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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외리의 단속사(斷俗寺)는 앞서 말한 대로 신라 경덕왕 시절쯤에 세워진 절로, '단속'이란 절 이름에는 당시 상대등(국무총리)을 지낸 신충의 입산수도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즉 그가 이곳 지리산 자락에 절을 세워 입산하며 속세와의 연을 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충 이후로는 속세와 가까운 절로 은성한 듯싶으니, 절과 얽힌 이야기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매우 풍성하다.
흥미로운 이야기들로만 추리자면, 우선 신라의 유명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이곳에 있었고, 신품사현(神品四賢, 신라·고려의 명필 네 사람)으로 불리던 탄연(坦然) 스님이 주석하였으며, 개경에서 내려온 무신정권 최우의 장남 최만종이 주지로써 행패를 일삼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탁영(濯纓) 김일손과 남명(南冥) 조식, 사명당 유정 등이 족적을 남겼는데,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김일손의 지리산기행문인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에 나오는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의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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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연 스님은 36세 대선 승과 급제…
대사중대사-삼중대사-선사 이어대선사 법계 품서 ‘모범사례’인종 요청으로 76세엔 왕사세자 시절 글 배운 예종은 궁중으로 선사초청해 청법인종은 국가 중대사 때마다 어필로 자문 구하기도 해…
인종 타계 후 단속사 돌아와 90세 입적 때까지 머물면서 제자들 제접 하며 선풍진작선리 얻은 대종장 매우 많아 사위의송ㆍ상당법어 받아본宋아육왕사 개심, 서면인가‘천리마' 비유 고려 3대 명필
단속사는 탄연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탑비가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탑만 남아있다.사진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지 동서 삼층탑,고려 선사들의 행적에 법계(法階)를 받은 선사들이 등장한다.
원응국사 학일도 그렇지만, 그의 제자들 경우에도 ‘대선사’가 2인, ‘선사’가 13인, ‘삼중대사’가 9인이라고 앞에서 언급했었다.혜조국사 담진의 제자 지인(之印, 1102〜1158년)도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법계를 받았다.
법계는 선종인 경우 대선(大選)에 합격한 뒤부터 중덕(中德),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 순이다.
교종인 경우는 대덕(大德), 대사(大師), 수좌(首座), 승통(僧統)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대선(大選), 중덕(中德), 대선(大禪), 대선사(大禪師), 도대선사(都大禪師)이다.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년)도 법계를 순서대로 받은 모범적인 경우이다.
탄연은 원응국사 학일보다는 20년 여년 후 인물로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의 제자이다.
‘혜조’라는 법명이 여러 명이다보니, 탄연의 스승이 담진이 아닐 거라는 견해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탄연을 혜조국사 담진의 제자로 본다.
15세 명경과 합격…
칭찬 자자‘단속사 대감국사 보명탑비문(斷俗寺大鑑國師普明塔碑文)’에 전하는 스님의 행적을 보자.
탄연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성은 손(孫)씨, 시호는 육조혜능과 같은 ‘대감(大鑑)’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기(志氣)가 뛰어났다.
8˜9세에 문장을 짓고, 시를 썼으며, 서예도 뛰어났다.
13세에 6경(六經)의 대의(大義)에 통달, 15세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해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탄연은 고려 숙종(1096˜1105년 재위, 이때는 아직 왕에 오르지 못한 ‘대군’)의 명으로 세자(훗날 예종)의 스승이 되어 세자에게 글과 행동거지를 가르쳤다.
마침 탄연에게 사안(師安)과 보현(保玄) 두 벗이 있었는데, 사안이 출가했다.
선사는 1088년, 19세에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개성에 위치한 성거산(聖居山) 안적사(安寂寺)로 출가했다.
선사는 인생의 탄탄대로를 뿌리치고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탄연은 송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혜조국사 담진이 머물고 있는 광명사(廣明寺)를 찾아갔다.
탄연은 담진에게서 심인을 얻고, 여러 곳을 행각하며 수행했다. 이런 와중에 탄연은 연로한 노모의 집 부근에 머물며 모친을 봉양하기도 했다.
단속사지 당간지주.탄연은 36세 때인 1105년(숙종 10년) 대선(大選) 승과에 급제, 다음 해에 ‘대사’ 법계를 받았다.
1109년 39세에 ‘중대사’, 45세에 ‘삼중대사’, 51세에 ‘선사’ 법계를 받았다.
