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결어
한훤당은 점필재 김종직으로부터 『소학』 공부의 중요성을 계도(啓導) 받고
소학동자로 자처하며 진지한 실천의 체험을 거쳐 높은 덕성을 성취하여 당대의
사우들과 후학들로부터 도학(道學)의 모범으로 존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연산조의 사화에 화를 당하였지만 중종조 이후 엄연히 조선 도학의 연원정맥(淵源正脈)으로
존숭되었으므로, 그의 학문 사상과 언행과 사업은 그 당대의 사우와 문도는 물론
후대 학자들의 모범이 되어 조선조 학술 문화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한훤당이 남긴 문헌과 언행에 대한 진술과 관련 사적은 모두 조선도학 연원의
근거로서 선현들의 진중하게 여겨 대대로 수집 보완을 거쳤지만, 『경현록』을 비롯한 각종 문헌이 한훤당 당대에 있었던 두 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겨우 남아 전한 것을
수습한 것이고, 이후로도 몇 번의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전하는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 글에서는 조선중기에 한훤당의 시문과 사적을 수습하여 편찬한 『경현 록』의
편찬 체례(體禮)에 감발받아서, 한훤당에 대한 전문(傳聞)과 행적에 나타나는
정제(整齊) 정좌(靜坐)의 수양법과, 『소학』-『대학』의 학문 규모, 그리고
가범(家範)과 강회(講會)의 의식절차 등 세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한훤당의 도학과
그 학풍이 그 후학들에게 계승 파급되어 조선조의 학문과 사회 기풍의 형성에 끼친
경과를 대략 추정하여 보았다.
성리학의 이념과 『소학』규범의 이해와 실천을 근간으로 하는 도학은 한훤당에게서
비로소 시작된 것도 아니고, 한훤당에게서 완결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한훤당 이전에도 조선 도학의 불씨는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점필재 김종직을 통하여 한훤당에게
전해졌고, 한훤당 이후로도 도학은 한훤당의 문도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에게
파급되어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지고, 더욱 깊고 넓게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한훤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학』과『대학』으로 학문 규모를 정립하고, 성리학의 학문 신념에 입각한 철저한 자기 규율과 인간관계의 미덕을 진지하게 실천함으로써 문명사회를 구현하려는 조선 도학의 실체가 하나의 전형으로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한훤당은 조선시대는 물론 21세기 현재의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담보하는 존재로서 보다 깊이 있게 연구 계승되어야 할 중요한 인격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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