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감
덥고 짜증이 난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어디 시원한 곳이 없을까. 바다도, 산도 있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처럼 게으르면 움직인다는 자체가 귀찮다. 어슬렁어슬렁 동네 공원을 찾는다.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혀볼 생각이다.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바람이라도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부채를 힘껏 부쳐 보지만 노력보다 효과가 별로다.
‘툭’,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니 제법 큰 감나무 한 그루가 팔월 중순의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다. 나무 아래 풋감이 많이 떨어졌다. 거름이 적어 달고 있는 감을 모두 건사할 힘이 부치나 보다.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나 색깔마저 누렇게 변해버린 것도 있고, 떨어질 때의 중력에 땅에 닿는 순간 박살이 나서 감의 모양을 잃어버린 것도 있다. 행인에게 밟혀 모양이 흉해져 저것도 감이었을까 의문 갖게도 한다.
껍질에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모양을 갖춘 것도 있다. 떨어진 시간의 길이에 따라 색깔이 바랜 것과 초록을 그대로 지닌 차이뿐이다. 누구의 도움으로 어떻게 떨어진 것일까? 나무 위를 쳐다본다. 아직 많은 감을 달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감이 자의든 타의든 떨어질 것이다.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쳐 왔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진 직업을 정년퇴직까지 갖고 있었다. 첫 출발이 나라의 동량을 내 힘으로 키워 보겠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전공이 다른 직장을 갖는 것보다 교사란 직업을 갖는데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몇 차례 직업을 바꿔 볼 생각도 했다. 타고난 성품이 변화를 싫어해 한 해 두 해 지나다 보니 평생 직업이 되었다.
점점 경력을 쌓아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로서 어려움은 학생들에게 글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어쩌다 잘못 가르친 지식은 다음에 바르게 가르칠 수 있으나, 바른 지혜를 갖도록 지도하지 못하면 고쳐주기 어렵다.
인간만큼 가르치기 어렵고 힘든 것도 없다. 앞으로 살아갈 길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지혜가 뛰어난 성현이나 선각자일지라도 과거의 삶에 유추할 따름이지 미래는 정확하게 예언할 수 없다. 흔히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 인생 또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학생들은 럭비공과 같은 존재다. 어디로 튀어갈지 모른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르다.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꿈이 다르다.
지금 생각하니 참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내가 인생을 조금 더 살았고 전공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학생들에게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한 것 같다. 그들 중에는 내가 이끈 대로 잘 따라오는 학생도 있었고, 그렇게 가지 말라고 우려하는 곳으로 용감하게 가는 학생도 있었다. 지금 와 그들의 삶을 보니 정답이 없다. 말을 잘 듣던 학생이 모두 잘 된 것도 아니고 말을 듣지 않은 학생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삶의 선택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차이는 사람마다 다름을 나는 일찍 알지 못했다.
감나무를 쳐다본다. 많은 풋감이 달려있다. 과육 속에 튼튼한 씨앗을 감추고 가지와 잎 사이에서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고 있다. 저 감 중에도 제대로 익지 못해 이미 떨어진 풋감의 뒤를 따를 것도 있겠지. 기억 속에 가물가물 잊혀가는 많은 제자가 생각난다. 익지도 못하고 떨어진 풋감이 된 제자도 있고 아직 나무에 달린 제자도 보인다. 사람이나 풋감이나 삶에는 별반 큰 차이가 없음을 느낀다. 이곳도 덥다.
젊은 엄마가 유치원생쯤 된 아이 손을 잡고 감나무 옆을 지난다. 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떨어진 풋감을 주우려 한다. 젊은 엄마는 재빨리 아이의 손에 온전한 감만 쥐여 준다. 상처 입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이 손에 놓인 초록 색깔의 풋감이 괜찮아 보인다. 엄마의 표정이 진지하다.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내가 풋감이라면 저 떨어진 많은 것 가운데 어느 감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까. 가물가물하게 생각날 듯 말 듯 한 어릴 때의 꿈을 떠올려본다. 뚜렷하게 무엇이 되고 어떻게 살겠다고 마음 굳게 먹고 살아온 것 같지 않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직장에서 정년퇴직했으니 나무에 달린 감은 못 되겠고 바닥에 떨어진 풋감 가운데 하나쯤 될 것 같다. 그래도 돌이나 보도블록에 떨어쳐 박살이 나거나, 떨어질 땐 요행히 온전했으나 지나가는 이에게 밟혀 몰골 흉하게 되지 않고 젊은 엄마에게 선택된 감쯤 되었으면 한다.
나는 안다. 하루만 지나면 어린아이 손에 들린 감도 다갈색으로 변해 호감을 잃게 되리란 것을. 그래도 떨어진 감 중에 온전하게 모양을 갖춘 감이 되어 젊은 엄마의 선택을 받고 싶은 것은 아직 마음에 욕심이 남아 있다는 것을.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더위도 곧 한풀 꺾일 때가 되었다. 인생 종반에 와 있으나 남은 삶에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싶다. 떨어진 풋감일지라도 온전한 모양으로 남고 싶다. ♡ (20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