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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야기
아버지의 막내 동생인 기환(箕煥)이가 태어난 때는 1931년 4월 11일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辰赫)가 환갑 전인 5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후 홀로 되신 할머니(전주 이씨)를 모시고 살던 43세의 부친(尙烈)과 45세의 모친(韓氏)은 7년 전에 하점면의 이강리 출신 황영준(黃英俊)를 사위로 맞아 큰 딸 이화(李花)를 하점면으로 출가시켰다. 큰 매형은 한때 살무니에서 머슴살이했던 적이 있어서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어서 아버지가 커서도 그 매형은 큰 처남인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다.
막내 동생이 태어나자 집에는 76세의 할머니가 계셨고 부친 부부 슬하에 출가하지 않은 19살의 누님인 춘선(春宣)이와 그 아래로 12살인 아버지(承煥) 그리고 9살의 영환(英煥)이와 그 아래로 6살의 종환(淙煥)이가 한 식구로 살고 있다가 모두 여덟 식구가 한집에 살게 됐다. 이 오 남매는 누님이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모두 할아버지 없이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무니의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 동기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전에 살무니의 살던 집을 지었다는 사실과 할아버지가 집안 담 안쪽으로 할머니를 위해 우물을 만들었는데 윗말에 우물이 귀해 부근의 집들이 윗말 위쪽 언덕 아래에 있는 용 냇가 개울에 있는 곳의 샘물까지 가서 힘들게 물을 길어먹는 것이 안돼서 집의 우물 안으로 담을 다시 쌓으니 집의 우물이 집 밖 길옆으로 들어나서 부근의 이웃집들이 우리 집 우물을 같이 쓰게 됐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9살 때까지 동내 서당에 다녔던 아버지는 그해 양도 소학교 3학년이었다.
집 옆의 작은아버지(尙順 39세)댁에 칠성(15세), 범성(9세), 인성(5세), 세 사촌이 있었고 동내에는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8촌들이 8명이 있었는데 이들 중 소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아버지뿐이었다.
31살인 손위의 삼손형의 경우야 학교가 개교한 지 5년밖에 안됐으니 입학할 처지가 안 되서 그랬지만 사촌 형 칠성이나 또래의 집안아이들 중에는 아무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버지동생들과 집안의 다른 동생들도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집안에서 소학교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었다.
어려서 동내 서당에 다녔던 아버지는 서당에서 윤 씨 집안 애들의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많이 울기도 했고 서당에 안 간다고 모친에게 떼도 많이 썼다고 했다. 그러다가 열 살 때부터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양도소학교 3회로 졸업했는데 졸업동기 중에서도 아버지의 나이가 동내에서 가장 어렸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공부를 잘하니 부친은 아버지가 무척 대견했던 모양이다.
막내 기환이 태어난 때가 고향 살무니에 우리 집안이 가장 많이 살던 시절로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큰할아버지(진오)와 선달할아버지(석주) 외에 막내할아버지(원석)로 세분이 계셨고 아저씨뻘로는 부친까지 모두 10분이 있었으니 집안의 모든 식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열한 집에 60여명 정도였다. 조카뻘인 학섭이도 다섯 살이었으니까 윗말에 집안 사대가 모여 산 셈이다.
살무니를 호령하던 선달 할아버지의 아들 중 삼십대인 창수 덕수 두 아저씨를 동내에서 힘으로 당해낼 장정이 없었다고 했다.
동내 어른들이
“살무니에서 누가 창수, 덕수를 이겨. 어림도 없지.”
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가 글로 남겨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다.
병자호란 때 피난 중이던 왕자의 한 호위병사가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자 홀로 탈출하여 고려산의 산골의 민가로 피신해서 그 민가의 주인 딸과 결혼한 후 고향을 찾지 못하고 강화도에 정착했는데 그분이 강화도 우리 집안의 선조가 된다. 수안이씨 25대인 그 선조의 후손은 8대에 걸쳐 독자로 대가 이어졌다. 30대 선조가 살무니로 이주해서 정착한 후에도 3대에 걸쳐 독자로 대가 이어지다가 34대 때 비로소 삼형제가 태어나 이후 집안의 후손들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 우리 집안인 수안이씨 강화파의 내력이다.
