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반지
김인자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계절이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H는 입사동기였다. 저 멀리 남해의 바닷가에서 온 그는 유순한 사람이었다. 큰 키에 표준말을 하는 그는 목소리가 성우를 닮은 듯 부드러워졌으며,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여 부서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사내에는 제법 넓은 잔디밭이 있었는데 휴식시간이면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동료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는 항상 이것저것을 관찰하며 메모를 하였다. 감성이 무척 섬세했던 그는 봄이면 양지쪽에 피어나는 토끼풀 꽃을 엮어서 꽃반지를 만들어 내어 밀고, 가끔은 머리위에 얹는 화관을 예쁘게 엮어주곤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감꽃이 뚝뚝 떨어지는 날이면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아카시아꽃이며, 찔레꽃을 꺾어 건네주던 그도 받는 나도 아무 말이 없었고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의자에서 책을 읽곤 하였는데 한참을 읽다보면 그는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후배가 “언니 연애한다고 소문났어요.”한다. 내 주변에는 항상 H가 있다며 둘이 연애한다고 직원들이 수군거린다는 것이다.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사소한 행동들이 공연히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강변도로 산책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나는 강변도로를 산책하며 주변의 의자에서 잠시 쉬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퇴근을 하는데 신발 안에 사기로 만든 작고 예쁜 오리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신발 속에 예쁜 인형이며 꽃가지들이 놓여 있었으나 나는 누군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H 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무딘 감정이었을까.
연애한다고 소문이 나면 결혼할 사이로 생각하는 시대였다. 그 소문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회사에서도 자주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했고, H가 속해있는 부서출입도 조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퇴직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기차역에서 그와 마주쳤다. 집안 일로 부산을 가기위해 나선 길이었다. 중년의 신사가 되어 마주친 H도 서울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에 잠시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회사 다닐 때 나의 별명이 ‘미련 곰탱이’였다고 한마디 한다.
입사할 때부터 호감을 가졌고 조금씩 좋아지는 자신의 감정을 풀꽃 반지로 시계로 나에게 수없이 전했지만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지 아니며 싫어서인지 전혀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혼자서 애를 태우다가 포기를 했다고 한다. 수 십 통의 편지를 써놓고도 부치지 못하고 나를 향한 속마음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용기 없는 자신을 오랫동안 후회했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성실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이, 항상 책을 놓지 않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같은 동료애였다. 성실한 동료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다른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왜 그렇게 바보였을까? 주위의 친구들을 짝지어 주기 바빴으면서도 H의 감정을 진지하게 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편하게 만나서 차 한 잔 하자면서 내미는 H의 명함에는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나 요즈음 생각해보니 참 아름다운 시간이었고 순수한 마음이었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사랑이라는 자체를 무서워했고, 그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나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보잘 것 없는 풀꽃 시계이고 반지 목걸이였지만 그의 풋풋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온다.
해마다 피고 지는 토끼풀꽃을 보면서 수줍은 미소로 살며시 건네주던 그의 마음을 느껴본다.
멸치의 꿈
김인자
황해 바다에서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으스대는 멸치가 꿈을 꾸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줄 끊어진 연처럼 갑자기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니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여 몸뚱이가 뜨거워졌다 추워졌다 하는 꿈이었다. 새벽잠을 설치면서 꿈 풀이를 해보려고 온 지식을 다 동원했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날이 새자 가자미에게 달려가서 꿈 얘기를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해 바다의 도사 망둥이를 천거한다. 멸치는 가자미에게 망둥이를 초청해 오도록 부탁한다.
망둥이가 도착하자 멸치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융숭한 식사대접을 하며 꿈 풀이를 청한다. 망둥이는 큰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친다.
“참으로 길몽입니다. 멸치 대감께선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십니까. 바로 용꿈입니다. 큰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오르실 것입니다. 꿈에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용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용이 조화를 부리며 눈비가 오고 날씨가 추었다 더웠다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멸치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망둥이에게 거듭거듭 술잔을 따른다. 망둥이를 데리고 온 가자미는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는 멸치에게 눈을 흘기며 아까부터 목이 말라 이제나 술 한 잔 얻어 마실까 저제나 얻어 마실까 기다리지만 망둥이의 달콤한 말에 정신이 팔려있는 멸치는 가자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가자미는 참다못해 고함을 치며 말했다.
“이 쓸개 빠진 멸치 대감아, 그 말이 정말인줄 아느냐? 내 해몽을 한 번 들어봐라. 내가 보니까 곧 죽을 징조니라.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낚시 바늘에 걸렸으니 그럴게고, 흰 구름이 피어나는 것은 저녁 반찬에 쓰려고 석쇠에 올려놓으니 그러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은 간을 맞추려고 하면 소금을 뿌려야 하니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더웠다 추웠다 하는 것은 잘 익으라고 부채질을 하니 더욱 뻔한 일이다 이놈아.”
그 말에 기겁을 한 멸치는 열을 받아서 소리소리 지르다가 눈알이 튀어나왔고, 망둥이는 헤엄칠 사이도 없이 펄쩍펄쩍 뛰면서 도망을 갔는데 지금도 그 때 놀란 가슴으로 망둥이는 뛰고 있다고 한다. 가자미는 눈을 옆으로 꼬고 앉아 있다가 아직도 제자리에 안 돌아가서 눈이 옆에 붙어있다고 한다. 뒤에 있던 메기는 망둥이의 발에 밟히어 머리가 납작해 졌으며 문어는 저도 눈이 옆으로 돌아 갈 까봐 빨리 눈을 떼어 엉덩이에 붙였고 병어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입을 틀어막다가 짧고 둔한 주둥이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황해바다 물고기들은 뼈대 있는 멸치가 꾼 꿈으로 인해 모두 병신이 되었다고 한다.
꿈의 세계는 상징과 비유의 세계이며, 복잡한 정보들의 교묘하고 정밀한 조합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꿈에 대한 해몽은 그 꿈을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매사를 보는 시각, 또 어떻게 접근 하느냐에 따라, 즉 관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사람이 어떤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면 꿈에서 그것의 힌트나 영감을 얻는다. 그것은 비단 꿈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일과 생각에 집중해 있는 상태에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등 모든 감각이 그것을 향해 열려있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끝을 놓치지는 말자. 꿈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현실에 자신의 생활을 반영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는 일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