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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星州郡)
성주군(星州郡)은 경상북도 서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칠곡군, 서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상북도 고령군,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총 인구수는 2022년 12월 기준으로 42,566명이다. 군청 소재지는 성주읍이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이다.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이나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이다. 연평균 기온은 14.6°C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850mm ~ 1,300mm 정도이나 6월에서 9월에 집중된다. 특산물로 참외가 유명하다.
대가면(大家面) (최근 현황)
대가면은 성주군의 중앙부에 위치해 군도가 동서로,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성주IC가 위치한 곳이다.
면적은 28.11㎢로 성주군 전체 면적의 4.6% 정도를 차지하며 성주군에서 크기가 제일 작은 면이다.
가구수는 1천201가구, 인구는 2천527명이며, 유학의 대가인 한강 정구, 동강 김우웅 선생 등 명현거유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가면은 옥련리, 칠봉리, 금산리, 옥성리, 옥화리, 용흥리, 대천리, 홍산리, 도남리 등 9개의 법정리와 19개의 행정리, 47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대가면 관계자는 "대가(大家)의 지명은 대가곡방(大家谷坊)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돼 파직된 홍언수가 조선 태조때 현재의 벽진면 봉계리 집실 마을로 오면서 고을 사람들이 한양에서 대가(大家)집이 왔다고 해서 '대가곡(大家谷)'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말했다.(대가면 홈페이지)
대가면(大家面) (위키백과)
대가면(大家面)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군의 면이다. 넓이는 28.11km2이고, 인구는 2006년 기준으로 2,746명이다.
대가면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가곡면(家谷面)과 대리면(大里面)을 병합하여 대가면이라 해서 19개리를 관할하였는데 당시 유학(儒學)의 대가(大家)인 寒岡 鄭逑, 동강 김우옹 선생 등과 같은 그 외 명현거유(名賢巨儒)가 많이 배출되어 큰집이란 뜻에서 대가(大家)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그러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10개소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중산동을 가천면에 넘겨주어, 현재 9개 동(리)이 되었다. (위키백과)
칠봉리(七峰里), 옥성리(玉星里), 용흥리(龍興里), 흥산리(興山里), 옥련리(玉蓮里), 금산리(金山里), 옥화리(玉花里), 대천리(大川里), 도남리(道南里) 등 9개의 법정리가 있다.
금산리(金山里)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 등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며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금곡리, 조양리, 대산리 등을 병합하면서 금곡과 대산의 이름을 따 금산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사기점골, 질매, 삼산, 금곡마을 등이 있다.
사기점골 마을은 사기점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질매 마을은 길마처럼 생긴 고개 밑이 된다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삼산마을은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이 앞을 둘러 있다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금곡마을은 금산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뒷산에서 금이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본래 영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산동, 조양동, 금곡동과 대가면의 삼산동을 병합하여 금곡과 대산의 이름을 따서 금산리라 하여 대가면으로 편입되었음.
금산리(금산동(金山洞)) 각 마을의 자연환경과 유래
대가면의 도서로 가로지르는 33번 국도의 중간쯤의 땅고개 부근과 동편의 산간에 자리하고 있다.
웃상삼의 동편에 상산이 못안상삼과 접하고, 미재마을 남쪽으로는 수륜면을 경계로 다락산이 우뚝 솟아 있는 산간 마을이다. 금산1리에 대산령, 조양리, 미재, 윗미재, 금산2리에 가능골, 땅꼭, 웃상삼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대산제, 삼성제 등이 있다
대상 마을 개관
금산동(金山洞) 영파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가면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대산동, 조양동, 금곡동, 삼산동을 병합하였으며, 금곡과 대산의 이름을 따서 금산리라고 하였다.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상상삼(上象三)·웃상삼], 뫼재[조양(朝陽)·산령(山嶺)], 대산령(大山嶺)[대실령], 당고개[당현(堂峴)] 등의 마을이 있다.
삼산(三山)
삼산 마을은 가야산, 다락산, 칠봉산이 앞을 둘러 싸고 있어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명종 때 밀양에서 삼성재(三省齋) 박윤연(朴潤連)이 이거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세거한다. 웃상삼은 삼산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
뫼재는 산고개의 마을이란 뜻이며, 산골이서 아침에 해가 뜨는 것만 볼 수 있고 저녁에는 산이 가려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일부 지역은 ‘조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산령에는 마을 뒤에 산이 가로 놓여 있으며 언덕 위에 여우터란 곳이 있다. 이 여우터 고개에 마을이 있어서 대산령으로 부르다가 대실령이 되었다.
당고개는 성주읍에서 군내 서부 지역으로 통하는 고개 마루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고개에 성황당과 나그네를 위한 주막이 있어 당고개 혹은 당현으로 부른다.
문화유적으로는 경성재(景省齋)와 대산재(大山齋) 등이 있다. 경성재는 삼산 마을의 밀양인 삼성재 박윤연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대산재는 대산령 마을에 있으며, 김해인(金海人) 남곡(南谷) 김대생(金大生)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그는 현감을 역임하다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후손들이 세거한다.