원래 파평 윤씨의 집성촌인 살무니의 윗말에 살던 이씨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초시에 급제한 선달할아버지가 동내에서 영향력이 커지니 윤씨 집안에서 집안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유학한 윤명선이라는 인물이 양도소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후 윤명선을 중심으로 윤씨들이 이씨 집안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살무니는 남쪽으로의 진강산과 그리고 북쪽의 덕정산으로 해서 동쪽의 불오리 고개까지 삼면으로 산에 둘려 쌓인 산골 마을로 이미 부락의 40여 집의 후손들이 이어갈 농사의 터전을 확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미 용내의 좌우로의 개울가는 물론 옆으로 경사진 산자락까지 빽빽이 논이 들어섰는데 절반이상이 천수답이었으며 더 높은 경사지도 이미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더 이상 새로운 농경지 확보가 무척 어려웠다.
이런 사정으로 몇 년 후 집안의 절반 이상이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석포리, 옹일, 동검도, 연백, 불오리 등으로 이사하면서 살무니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미 큰집에 양자로 간 석주 할아버지의 장남인 아저씨뻘의 7촌인 창학 아저씨(53세)는 일찍 석포리에 정착하여 아버지와 팔촌간인 세 아들 (삼석 36세, 홍석 30세, 윤석 22세)을 두었고 여섯 명의 조카들도 태어났으므로 섬인 석모도에도 이씨 집안의 식구들이 이십여 명을 넘었다.
당시 양도소학교는 일본인 교장이 윤명선 선생과 둘이 있었는데 윤명선 선생이 1,2학년을 합해서 한 반을 담당했고 3,4학년을 한 반으로 해서 일본 교장이 가르쳤다.
사학년 방학 때 인천을 다녀온 아버지가 집으로 가던 중 흥천의 학교에 들렀다가 교장선생의 부인을 만나서 인사를 한 후 한참 이야기를 하게 됐다. 아버지의 일본어 실력은 일본인 부인과 대화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교장부인은 어린 조선 소년이 일본 말 잘하는 것을 기특히 여겨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를 옆에서 들었던 윤명선 선생이 저녁때 동내에 이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 일본어 실력이 양도소학교에서 최고라는 소문이 금방 동내에 퍼졌다. 그렇게 소문이 나니 윤명선선생의 기분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더 많은 동내 집안의 동급생 중 누구도 이씨 집안의 아버지를 실력으로 앞서지 못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는데 말이다.
공부시간에 특히 윤씨 집안의 학생들이 학습 진도에 잘 따라오지 못해서 화가 나면 윤명선선생의 무자비한 체벌이 종종 그들에게 내려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양도 소학교를 마치고 읍으로 전학했다.
누구든지 4학년을 졸업한 후 5,6학년을 다니려면 읍에 있는 학교로 가야했다.
강화읍에서는 아버지는 형뻘 되는 11살 위인 윤석 형님 집에서 하숙하며 학교를 다녔다. 윤석 형님은 당시 강의록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거쳤으며 동화약품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여 주의에서 부러워하는 직장인이었는데 형수 되는 황순이(黃順伊)씨는 여학교를 졸업하고 영어선생을 했던 당시로서는 인텔리신여성이었다.
강화소학교 졸업동기 중 여덟 명이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그 중 네 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16살이 되던 해다.
인천상업학교에서는 매년 10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는데 절반이 일본인이고 절반을 조선인 중에서 선발하는데 우수한 학생들이 응시해서 경쟁이 치열했다.
합격자 발표도 방송으로 나왔는데 장날 읍 장터에서 라디오의 발표에 아버지의 이름을 듣게 된 삼손 형이 너무 기뻐서 큰 소리로 좋아하며 춤을 추니 주위의 장꾼 한 사람이
“왜 그래 이 사람이, 뭐가 그리 좋아서 난리야, 춤까지 추면서!”
