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Mouseum of Modern Art, New York
*파블로 피카소, 세악사, 1921 뉴요크 근대미술관
파피에 꼴레; Pablo Picasso, Guitar, Newspaper, Glass and Bottle, 1913, Tate Gallery, London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세악사 1921년, 뉴욕 모던 아트 미술관
참고도판 1. 마네 피리부는 소년
참고도판 2. 브라크 에스타크의 나무들 1908년, 베른 쿤스트 뮤제움
##브라크 에스타크의 나무들 1908년, 베른 쿤스트 뮤제움
그 남자는 서점에서 피카소의 화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게 뭐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고는 웅얼거린다. 그 표정에는 잘 그려진 그림이라면 아름답게 느껴져야 할 것이 아니냐는 짜증이 담겨 있다. 그리곤 옆에 있는 여자를 힐끗 본다. 더럽게 무식하네 하고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까봐 불안한 눈치이다.
그러나 불안하게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피카소의 그림은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그린다는 관점에서 점수를 매긴다면 20세기 미술사의 채점표에서도 피카소는 낙제점이다. 왜냐하면 20세기 미술의 목표 자체가 잘 그린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미술사의 흐름은 셋으로 대별될 수 있다. 답습과 승계, 개혁과 파괴, 변화와 발전이다. 아름다운 그림은 답습과 승계의 흐름이다. 카메라의 발명 이전에 최고점수를 받았다. 개혁과 파괴는 위험부담이 큰 역류이다. 때로 불안한 고득점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중이 줄어들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결국 최고점은 변화와 발전에 주어진다. 변화란 그레코 로망의 흐름, 즉 인간중심의 합리주의 사상을 뼈대로 한다. 그 위에 표현방식을 바꾼다. 발전이란 그 흐름의 물길을 확장하는 것이다.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대명사이다. 가장 큰 공적은 콜라주와 입체주의에 있다. 콜라주는 붓으로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풀로 붙인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 하더라도 실물보다야 잘 그릴 수 있겠는가.
그 절망에서 실물대신 실물의 이미지가 인쇄된 사진이나 실물을 붙였다고 미술사는 기술한다. 그러나 사실 이 기술은 약간 과장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쇄매체는 당시 유럽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어디서나 신문의 큰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카페 등의 창문에 이러한 글씨들은 그 반대쪽의 인물이나 풍경위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실재하는 오브제를 발견했다는 쪽으로 해설되는 경향도 있다.
그런 배경에서 초기에는 신문이 즐겨 쓰였다. 벽지, 기름천, 성냥갑과 프로그램 등이 뒤따랐다. 피카소는 석고를 쓰기도 했다. 브라크는 새로운 매체를 목탄이나 연필로 그린 드로잉과 결합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함께 작업하는 유화에 붙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거의 단색조였던 화면은 곧 밝은 화면으로 바뀌게 된다.
방금 유화라 그랬지? 그 유화의 장례식이 있었다. 16세기부터 서구회화를 지배했던 찬란한 권좌가 붕괴된 것이다. 브라크의 신문 한 장과 피카소의 석고 한 푸대가 3세기 유화의 아성을 무너뜨린다.
그럼 유화는 정말 죽었나? 많은 화가들은 유화 자체로는 불안을 느꼈다. 모래를 섞어 두껍게 만드는 기법은 그런 배경에서 개발되었다. 1918년 이후 브라크는 프랑스의 전통적 미감을 향하여 화면위에 물체의 재질을 시험했다. 그것이 큐비즘의 종말로 기록된다.
입체주의는 대상을 기하적 단위로 분해한다. 아프리카 조각은 분해된 형체가 비숫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도입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뒷면을 동시에 화면 위에 그리기도 한다.
콜라주와 입체주의는 사실상 변화와 발전의 흐름은 아니다. 콜라주는 붓으로 그리는 그림과 진흙을 붙여 만드는 조각의 경계를 파괴했다. 입체주의는 카메라의 평면시각과 고전적 미의 관념을 개혁했다. 그런데도 피카소의 방식은 변화와 발전으로 인식되었다. 피카소의 기막힌 작전이 주효했던 것이다.
스페인 태생의 야수 피카소는 본능적으로 파리화단의 냄새를 맡았다. 파리화랑이 세계의 화단이었다. 화랑을 공략해야지. 피카소는 친구들을 번갈아 화랑에 보내 피카소 그림을 찾게 한다. 화랑주인이 피카소를 애타게 기다릴 무렵에 피카소가 나타난다. 그것이 제1전략이다.
