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38
산남의진 창의지(倡義誌)와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를 참고하여 산남의진 열전(列傳)을 정리해서 동부신문에 기고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할애 받은 지면을 이용하다 보니 횟수도 오늘로 자그마치 38회다. 오늘 이한구 선생을 소개하고 나면 이제 의진(義陣)의 총사령관인 1차와 2차 의진 대장 정용기, 3차 대장 정환직, 4차 대장 최세윤 세 분만 남는다. 1차와 2차 진영의 중군장을 맡았던 이한구 선생의 이야기는 창의지에서는 10면이 넘고, 유사는 5면이나 된다. 산남의진을 창의하여 행군을 시작한 1906년 3월 5일부터 전사한 1907년 9월 1일 전사할 때까지 짧은 1년 6개월간이지만 비교적 소상히 그와 산남의진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진을 일으키고 얼마 되지 않아 정용기 대장이 적에게 붙잡혀 옥에 갇힌 후 이한구 중군장이 진영을 책임지고 지휘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한구 의사 조(條)에서는 열전의 인명록에 없는 두 사람이 거론되는데, 창의지 29면, 유사 554면의 기록을 보면 ‘3초장(哨長) 임춘실(林春實)이 자주 민간에 나가 노략질을 하므로 군법에 따라 참형했다’. ‘김건칠(金建七)을 의성지방에 보내서 모중(募衆)하도록 하고 본진은 다시 주방(周房)으로 들어가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창의지 30면, 유사 555면에는 ‘김건칠(金建七)의 실기(失氣)한 죄를 견책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대장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중군장이 군법으로 잘못한 하급 군관의 목을 베고, 임무를 소홀히 한 의병을 견책하는 등으로 그 군기를 엄히 한 내용을 보면 이한구 선생의 역할이 매우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임춘실(林春實)은 초장(哨長)의 직책을 맡았고, 김건칠은 따로 모병(募兵)을 위해 의성으로 보낼 정도면 나름대로 중요 인물일 터인데 의사록에 그 이름이 빠진 것은 의병 활동 중의 허물 탓이리라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비록 허물이 있었을지라도 그가 산남의진에 입진할 때는 나라를 위한 충심에서였을 것이니 의사록에서 빠진 일은 일면 억울한 일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이한구(李韓久) 義士
자는 한유(漢有), 호는 신성재(新省齋), 초휘(初諱)는 경구(暻久), 자는 경일(景日), 호는 지포(芝圃), 관향은 여강(驪江)이다. 약관의 나이에 연이어 양친(兩親)의 상(喪)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 의식을 행함에 법도를 지키는 것이 노성(老成)한 선비와 같이 하고 계모(繼母)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아우들을 가르침에 빈틈이 없으니 칭찬이 자자하였다. 가계(家計)가 청빈하였으나 지평(芝坪: 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지동)에 우거(寓居)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정용기 대장, 정순기 선생과 나라 걱정을 하며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하니 당시 사람들이 유비와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에 비유하였다. 정환직 대장이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그의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일으킬 때 중군장(中軍將)의 책무를 맡아 내외 대소사를 찬획(贊劃)하였으며, 정용기 대장이 경주병정진의 간계에 빠져 적에게 붙잡힌 후로는 그가 석방될 때까지 진영을 새로 정비하고 총괄 지휘하였다. 정용기 대장이 우여곡절 끝에 석방되어 정미(丁未:1907)년 4월 제2차 의진을 조직할 때 다시 중군장을 맡아 상경작전을 지휘하다가 9월1일 입암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과 함께 전사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54><山南倡義誌 卷下 P27> 1963년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