“집안 동생이 인상에 합격했대요. 방송에서 지금 들었다고!”
“그거 그렇게 기분 좋으면 한잔 사!”
“그렇죠. 한잔 삽시다. 기분 좋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장꾼에게 35살의 삼손 형은 기분 좋게 술을 한잔 샀다고 했다.
인상에 합격한 아버지가 살무니에 도착하니 동내에서는 크게 환영했다. 살무니에서는 윤명선 선생을 비롯해 두어 명이 서울에서 공부를 마쳤거나 수학 중이었지만 명문 인상에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학했으니 동내 어른들은 모두 아버지를 반가이 맞았고 집안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버지는 인상을 다니면서 졸업할 때까지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축구부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아버지가 인상 다닐 때에도 군국시대의 영향으로 교련 시간이 있었지만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라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주위의 부러움을 받아가며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졸업반이 되면 격년으로 일본이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녔는데 아버지 때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교련 비무장 복장으로 다녀온 사진은 인상에서 최초로 만든 졸업앨범을 장식했는데 아버지의 앨범은 사변이 이후 내가 인고 다닐 때도 집에 있었는데 그 앨범이 단 한 권만 남아 있다고 해서 아버지는 노년에 모교인 인고에 그 앨범을 기증했다.
인상 졸업 후 아버지는 만주 중앙은행에 취직해서 하얼빈에서 은행원의 생활을 시작한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뒤 만주국을 세워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국의 황제로 세워놓고 통치하던 시절이다.
만주에서 은행에 근무하면서 아버지는 하얼빈중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2년 만에 졸업하고 중국어교사를 담당할 수 있는 중국어 2급 자격을 얻었다.
고향에서 혼담이 있어 아버지는 조산리의 최고 갑부인 김재호의 일곱 딸 중의 여섯째인 김순옥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소학교 시절 배제학당을 다니며 방학 때 망토차림의 교복을 입고 여러 명의 동내 동생들을 거느리고 양도면을 휘젓고 다니던 장인의 외동아들 김재순(해방 후 첫 양도면장을 역임)을 보면서 부러워했는데 나중에 처남 매부지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신혼살림을 만주 하얼빈에 있는 만주중앙은행의 직원 사택에 차린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콤한 신혼을 보낸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송화강의 겨울 얼음축제가 당시에도 있어서 송화강의 커다란 얼음 십자가를 배경으로 찍은 신혼부부의 사진은 지금도 70여 년 전의 두 분 모습을 보여준다.
조산소학교를 1회로 졸업한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장모님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조산교회를 다녔고 소학교 졸업 후 조산학교의 교사로 일했고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도 담당했는데 당시에 매우 개방된 처녀 시절을 보낸 셈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부부가 함께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다닌 찌찌하루 조선인교회에는 이등방문을 저격한 안중근의사와 함께 거사에 참여한 후 옥고를 치룬 우덕순씨가 장로로 있어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우덕순 장로와의 만남을 계속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지던 중 어머니가 임신하니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고향 친정으로 보냈는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일본이 곧 패망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직서를 제출하여 1945년 8월 6일 사표가 수리되자 만주 생활을 마감하고 짐을 정리해서 소하물로 탁송시켜 고향으로 부치고 강화로 돌아왔는데 인천에서 배편으로 초지에 도착한 짐을 찾아 살무니로 운반을 마친 다음날 815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얼마 전인 그해 6월에 90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묘를 찾아 늦은 인사를 올렸다. 동내의 윤씨 집안에서는 장례식 때 한 집도 문상오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한참동안 다른 동내 사람들과 장례 쌀 계를 들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이때 들었다.
9월 15일 첫 딸 정신을 얻은 아버지는 모교 인상의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전동 16번지의 집을 사서 1948년 1월 10일 아들 효철이 태어나니 네 식구가 동인천역 5분 거리인 전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1950년 2월 모친이 돌아가시니 아버지의 사형제가 모친의 장례를 치렀다. 학교에서 아버지가 담당했던 중국어 활동반의 몇이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하여 퇴학 및 구금되는 일이 발생하자 아버지는 인상에 사표를 내고 외자청에 근무하던 중 6월25일에 사변이 일어났다.
