출 처: 『 수필과 비평』 2024. 12월호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녯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녯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백석(1912∼1996)
*토방: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 좀 높이 편평하게 다진 흙바닥 /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숙변: 숙지황
*곱돌탕관: 곱돌로 만든 약탕관.
*밭어놓다: 밭다; 건더기와 액체가 섞인 것을 체나 거르기 장치에 따라서 액체만을 따로 받아 내다. 여과하다.
< 먼 강물의 편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박남준(1957∼ )
올 한해, ' 다사다난'이란 어휘가 이렇게도 잘 어울리는 말인 줄 미쳐 몰랐습니다.
그래도 기쁜 날도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한국에서 나왔을 때, 정말 마음으로부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12.3 비상계엄선포 앞에서는 잊어버렸던, 잊고 싶었던 나라의 비극적 사건들이 떠올라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 잘 되어지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2024년도의 유정독서 모임을 종강하는 날입니다.
2024년 12월 19일, 14:00~16:00,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함께 읽을 김유정소설작품은 <떡> 입니다.
다가오는 목요일 오후,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연일 강추위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옷 두둑하게 입으시고 따뜻한 물, 자주 드시도록 하세요.
2024.12.17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