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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롬 10장 10-21절
로마서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성경구절 중의 하나는
로마서 10장 13절 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굉장히 어렵고 멀고
힘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구원은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으면 됩니다.
구원이 이렇게 쉽고 분명하고
간단한 것인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면
어찌 부를 수 있겠는가?
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질문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들어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믿겠는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는 것을 믿으려면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들어야 합니다.
소식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셋째 질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면
누군가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메신저’ 라고 말합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
‘메신저’가 있어야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군가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씀을 듣게 되고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며
믿음이 생길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
넷째 질문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메신저가 메시지를 전한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 메신저는
스스로 가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대사를
각 나라에 파송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파송을 받지 않았는데,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는데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듣지 못했는데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 그러면 오늘 14절과 15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하나 갖게 됩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보내는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줘야 합니다.
그 말씀을 전해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길 때
예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최대 임무는
무엇이겠습니까?
파송하는 것입니다.
사도 라는 말은
‘아포스텔로’ 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뜻은
‘내가 너희를 보낸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예수가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예수가 당신을 위하여 부활하셨고
예수가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고
예수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셨고
구원받게 해 주셨고
그 예수는 부활하셔서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소식을 전하러가는 자의 발걸음은 어떻겠습니까?
신이 날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면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발걸음이 빨라지고
전달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반면에
사형장에 끌려가는 발은
어떻겠습니까?
아주 무겁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면 누군가 전해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이 있으려면
누군가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 사람의 발은
복된 발입니다.
이 얘기가 15절 중간 부분에 있습니다.
발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의 삶 자체입니다.
결국 삶 자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담을 그릇은
여러분의 입이 아니라
바로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으로 인한 구원에 감사하면서
마음에 주님을 담고 살아가는 그 삶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러한 삶이 있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이 누군가에게
주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아는 자로
그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일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담고 살아가는
그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주님을 듣지도 믿지도
부르지도 않을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전도하셔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게 하셨다면
그것은 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차압하셔서
주님의 그릇으로 쓰시겠다는
의도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이제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욕심과 여러분의 일과
목표를 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과 주님의 목표와
주님의 마음을 담아야 할 그릇입니다.
그릇으로 살아가면
그것이 주님께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지 주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믿게 하셔서
구원을 얻게 된 것에 대한
은혜와 감사로 살아가면 됩니다.
내 삶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시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부름 받은 인생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책임과 사명이 주어진
삶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책임과 사명에 충실하셔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으로 인해 전해지는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발이
이런 복된 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믿음을 갖는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생깁니다.
말씀은 믿음의 씨입니다.
믿음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비료도 중요하고, 햇빛도 중요하고,
공기도 중요하고, 물도 중요하지만,
씨가 제일 중요합니다.
‘씨’ 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는 나오는데
말씀을 들을 때만 좁니다.
이 사람은 아무리 해도
믿음이 없습니다.
씨가 있어야
자라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을 갖고 싶으시면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읽고, 외우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믿음 입니다.
말씀이 있어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는 두 번째 비결은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돌멩이도 없어야 하고,
햇빛도 잘 내려쬐어야 하고,
비도 적당히 와야 하는 것처럼
그 말씀이 잘 자라도록
내 마음을 옥토로 만들고
순종하고,
성경말씀대로 행동하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3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쑥쑥 자라기를 바랍니다.
씨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이 들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셔서
예배도 익숙하고, 설교도 익숙하고
성경에 대해서도 익숙하지만
변화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만일 땅이 굳어 있으면
불도저로 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0장 12절)
바꾸세요.
예전에 받았던 은혜를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 오늘 여러분 안에
믿음의 씨가
새로 심겨지길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게 하십시오.
열매를 맺으십시오.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19절에서 바울은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첫째는 모세요
둘째는 이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이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너희들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너희들이 듣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결코 이스라엘이
듣지 못해서, 몰라서,
메시야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메시야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메시야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
탄생 장소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교만해서
완고했기 때문에 메시야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또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도 듣고 하는데
신앙생활이 고장이 날 수가 있습니다.
답답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게 습관이 됩니다.
무기력해집니다.
그리고는 자꾸만 죄를 짓습니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자꾸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좋아하게 됩니다.
자기 영혼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율법도 할례도 약속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도 있었습니다.
그랬지만 그들의 마음은 강퍅해졌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도
강퍅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변명을 합니다.
죄인은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는, 허물은 잘 비판하는데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변명과 핑계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변명을 하고,
핑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빨간 불이
깜빡 깜빡거리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자기 허물을 보는 사람은
남의 허물에 대해서
야단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의 허물에 대해서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이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허물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강퍅함을 보는 눈이
자기의 오만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하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계십니까?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털 깎는 자의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인류의 모든 죄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침묵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루 종일 손을 벌리시고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
거스려 말을 하는 사람들을
참고,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막히게 부모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 자식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눈에서
피 눈물이 흐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했습니다.
자기도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자기가 낳은 자식이
과거의 자기보다
몇 배나 자기 속을 더 상하게 했습니다.
애를 때리고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 사진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렇게 나 때문에
속이 썩었겠지요.”
그때야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속이 상한 것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스라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온 종일 뙤약볕에서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같이
손을 벌리시고
나를 기다리십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스라엘처럼
예수는 오래 믿었지만
실족하고 상처를 입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온 종일
손을 벌리고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길 바랍니다.
그분께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 허물을 보기 시작하십시오.
남의 실수를 보지 말고
자기 실수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의 눈에는
손을 벌리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알고도
강퍅해지고 불순종하고
거스려 말하는 이스라엘.
그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렸고
그들 때문에 하나님은
온 종일 손을 펴고 계셨습니다.
주님 오늘 내가 회개하길 원합니다.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강퍅한 나의 마음을 녹여주시고
불순종하는 나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거스려 말하는
나의 영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