세자 시절 탄연에게 글을 배운 예종(1106˜1122년 재위)이 즉위하면서 탄연을 궁중으로 불러 법을 묻곤 하였다.
1129년 59세에 탄연은 보리연사(菩提淵寺)에서 법회(法會)를 열었다.
비문에 의하면, 1130년 인종(1123˜1146년 재위)은 탄연에게 칙명으로 광명사에 주석토록 하였고,
국가의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탄연에게 어필(御筆)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탄연은 1132년 62세에 ‘대선사’ 법계를 받았다. 선사는 76세에 인종의 부탁으로 왕사에 임명되었다.
왕사에 임명된 후 탄연은 보리연사에 머물렀다.
보리연사는 옛날부터 뱀이 많이 출몰해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매우 불편해했는데, 탄연이 이 절에서 법회를 몇 차례 베푼 뒤에 뱀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인종이 타계하고, 의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148년 탄연은 산청 단속사(斷俗寺)로 돌아왔다.
탄연이 78세부터 90세로 입적할 때까지 단속사에서 10여 년을 머물면서 제자들을 제접하며 선풍을 진작시켰다.
비문에 전하는 탄연의 면모는 이렇다. “선사는 그 천성이 너그러워 학인 지도에 게으르지 않아 현학(玄學)하는 사람들이 구름과 물처럼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탄연의 회하(會下)에 대중이 수백 명이었다. 제자들은 승당(升堂)하여 입실하고 심인을 전해 받았으며, 선리의 골수(骨髓)를 얻어 당시에 대종장(大宗匠)이 된 승려가 매우 많았다.
마침내 탄연이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며 조도(祖道)를 널리 진작시켜 동국의 선문을 중흥시켰는데, 이는 오롯이 선사의 법력에 의한 것이다.
” 임제 9대손…조계종 사굴산인탄연의 비문에 ‘고려국(高麗國) 조계종(曹溪宗) 사굴산하(山下) 단속사(斷俗寺) 대감국사비(大鑑國師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탄연이 사굴산문 승려이며, 고려에 들어와 ‘조계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한편 비문에 ‘탄연은 임제의 9대손(九代孫)에 해당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실은 탄연은 중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탄연을 임제 9대손이라고 하는가? 12세기 초, 중국의 선종은 7종(五家+황룡파+양기파)이 모두 완성된 상태였다.
임제종 황룡 혜남(黃龍慧南, 1002˜1069년)에 의한 황룡파가 먼저 발전했고, 이어서 양기 방회(楊崎方會, 996˜1049년)에 의한 양기파가 발전했다.
황룡파에는 당시 사회 인물인 소동파, 왕안석, 장상영 등 유명한 문인들이 선(禪)을 배웠다.
탄연은 자신이 지은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법어(上堂法語)를 상선편(商船便)을 이용해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아육왕산 광리사(廣利寺, 현 아육왕사)에 있는 육왕개심(育王介諶, 1180˜1148년)에게 보냈다.
개심은 임제종 황룡의 5세이다. 개심은 탄연의 게송과 법어를 보고, 극구 칭찬하면서 그에게 인가하는 답장을 보냈다.
개심이 머물고 있던 광리사는 부처님의 두골사리가 모셔져 있으며, 고려의 고승이며 천태종 16세인 의통조사(義通祖師, 927〜988년)가 생전에 아육왕사 승려들의 초청으로, 법문을 했던 도량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고려 승려들이 중국 불교계에서 법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아육왕사는 현재도 선객들의 요람이다.
탄연이 개심으로부터 서면으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선사는 임제종 법맥 9대손이라고 한다.
탄연은 개심 이외에도 도경(道卿), 응수(膺壽), 행밀(行密), 계환(戒環), 자앙(慈仰) 등 노숙(老宿)들과 서신으로 교류했다.
여기서 계환을 제외하고, 모두 개심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
‘단속사대감국사탑비’의 탁본(한국학중앙연구원).탄연은 시를 잘 짓고, 글 또한 잘 지었다.
이런 탄연을 비문에서는 ‘천리마(千里馬)’에 비유하고 있다.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과 같이 이름을 날렸으며,
서거정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金生)이 제일이요, 요극일(姚克一), 영업(靈業), 탄연이 다음 간다”고 칭찬했다.
시격(詩格)이 또한 고상하고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본받았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탄연을 고려의 3대 명필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 탄연의 법맥에서 수선사 보조국사 지눌이 나오게 된다.