공무원 신분인 아버지는 두 자식을 부인에게 맡기고 홀로 피난을 떠났는데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강화의 친정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충청도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수복 후 인천으로 돌아와서 식구들이 전동에 다시 모였는데 전동 집은 집안사람들의 인천 집합장소가 되어버렸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전선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점차 밀리기 시작하니 많은 강화 친척들이 전동으로 모여들었다.
막네 처제인 옥희의 1월1일 결혼식 날은 전동 집에서 신랑신부의 피난 짐을 쌓는 날이 되어버렸고 1월 2일에는 동생 종환이가 형수의 친정 장조카인 봉겸이와 함께 선편으로 강화로 떠났으며 다음날은 어머니가 얼마 전에 얻은 막내 은주 등 세 자식들을 데리고 강화를 가기위해 장봉으로 떠났다.
홀로 집에 남은 아버지는 1월 4일 날 소개통고가 내려진 줄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피난선을 놓친 후 다음날부터 도보로 인천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 힘든 100일간의 피난생활을 겪는다.
아버지가 남긴 피난일기가 있어서 그 내용을 다른 글로 정리했는데 평택에서 유엔군 병사에게 백주에 강도당한 일, 그리고 2월 15일 태안을 경유 안흥에 도착하던 중에 만난 고대섭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난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어떤 일을 당했으면 “고대섭이라는 무정하고 인색하기로 No One인 작자”라고 글로 적었는지.......
사변 중 간난 막내 은주가 사망했고 식구들은 인천의 전동에 다시 살기 시작했다.
휴전을 전후로 이북에서 피난 나온 학교가 이곳저곳에서 개교하는데 개성에 있던 기독교 재단의 동광중학교가 강화군 양도면에서 중학교를 설립하니 아버지는 동광중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피난 중 현지입대한 동생 영환이 살무니 집에 없으니 살무니에서 출퇴근하는 아버지는 부친의 농사일도 본격적으로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큰 딸이 미군이 주둔하는 축현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신흥국민학교의 천막교실로 다니기 시작하니 아버지는 고향에서 학교에 출퇴근하며 방학 때나 인천에 들르는 기러기 아빠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동생 영환이 제대하여 집에 돌아오고 종환이도 결혼하여 살무니 집 사랑채의 건너방에 살림을 차리고 양도국민학교의 교사로 출퇴근하니 살무니의 집에는 부친과 세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와 두 조카 효신이와 애신이 해서 한 집에서 여덟 식구가 살기 시작했고 그래서 가운데어머니는 시아버지는 물론 큰 아주버니가 되는 아버지와 시동생까지 시중을 들고 이 후도 큰아주버니인 아버지와 한 집에서 같이 오랫동안 살게 된다.
그러던 중 1952년 4월 21일 둘째 딸 명신이 인천에서 태어난다.
아들 효철이 축현초등학교 일학년을 마친 1953년 초 인천 식구들이 살무니로 이사했고 전역해서 귀향한 동생 영환이는 가운대말에 집을 사서 세간을 나갔고 얼마 후 셋째 종환이도 흥천 학교 옆의 집을 사서 세간을 나가니 살무니 집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네 식구가 살기 시작했다.
그해 봄에 부산에서 결혼한 막내 기환이가 제수와 어린 딸을 데리고 중위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으로 한 밤중에 살무니를 찾아오니 살무니에 오랜만에 사형제 부부가 모였는데 부친은 막내손녀 화자를 안고 막내아들 부부의 절을 받으며 무척 기뻐했다. 집안에서는 아무도 그때까지 막내의 결혼 사실을 몰랐다.
그해 늦가을 위암으로 부친이 세상을 뜨니 아버지는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도 짓고 교사의 생활도 계속하면서 1956년 6월에 삼녀 형신과 1959년 4월에 막내아들 길재가 태어났는데 다음해 큰 아들이 양도국민학교를 졸업하니 인천으로 온 식구들을 보내서 자식들이 공부하게 하고 살무니 본가로 다시 이사한 동생 영환이 집에서 얹혀 지내며 동광중학교로 출퇴근하는 두 번째의 기러기아빠신세를 이후 7년 동안 또 계속한다.