두 번째 전략은 브라크를 내세우는 것이다. 브라크는 파리 화단의 자존심이라 할 만했다. 콜라주는 브라크와 공동의 작업으로 인식되었다. 입체주의에서도 브라크는 방패막이였다. 세잔을 발굴하여 그 경험적 떡잎에 자신의 싹을 접붙여 만든 것이 입체주의였다. 입체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브라크의 작품인 <에스타크의 나무들>에서 나왔다.
1908년 브라크는 마르세이유 근처의 에스타크에서 풍경화를 살롱에 출품한다. 세잔의 분석적 방법과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살롱 드 톤느의 심사위원들은 이 풍경화를 거부했다.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인 마티스는 루이 복셀에게 브라크가 작은 입방체로 된 그림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복셀은 기묘한 입방체라고 조롱하여 말했다. 그것이 큐비즘이라 알려졌다.
그렇게 재주는 브라크가 넘고 이익은 피카소가 챙겼다. 오늘날 입체주의는 피카소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대조적인 화가이다. 브라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페인트 공이었다. 젊은 날의 브라크 역시 페인트 공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브라크는 집을 칠하는 페인트 공의 정성으로 작품을 매만졌다. 기능과 솜씨 역시 페인트 공으로 단련된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장이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전통적 미의식에서 세계를 재해석했다.
피카소 역시 기능과 솜씨는 천부적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아이디어였다. 건실한 테크닉보다 순발력있는 아이디어가 앞설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피카소에게는 말년의 상업주의적 작품의 양산으로 나타났다. 이미 소비규모가 극대화되어 작품의 대량생산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 피카소 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 위대하지?
세 번째 전략은 치고 빠지기이다. 피카소의 작품 경향은 크게 청색시대, 장미빛시대, 입체주의시대, 신고전주의 시대, 표현주의적 시대, 상업주의시대로 나눌 수 있다. 시대를 만드는 것은 물론 피카소이다.
피카소가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제작한다. 사람들이 지켜본다. 그 경향 중에서 대표작이라 생각되는 작품들을 사들인다. 수요가 충족되면 발길이 뜸해진다. 그 때 피카소는 경향을 바꾼다. 그 시기를 아무나 파악할 수 있나? 그래서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는 것이 피카소였다.
아프리카 조각을 먼저 도입한 것은 드랭, 마티스, 블라맹크 들이다. 아프리카는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인의 관심권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리빙스턴, 스탠리의 탐험이 있었다. 이어 각국에서 지하자원과 식량자원 및 흑인 노예 등의 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피카소는 파리장들이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조심스레 <아비뇽 홍등가의 아가씨들>에 옮겨놓았다. 그것이 1907년의 일이었다. 작품을 본 아폴리네르와 브라크 등이 맹렬히 비난하자 피카소는 1937년까지 화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지독한 자기관리의 극치인 셈이다.
<아비뇽 홍등가의 아가씨들>은 세잔의 형태에 대한 분석과 단순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베리아의 조각과 북 아프리카의 가면은 개념적이면서도 주술적인 표현력이 결합되어 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 있지? 솔직히 손들기 바란다. 그리고 드모아젤이라고 프랑스어로 읽은 사람은 귀부인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작품이 워낙 알려지니까 제목도 여러 가지가 나왔다. 창녀는 너무 노골적이고 유녀는 일본냄새가 난다. 그런데 피카소가 귀한 집 따님이라는 뜻의 드모아젤이라는 말을 쓴 데는 의미가 있을 터이다.
작품은 유곽에 있는 다섯 누드를 보여준다. 피카소는 30년간이나 그림을 발표하지 않으면서 여러 번 고치고 또 고쳤다. 처음에는 벌거벗은 창녀들 사이에서 선원이 해골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해골이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상징체계는 고갱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드모아젤은 죽음의 아가씨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면서 피카소는 부지런히 그리스 신화나 로마네스크 풍의 그림을 작품으로 옮겼다. 마네 세잔 등 파리의 정통파 흐름을 자기화했다. 말하자면 들짐승같은 생존본능과 자기관리의 성공이 피카소를 천재중의 천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세악사>라는 파피에 콜레 작품이 있다. 유화 위에 종이를 오려붙였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은 <세 악사>의 할아버지라 할만하다. 마네는 소년의 배경을 색종이처럼 단순화했다고 해서 톡톡히 욕을 먹었다. 피카소는 피에로와 광대와 수도승의 가면을 종이로 오려붙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칭찬을 들었던 것은 마네의 개혁을 발전시킨 공로였다는 것이었다.
도판 위: 피카소 아비뇽 홍등가의 아가씨들-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소장
도판 아래: 마네 풀밭 위의 점심과 라이몬디의 인그레이빙 판화-H.W.Janson, History of Art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