이색이 쓴 진각(眞覺)국사 천희(千熙) 비문에 다음 내용이 전한다. “보조국사는 대감국사 탄연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다.
실은 탄연이 입적하기 1년 전 보조 지눌이 탄생했으므로 직접적으로 법이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조와 탄연은 같은 사굴산문의 승려이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필자는 여름날 늦은 오후 탄연이 머물렀던 단속사지(斷俗寺址)를 찾아갔다.
지리산 한 자락인 단속사는 굽이굽이 산길이 이어져 찾아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절은 탄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선을 전한 법랑의 제자인 신행(神行)도 머물다 입적하여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이 절에 있었다.
사지 입구에 들자, 제일 먼저 시비가 필자를 맞아준다. 산청 부근에 머물던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년)이 이곳을 찾은 ‘사명당에게 준 시(贈山人惟政)’가 새겨져 있다.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花落槽淵石 春深古寺臺 別時勤記取 靑子政堂梅)” 시 구절에 나오는 정당매가 사찰 주변에 있다.
이 매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수명이 600년이라고 한다. 필자가 방문한 때가 여름이어서 매화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3월이면 아름다운 매화를 피운다고 한다.
단속사지에는 동서 탑 두기가 서 있고, 당간지주만 있을 뿐이다. 탑 두 기를 앞에 두고 법당이 있었다고 예상할 경우, 그 옛날 결코 작은 도량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지 주변에는 두 곳의 사찰이 있는데, 한 절은 비구니 스님이 살고, 한 곳은 비구 스님이 살고 있다.
이 단속사지 주변 마을 몇 집은 정부에서 벌써 매입하여 곧 발굴 작업을 할 거라고 한다.
사지 발굴로 신행과 탄연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들의 면모가 드러나기를 고대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이륙_유지리산록 1463년>
단속사(斷俗寺)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오륙십 리 정도 가면 있다. 홀로 서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여기부터 외산(外山)이다. 이 절은 동쪽으로 단성(丹城)에서 십여 리, 북쪽으로 산음(山陰) 에서 십오륙 리 떨어져 있고 앞으로 소남진(召南津) 과 또 십여 리 떨어져 있다.
이 절은 봉우리(웅석봉???) 아래 있는데 모두 백여 칸이나 된다. 가운데 자리 잡은 대전(大殿)은 보광전(普光殿)인데 경태(景泰) 연간 에 중창한 것이고 앞쪽에 있는 창판당(創板堂)은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서, 남, 북쪽에 각각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뜰 오른쪽에 있는 누각은 신라 때 지은 것인데 벽에 그려진 사천왕상의 금빛과 푸른빛이 여전히 새것 같았다. 전해지는 말로는,
“신라 승려 김생(金生)이 벽 위에 유마상(維摩像)을 그리고 고목 한 그루를 배경으로 그렸는데 산새가 가끔씩 날아와 앉으려다가 떨어지곤 했다. 뒤에 그림의 나뭇가지 한 개가 훼손됐는데 승려가 이어놓으니 이때부터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사천왕의 진영(眞影)이 매우 기이하고 고풍스러우니 불도자(佛道子)가 그린 것이 아니라 김생이 그린 것일 것이다. 고려 때 명현인 김부식(金富軾) 과 정습명(鄭襲明) 이 이곳에 유람을 왔다가 벽에 시를 남겨 놓았다. 계곡 입구 석벽에는 ‘석문(石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이 또한 최치원의 글씨라고 한다.
<김일손_속두류록(續頭流錄) 1489년>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담장의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바로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사명(大鑑師銘)이었다. 완안(完顔)의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거처하는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하였고,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옛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부패하였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하였는데 바로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고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러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서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는데, 덤불 속에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으로 돌의 결이 거칠고 추악하였으며, 그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미치지 못하고, 문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내에 있는 정사(精舍)는 절의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서 그 아래에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는데 이 절의 승려가 수를 놓아 만든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기이한 모양이 각기 달라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절의 옛 문서를 열어보았다. 그 중에 백저(白楮) 세 폭을 연결한 문서이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바로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인데, 바로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의종 부자는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이들이 이처럼 선불(禪佛)에게 삼가하였지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곤욕을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또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 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아서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그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단절된 간찰(簡札)이어서 그 문장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 것으로 절반이 빠져 있었지만,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만한 것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었는데,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있어서 대화할 수 있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의 기업(技業)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고,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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