기대했던 큰아들 효철이는 인천중학교에 떨어져 성광중학교에 입학했고 간호고등학교에 떨어진 정신이는 인천여고에 입학했고 명신이는 축현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교감으로 승진한 아버지가 주말이나 방학 때 인천 집에 오면 공부대신 놀기 바쁜 큰아들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이 계속됐고 가끔은 부부사이에 언쟁도 있었는데 이집은 딸들만 공부하고 아들은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가 대놓고 한탄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축현국민학교로 전학한 명신이의 성적이 해마다 올라 5학년 때에는 우등상을 받고 그리고 6학년 때에는 반에서 일등을 해서 딸 친구들이 딸과 함께 공부한다고 집에 모여들기 시작하니 그 한탄은 큰 아들이 인천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큰딸이 인천교대에 입학하고 큰 아들이 인천고를 수석으로 졸업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합격하니 아버지는 생전 최고의 기쁨을 누렸다.
아들의 합격소식을 듣고 학교로 출근 중 동내 빨래터에서 빨래하던 동내아주머니들이 깔깔거리며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저 여편네들은 무엇이 좋아서 저리 난리야?
지금 세상에 나보다 더 기분 좋은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라는 이야기로 아버지는 기뻤던 기억의 한 토막을 남겼다.
다음해인 1967년 큰 딸이 양평의 개군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고 큰아들이 서울에서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학업을 이어가니 인천여중에 다니던 명신이와 동생들을 데리고 동광중학교 부근 양도시장터의 집을 사서 이사하고 명신이는 동광중학교로 막내딸 형신이는 조산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동광중학교 초대 심관식 교장 후임으로 1968년 아버지는 교장으로 승진하여 1970년 강화읍의 심도중학교로 옮기기까지 17년간의 동광중학교 시절을 마감하고 강화읍의 관청리로 이사한다.
1972년 강화 대월초등학교에 근무하던 큰 딸이 큰사위 이낙현에게 시집을 가고 다음해 학훈단 보병 중위로 제대한 큰 아들이 한국나일론(코오롱)에 취직해서 대구로 떠날 때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큰 며느리는 가까운 곳 여자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1976년에 대구출신의 박정희를 큰며느리로 맞이한다.
1980년 강화군 삼산면의 승영중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임한 아버지는 관청리의 살림을 정리하고 인천 석바위로 이사한 후 집안 모임의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강화파 수안이씨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83년 4월 이신우를 셋째 사위로 맞이하고 1984년 임기종을 둘째 사위로 막내 며느리 최미순을 1987년에 맞이하니 슬하의 모든 자식들이 새 가정을 꾸려 1990년
아버지의 칠순잔치에는 사형제의 부부와 말머리에 살던 누이 춘선, 막내 처재 옥희, 사촌 범성이 그 자리에 함께 했는데 두 며느리와 세 사위 그리고 세 명의 친 손주와 다섯 명의 외 손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둘째 제수와 큰 사위 그리고 큰딸, 또 큰 며느리가 이 잔치에 빠졌지만 아버지는 이날 생애에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주안감리교회의 장로인 아버지는 그 교회의 한경수 목사와 동광중학교 초대 교사로 교단에 함께했던 인연으로 나중에 원로 목사 겸 감독인 한 감독 그리고 최고 원로 장로인 이 장로 사이의 친분은 주안감리교회에서 계속 유지된다.
강화파 수안이씨의 집안모임을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온 집안이 매년 1월 1일에 신년 모임을 가지며 8월 15일에는 강화 진강산 덕정산 등의 선산에서 단체로 모여 벌초하는 행사를 시작하게 해서 아버지는 집안의 새 전통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서 살무니의 윤씨 집안도 같은 날 단체벌초가 시작되니 벌써 30년 이상 매해 광복절이면 살무니 산에서는 여기저기 예초기소리가 진동한다.