1912년 금산동에는 姜氏, 郭氏, 權氏, 奇氏, 金氏, 朴氏, 裵氏, 白氏, 史氏, 申氏, 吳氏, 柳氏, 李氏, 林氏, 張氏, 全氏, 鄭氏, 曺氏, 韓氏, 洪氏 등 적어도 20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朴氏 · 裵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金山里(성주문화원 발행 ‘성주마을지’에서 발췌)
戸: 84 人口:255名
성주에서 가천으로 가로지르는 33번 국도 주간 지점에 땅고개 부근에 있는 自然部落이다. 東쪽의 象山(165m)과 南쪽의 다락산(山:多樂山:380m)이 金山里를 둘러 있다.
상삼(上三, 象三, 池山)
初等學校 지나 西 언덕길의 國의 北便 산골에 낮은 산을 등지고 向한 "아래상삼"과 그곳의 細川上流쪽의 貯水池가 있는 곳의 "못안상삼"과 땅고개 비탈길의 北쪽 山 金山의 "옷상삼"으로 3分되어 있다.
웃상삼(上象三)
大家面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도 중간쯤에 염속산에서 뻗어내린 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언덕을 당고개라 한다. 당고개(땅고개) 언덕길 북쪽에 산자락으로 마을을 가리고 들어앉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밀양에서 삼성재 배연(三省齋 潤連, 1555生)이 입향(入鄕)해 시문(詩文)을 벗삼았고 그 후손들이 경성제(景省齋)를 지어 추모하고 500年 노거수와 모도비(慕道碑)가 있다.
후손 박헌수(朴憲洙), 박향수(朴向洙)는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웃상삼(上象三) (성주애지리문화농원)
성주에서 대가면 소재지를 지나 가천 방향으로 가다 땅고개 가기 전 우측 금산2리 표지판 방향으로 400여 m 웃상삼(上上三)이란 지명은 마을이 골짜기 안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가야산(伽倻山), 다락산(多樂山), 칠봉산(七峯山)의 세 산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하여 삼산(三山)이라 불렀으며 상삼(象三), 상삼(上三) 마을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웃상삼 이라 한다.
금산리 웃상삼 느티나무 보호수
이 나무는 성주군 대가면 금산리 산 83번지에 위치하며 2005년도 8월 9일자로 리 보호수(05-28-01)로 지정된 당산목 느티나무로 수령 400년 생으로 높이가 25m 나무둘레 3.5m로 웃상삼 마을 도로끝 언덕에 소재하고 있다.
아랫상삼·상삼(옥련2리)
마을 뒷산인 상산 아래에 계곡을 따라 3개의 마을이 나란히 형성돼 있다고 해서 '상삼'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한 마을에 박(朴), 배(裵), 하(河)의 3성씨가 산다고 해서 '상삼'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은 주로 상삼 또는 상삼저수지 아래에 있어서 통칭 '아랫상삼'이라 부른다. 아랫상삼은 2개의 작은 마을로 돼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저수지와 가까이 있는 마을을 '못밀'이라 하고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랫마'라 부르기도 한다.
아래상삼 마을에는 山人와 두 아들 閑, 閏은 大司成을 한 명벌(名伐)이었으며, 裵閏은 世宗 大司 諫,弘文館 直提學을 지낸 大家였고, 世祖 때 당한 김종서는 배윤의 사위다
뒷날 裵閏이 病死하니 夫人 수성 라씨는 몸소 머리 깎고 3年을 시묘살이를 마치면서 墓所(선남 오도마을)에서 지아비를 뒤따랐으며, 상삼 앞 國道(年前有故로 재건축) 羅烈婦의 정려각(旌閭閣)이 있고 아들 雪松 裵聲謙의 孝行碑가 있는 곳에 함께 있다.
봉동(鳳洞)
大家初等學校의 細川을 接하여 鳳頭山을 등지고 西向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麗三重을 지낸 廣平君李能(陵)의 後孫이 살 고 根의 아들 李漢錫(1872生)이 詩賦에 밝았고 德望이 높았다. 哲人林錫圭가 知禮에서 ㅈ鄕해서 世居했고 아들 白蓮 林洪洙(1866生)는 文科에 올라 聲水臺에서 経史와 儀禮를 後門에 講學했다. 晋州人鄭師賢의 後孫鄭好夫가 文望을 떨친 곳이다.
안터(內垈)
大星初等學校 北쪽 뒤의 낮은 丘陵 넘어로 아늑하게 南向한 마을 이다.
義城金氏의 集姓 마을인 이곳에 太祖때 忠淸兵馬都節制使를 지낸 內省用超가 ㅈ鄕하여 마을 들머리에 遺墟碑가 세워져 있고 그 8世孫이고 四友堂 金石의 둘째 孫子인 溪峰 金天諜(1558~1621) 은 寒岡의 門人이고 壬辰倭乱 때 功勳을 세웠으며 이 追慕하는 溪齋가 있다.