우리집안을 시기하기를 앞장섰던 윤명선 선생은 광복 후 양도국민학교의 교장이 된 후에도 계속하여 이씨 집안을 괴롭히려했지만 다음해 급병으로 사망하니 윤씨 집안의 우리 집안에 대한 적대행위는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윤교장이 죽고 나서 얼마 후 양도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던 동생 종환이 강화군 교육청에 들렀더니 장학사가
“전에 양도 윤교장이 직접 나에게 이종환 선생이 삼산면의 서도분교로 전근을 희망하니 조처해달라고 하던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까? 세상에 누가 그 외진 섬 근무를 가려고 하나 이상해서 그냥 지내고 있었는데 그런 적 없었지요?”
라는 이야기를 해서 이를 듣고서 윤명선 교장의 끈질겼던 비열한 수작에 대해 아버지도 나중에 알게 됐다고 했다.
해방 후 아버지와 삼촌이 교편을 잡고 집안의 가세들이 자리를 잡으니 윤씨 집안에서 다시 앞장서 우리집안을 대적할 인물도 그럴 명분도 없었으며 주변 부락에서도 계속 이어진 윤 교장의 행위에 대해 그동안 말이 많아서 사실 윤씨 집안에서도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후 그리고 사변 후 피란 나온 수안이씨중심으로 모인 수안이씨의 대종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강화로 병자호란 때 정착한 강화파의 선조가 누구인지를 계속 찾기 시작했다.
1957년 수안이씨 중 운산파에서 운산파 세보를 발행할 때 강화파를 운산파에 입적시킬 적에 아버지는 윤석 형님과 함께 그 일에 적극 참여하였고 1981년 운산파에서 새로 세보를 발행하면서 강화파를 운산파에 입적시킨 근거가 부당하다하여 강화파의 재 등재가 거부된 후에 아버지는 꾸준히 집안의 뿌리 찾기를 계속했다.
1987년에는 발간된 성천파세보의 부록에 등재된 강화종문손록(江華宗門孫錄)을 근거로 1989년에 강화파기사보를 발간했고 계속 수안이씨의 다른 파본을 조사해서 중화파의 24대 흥엽조의 차남인 정직조가 강화파 시조인 26대 기용조의 부친임을 확인해서 대종회의 확인을 거쳐 정식으로 강화파의 뿌리가 중화파임을 인정받기에 이르렀으니 1997년 1월 18일의 일이다. 이를 근거로 아버지는 다시 5월 5일 강화파 수안이씨 정축보를 새로 발간해서 집안에 배포했다.
2006년 1월 1일 대명리의 삼준아저씨 댁에서 열린 강화파 신년하례식에서 대종회에서 정식으로 발행한 수안이씨의 원류분파도를 온 집안에 배포했으니 그 분파도에는 강화파가 당당히 포함된 족보의 역사기록이었다.
이를 근거로 2007년 수안이씨 강화파 정해보가 발간됐으나 아버지는 이를 보시지도 못하고 2006년 4월 10일 주안감리교회에서 새벽부흥집회를 마치고 집에 오시다가 그 새벽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 후 3년 뒤에는 아버지의 평생 반려자였던 어머니 김순옥 권사도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2009년 5월 2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바로 다음날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진강산 밑에 자리 잡은 내 증조부 묘소 옆에 3년 먼저 묻힌 부군 아버지와 함께 합장된 후 두 분은 매년 묘소를 찾는 후손들의 방문을 반기시며 지금 하늘나라에서도 자식들과 집안을 위하여 늘 기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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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이야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어머니의 고향 장봉이 나와 반가웠고 윤씨들이 그렇게 적대행위를 했다하니 분노가 일었습니다.
모든 글이 회장님의 가족 이야기를 벗어나 우리 수안 이씨 강화파의 역사이고 보면 무척 소종한 자료이지 않나 싶습니다.
생전에 뵈었던 승환 회장님이 그리워지는 밤 입니다. 회장님! 수고하셨고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