이곳의 敬堂은 默齋 金枓를 追慕하는 宗堂이고 또 赤城(山淸) 郡守를 지내고 詩文과 経史에 特出한 敬齋 金重南(1606~1698)의 廟址碑가 있다.
相後學을 教育하며 詩書를 즐긴 海隱堂이 마을에 함
옥성리
戶:225戶, 人口:692名
옥星里는 郡內 6個面과 隣接한 大家面의 所在地 里洞이다.
東西로 33번 國道가 貫通하며 南北으로 地方道가 交叉하는 地點이고 1914年 行政 改編에 依해서 大家面으로 된 뒤에 現 面事務所 周邊에는 질그릇(옹기) 가마가 있었고 甕器類를 散賣하는 곳이라 하 여 "여으실점(店)”이라 했다.
이곳의 處에는 良質의 高嶺土가 많아서 질그릇 原料로 利用되었 고 高嶺土가 있는 곳을 옛날에는 “분통골”이라 했다.(한개마을 앞의 三峰山, 수륜면 소재지 北쪽 첫마을 참고) 星里는 交通의 便易로 未來志向的 小都市로 開發이 豫想되는 곳이다.
▣유촌(칠봉1리)
지명의 유래는 대흥천변에 버드나무가 무성해 '유촌'이라 했다는 설과 옛 성인이 사는 마을을 '유촌' 또는 '양촌'이라 한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조선 중종때 성주인 이환의 사위인 청주인 정사중이 한성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차츰 청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마을에는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회화나무가 있다. 유촌 마을회관 관계자는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에만 심을 수 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가 냑향할 때 상으로 하사했던 나무"라며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여실·여의실·여실점(옥성1리)
'여실'이란 지명은 이 일대에 여우가 많아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지며 현재 '여실', '여의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또이곳 인근에 질 좋은 황토가 많아 약 200여년 전부터 옹기를 제작하던 옹기굴과 판매점이 집단적으로 성업해 '여실점'이라고도 불렀다. 옹기굴과 옹기판매점은 1965년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도로를 경계로 '여실·여실점' 그리고 옥련리의 '안여실'로 나뉘어 불린다.
▣앵미동·앵무동
동네 서북쪽 앵무산의 완만한 지맥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해 꾀꼬리가 많이 깃들어 춤을 췄다고 해서 '앵무동'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마을 뒷산인 앵무산에서 이름을 따 왔다는 설이 있다.
▣용전·용포(용흥1리)
마을 뒤 도룡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가에 마을이 있어 '용포'라 불리다가 마을 앞 밭가에 '용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서 '용전'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용흥1리 이장상록회 관계자는 "용바위는 매년 정월 2일에 동제를 지내고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1972년 도로 개축 때 바위 주변에 무성하던 소나무는 베어지고 바위도 없어져 지금은 자취만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는 조선조 전수일이 입향해 후손이 세거했으나 지금은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이중화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기국재, 괴산재, 팔우당을 세워 조상을 추모하고 있다.
▣서치미·연포·이포(용흥2리)
마을의 지형이 연꽃 봉우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연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1923년경 황산재기의 기록에 의하면 황지의 남쪽이자 연산의 북쪽에 수풀 골짜기가 깊숙하며 텅빈 곳이 있어서 '연포'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동북쪽에 이천이 흐르고 있어 '이포'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서치미'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마을 뒷산에 꿩이 많아서 '서치뫼'라 부르다가 음이 변해 '서치미'가 됐다고 한다.
용흥2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서치뫼는 해발 6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이며 주민들은 서치미와 연포를 동일시하고 있어 마을회관도 '연포회관'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산막·산양(흥산2리)
지명 유래는 마을이 자리한 형세가 주변 산으로 둘러싸여 삼면이 장막을 이뤘다고 해서 '산막'이라 불리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이 산에 막을 치고 숯을 구워 살았다고 해서 '산막'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마을 옆에 있는 산이 양지산이라서 '산양'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자리섬·성곡·전인(도남1리)
마을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다. 동네 뒤에는 산성이 있는데 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으로 '자리섬'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성곡'이라 부른 것도 '성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리섬'의 다른 설명으로는 마을의 위치가 산자락이 마을을 좌우로 둥글게 감싸고 있는 곳에 마치 섬 모양을 한 자리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을 뒤에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산성이 있는데 전인이란 장군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전인산성의 전설이 있어서 '전인'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전인산성은 할미산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남1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우리 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귀한 나무들이 많은데, 등암 배상룡 영각 입구에 있는 배롱나무 2그루는 2005년도에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수령 300년에 높이 12m 둘레 100cm"라고 말했다(사진 참고). 아울러 "갈밭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목 노거수인 갈밭소나무는 배를 묶어두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는데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며 "지정 당시 수령 360년, 높이 6m, 둘레 280cm였다"고 덧붙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